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론, 시누아즈리, 자포네스크의 역사적 배경
Völker Europas, wahrt eure heiligsten Güter.
유럽의 민족들이여, 그대들의 신성한 재보를 지켜라.헤르만 크낙푸스(Hermann Knackfuß), 1895
1. 개요[편집]
Die gelbe Gefahr (Yellow Peril, 黃禍論)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 제국과 청나라를 비롯한 황인종들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유럽인들의 위기론.
황화론에 대한 다트머스대학의 소개문[1]
두산백과의 "황화론" 항목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 제국과 청나라를 비롯한 황인종들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유럽인들의 위기론.
황화론에 대한 다트머스대학의 소개문[1]
두산백과의 "황화론" 항목
2. 유럽에서[편집]
이 "황화"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창한 사람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이다. 이러한 황화론은 당연히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황화론과 인종주의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인종에 대한 멸시적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제국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과 그와 충돌하고 있던 동시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Pan-Slavism)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때는 마침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때로, 동시에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지던 시절이다. 빌헬름은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2] 기회로 보고 마침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주창하여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상황을 유도하려 했다.
실제로도 (몇십년 전만 해도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을 하던) 일본의 갑작스런 국력 신장을 마주했던만큼 러시아와 영국이 둘 다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독일 제국 자체가 내정이 시망인 탓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3]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치는 데에는 보다 통속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빌헬름 본인이 그냥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4] 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독일과 중국에서 싸웠으니 감정이 좋기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럽으로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다른 극동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다며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으니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선 독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오는 데다가, 나중에 이들이 전쟁에서 뒤통수를 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헬름 2세는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대한제국 시절 고종과의 개인적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일단 유럽과 러시아 일대에서의 황화론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된다.
때는 마침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때로, 동시에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지던 시절이다. 빌헬름은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2] 기회로 보고 마침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주창하여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상황을 유도하려 했다.
실제로도 (몇십년 전만 해도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을 하던) 일본의 갑작스런 국력 신장을 마주했던만큼 러시아와 영국이 둘 다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독일 제국 자체가 내정이 시망인 탓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3]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치는 데에는 보다 통속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빌헬름 본인이 그냥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4] 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독일과 중국에서 싸웠으니 감정이 좋기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럽으로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다른 극동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다며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으니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선 독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오는 데다가, 나중에 이들이 전쟁에서 뒤통수를 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헬름 2세는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대한제국 시절 고종과의 개인적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일단 유럽과 러시아 일대에서의 황화론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된다.
3. 미국에서[편집]
그런데 정작 원조인 유럽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정치적 수사로 쓰였던 황화론이 이민 사회인 미국에 소개되고 나서는 약간의 의미 변화를 겪은 뒤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미국이 "도금 시대"라 불리는 호황기가 끝나가면서 몇몇 하류층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5]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기회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인종갈등론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 "황화(Yellow Peril)"라는 말이 자신들의 위기감과 새 인종갈등론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단어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이른바 "더러운 노란색 폭도들(Filthy Yellow Hordes)"이라는 문구.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황화론은 굉장히 오래 가서 (처음에는 중국계 미국인을 주로 타겟으로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 1917년의 이민제한법안과 1924년의 국적식별법안은 황화론이 주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20년대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 해서 곧 벌어질 대공황 시기보다 훨씬 더 풍요로웠는데도 저랬다.결국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
이러던 황화론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말 그대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황화론은 아예 태평양 전선에서 맞닥뜨린 동양인들을 침팬지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간다.[6] 거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나서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확산으로 미국의 황화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화론은 냉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증강 하는 동안 일본의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여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경제 패권 자리를 위협하자 더 극에 달한다. 단적인 예로 1988년 기준으로 시가총액으로 따졌을 때의 "세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다만 이 시기 직후는 황화론이 사그라드는 계기가 됐는데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마침 동시에 냉전도 끝이 나면서 (물론 중국과는 리처드 닉슨 때 이미 관계가 완화되었지만) 황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LA 폭동 때 두순자 사건을 집중보도 하기에 바빴던[7] 미국 언론들을 생각하면.....
하지만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황인 전반에 대한 경계심으로 번지는 경우가 함께 나오고 있다. 중국 위협론 문서 참조.
이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이른바 "더러운 노란색 폭도들(Filthy Yellow Hordes)"이라는 문구. 게다가 미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황화론은 굉장히 오래 가서 (처음에는 중국계 미국인을 주로 타겟으로 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확대되었다.) 1917년의 이민제한법안과 1924년의 국적식별법안은 황화론이 주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20년대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 해서 곧 벌어질 대공황 시기보다 훨씬 더 풍요로웠는데도 저랬다.
