성 비오가 행한 기적들

 

5. 기적[편집]

일단은 그가 오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부터가 기적이었다. 죽기 하루 전에 완전히 사라졌으며, 아기와 같이 보드랍고 새하얀 피부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교황청은 이 성인의 오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오상을 가졌다고 알려진 다른 성인들의 오상도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너무나도 깊은 공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해석한다.[3]

하지만 비오 신부 본인에겐 이 오상이 너무 아파서 평생 고통이었다. 순례객들이 호기심 등의 이유로 만지거나 하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신부님, 오상은 어떤 느낌입니까?"라고 묻자 비오 신부는 그에게 "그대의 손에 못을 관통시켜서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며 사방으로 당겨보면, 내 고통의 3분의 1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그런데 그의 오상을 직접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은데, 늘 반장갑을 끼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도 미사를 집전하다가 축성경을 외우면 그의 두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4]

그리고 그가 일으켰다는 기적은 여럿 더 전해지고 있지만, 여백이 부족하므로 더 이상 적지 않기로 한다. 질병을 치유하거나 타인의 진심을 꿰뚫어보는 것은 흔했으며,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동시이처존재의 기적도 여러 번 일으켰다. 지금은 교회법이 바뀌어 시복시성에서 '부패하지 않은 유해'라는 조건이 빠졌지만, 사후 40년이 지났음에도 방부처리하지 않은 유해가 온전한 점 또한 기적으로 여겨진다.

그밖에도 성 비오 신부는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비오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폴란드에서 이탈리아 유학온 젊은 사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제가 장차 교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신부님이 앞으로 수행할 교황의 자리에 피가 보이는군요!!"라고 덧붙였다. 비오 신부가 만난 젊은 사제는 카롤 보이티와 신부, 바로 훗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리고 그는 교황 재직 중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다. 이후 비오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재위 시절에 시복, 시성이 모두 이루어졌다.

1938년, 후에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는 움베르토 왕세자의 아내인 마리조제 왕세자비가 비오 신부와 만나게 되었다. 비오 신부는 "곧 끔찍한 전쟁이 터질 것이며, 이탈리아의 군주제도 이 전쟁의 여파로 사라질 것입니다."[5]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탈리아 왕실은 전후 국민투표[6]를 통해 폐지되었다. 이후로도 마리조제는 비오 신부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다시 복원되어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혈통인 아오스타 가문에서 다시 군주가 즉위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7]

신기하게도 비오 신부가 사망하고 나중에 그의 시성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 왕자가 카푸친회 수사들의 초대로 비오 신부의 시성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공개된 부조 아이모네 왕자의 15살 시절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이 부조는 비오 신부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비오 신부가 사망했을 당시 아이모네 왕자는 1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각에서는 비오 신부가 아이모네 왕자가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예언하기 위해 이 부조를 만든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1950년 2월에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3개월 후에 벌어질 한국전쟁이 터지게 된다.

사실 위의 모든 이 기적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그의 영성이다. 일례로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국관구의 입회지원자 담당 수사는 "한국에 나온 비오 신부님 관련 책은 대부분 사이비야. 비오 신부님의 기적보다도 영성이 훨씬 더 중요한데, 기적만 강조해 놓음으로써 비오 신부님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따라갈 수조차 없는 존재처럼 묘사해 놓았어.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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