이러던 황화론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말 그대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버렸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황화론은 아예 태평양 전선에서 맞닥뜨린 동양인들을 침팬지로 묘사하는 수준까지 간다.[6] 거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나서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확산으로 미국의 황화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화론은 냉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군비증강 하는 동안 일본의 경제가 고속성장을 하여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의 경제 패권 자리를 위협하자 더 극에 달한다. 단적인 예로 1988년 기준으로 시가총액으로 따졌을 때의 "세계 50대 기업" 중 3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다만 이 시기 직후는 황화론이 사그라드는 계기가 됐는데 일본의 버블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마침 동시에 냉전도 끝이 나면서 (물론 중국과는 리처드 닉슨 때 이미 관계가 완화되었지만) 황화론이 미국 사회에서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LA 폭동 때 두순자 사건을 집중보도 하기에 바빴던[7] 미국 언론들을 생각하면.....
하지만 이후 중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황인 전반에 대한 경계심으로 번지는 경우가 함께 나오고 있다. 중국 위협론 문서 참조.
4. 유목제국들과의 연관성[편집]
엄밀히
말해서 "황화"라는 말은 17-18세기 당시에는 조어되지도 않았고 당시의 유럽인들도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기는 했어도
심각한 경계심 같은 것을 가지지는 않았다. 고로 황화론이 청나라(더 거슬러가서는 "몽골 제국")에 의해 시작됐다는 주장은 사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적어도 유럽에서의 황화론은 19세기 말 빌헬름 2세의 정치적 계략에 온 유럽인들이 수선을 피운 소동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유럽인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한 "신빙성"이란 것도 사실 일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사실 17-18세기 당시의 유럽인들은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 혹은 동경을 갖고 있었지 경계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누아즈리라고 해서 당시에 떠오르던 로코코 예술에 중국풍을 가미하는 게 대유행을 했고 이 때문에 온갖 경로에서 중국 예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이 시누아즈리는 사실 꽤 오래된 전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그 뒤를 이어 대륙을 먹은 청나라가 괜히 아시아의 은 먹는 하마라고 불린 게 아니다. 청나라 때 가서는 청 정부가 소유한 은이 많다보니까 당시에 거두던 인두세를 토지세로 바꿔버렸다.[8]
황화론을 청나라의 중흥과 연결짓다 몽골 제국에서까지 기원을 찾는 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결론부터 확실히 긋자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배운 호사가들 중에서 몽골 제국의 원 황실과 만주족을 단순히 소위 "시베리아 유목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해서 아예 동족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몽골의 원 황실과 근세에야 "만주족"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여진족, 알타이 제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언어의 어족부터가 다르다.[9]
적어도 유럽에서의 황화론은 19세기 말 빌헬름 2세의 정치적 계략에 온 유럽인들이 수선을 피운 소동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유럽인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한 "신빙성"이란 것도 사실 일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매우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사실 17-18세기 당시의 유럽인들은 청나라에 대해 막연한 환상, 혹은 동경을 갖고 있었지 경계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누아즈리라고 해서 당시에 떠오르던 로코코 예술에 중국풍을 가미하는 게 대유행을 했고 이 때문에 온갖 경로에서 중국 예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이 시누아즈리는 사실 꽤 오래된 전통이었기 때문에 명나라와 그 뒤를 이어 대륙을 먹은 청나라가 괜히 아시아의 은 먹는 하마라고 불린 게 아니다. 청나라 때 가서는 청 정부가 소유한 은이 많다보니까 당시에 거두던 인두세를 토지세로 바꿔버렸다.[8]
황화론을 청나라의 중흥과 연결짓다 몽골 제국에서까지 기원을 찾는 건 사실 신빙성이 희박하다. 결론부터 확실히 긋자면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제대로 배운 호사가들 중에서 몽골 제국의 원 황실과 만주족을 단순히 소위 "시베리아 유목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해서 아예 동족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몽골의 원 황실과 근세에야 "만주족"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여진족, 알타이 제어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언어의 어족부터가 다르다.[9]
5. 도교와의 연관성[편집]
19세기 말의 황화론은 중국의 도교와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시각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해외 역사학계에서는 의외로 상당히 진지한 연구 주제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시각이 제기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의화단 운동 때문이다. 의화단 운동은 토착종교에[10] 광신적인 근간을 둔 중국 민간 세력이 거대 조직화 해서 외국인들에게 집단적인 테러를 가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서구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의화단 운동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의화단이 하던 행동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국적을 막론하고 의화단 외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을 줄 만한 행동이 많았다.
의화단 운동은 통상적으로는 서구인들의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이 팍 깨지고 중국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였다는 면에서 더 주목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의화단 단원들의 광신적인 행위들을 보고 서구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저렇게까지 광신적인 행위에 몸담게 하는 저 중국의 토착종교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것인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황화론과 도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역사학적인 시각이 제기되는 것이다.
단, 본인들이 도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억울한 시각일 수도 있다. 청말 당시 의화단 운동에서 돌았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로는 사실 의화단 운동의 기틀이 되었던 무언가는 엄밀히 따지면 도교보다는 불교의 정토교에 더 가까웠다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당시 의화단 운동의 적대 대상이었던 서구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의화단 운동의 광신적인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건 서구인들 뿐 아니라 의화단 운동과 관련이 없는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영화인 황비홍(영화) 시리즈에서도 황비홍 일행이 외세에 맞서싸우는 무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이 긍정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외세보다도 더 악질적인 이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의 말로를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시각이 제기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의화단 운동 때문이다. 의화단 운동은 토착종교에[10] 광신적인 근간을 둔 중국 민간 세력이 거대 조직화 해서 외국인들에게 집단적인 테러를 가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서구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의화단 운동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의화단이 하던 행동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국적을 막론하고 의화단 외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을 줄 만한 행동이 많았다.
의화단 운동은 통상적으로는 서구인들의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이 팍 깨지고 중국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였다는 면에서 더 주목을 받지만, 한편으로는 의화단 단원들의 광신적인 행위들을 보고 서구인들로 하여금 "저들이 저렇게까지 광신적인 행위에 몸담게 하는 저 중국의 토착종교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것인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황화론과 도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역사학적인 시각이 제기되는 것이다.
단, 본인들이 도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억울한 시각일 수도 있다. 청말 당시 의화단 운동에서 돌았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현재까지의 성과로는 사실 의화단 운동의 기틀이 되었던 무언가는 엄밀히 따지면 도교보다는 불교의 정토교에 더 가까웠다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당시 의화단 운동의 적대 대상이었던 서구인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의화단 운동의 광신적인 행위들에 충격을 받은 건 서구인들 뿐 아니라 의화단 운동과 관련이 없는 중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영화인 황비홍(영화) 시리즈에서도 황비홍 일행이 외세에 맞서싸우는 무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이 긍정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외세보다도 더 악질적인 이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의 말로를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6. 관련 문서[편집]
-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 일본이 가장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했던 시기로,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했다.
- 혹성탈출 시리즈 - 원작 소설 한정해서 간접적으로 이와 연관되어있다. 작가의 일본군 포로수용소 생활 경험이 아이디어가 되었기 때문.
- 코로나 19 - 중국 정부가 앞으로 수십년을 내다보고 미국과 유럽의 다음세대 인적기반과 경제기반을 파괴시키기 위해 자국민을 수만명 희생시키더라도 황인종보다는 백인종의 유전자에 더 치명적으로 작용하도록 인위적으로 RNA가 조작된 생물학병기인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만들어 유출시켰다는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보다 미국, 유럽 국가들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전염과 치사율이 훨씬 더 높으며, 아시아 국가에서는 코로나 19에 감염된 소아들이 큰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으나 미국, 유럽에서는 코로나 19에 감염된 소아들에게 소아 다기관 염증 증후군이라는 괴질이 발생한 것이 생물학병기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다만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진영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더라도 중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북한, 러시아, 파키스탄, 이란 등의 기존의 우방국들까지 포기하면서 사실상 전세계를 상대로 생물학전을 선포했겠냐는 반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백신이나 방역 지침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서구 사회의 특성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무작정 코로나가 중국산 생물학병기라고 하기도 뭣하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중국이 코로나19의 가장 유력한 발병지로 의심되는데도, 오히려 이탈리아 대한민국 등 다른 국가에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가 계속되어 자초하는 점도 크다.
[1] 이 소개문을 쓴 티모시 양(Timothy Yang)은 현재는 오리건주의 퍼시픽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2] 19세기 당시와 심지어는 그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때까지도 볼가 강 유역에 독일계 러시아인이 실존했다.[3] 실제로 역사학계에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뤄놓은 것을 까먹기 바빴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런 평가를 유독 가혹히 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하버드대학교의 조지프 나이.[4]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5] 속어로 "쿨리(Coolie)"라고 칭하고 있다.[6] 심지어는 어린이용 학습동화의 저자로 유명한 닥터 수스(Dr. Seuss)까지 저런 포스터를 그리던 시절이다![7] 미국인들, 심지어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LA 폭동의 공식적인 시발점은 보통 로드니 킹 사건으로 본다. 적어도 현대사학계에서 LA 폭동의 시발점이 두순자 사건이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고 봐도 된다.[8] 보통 지정은제라고 한다. 청나라 중기에 청의 인구가 폭발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9] 동서양의 교역은 생각보다 매우 활발한 편이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중국에 가톨릭 교회와 이슬람 사원이 존재했고, 더 과거로 가면 기원전의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 너머의 제국"을 언급하는 등 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10] 도교는 동양적인 시각에서는 도가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완전히 "토착종교"로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시 서구인들의 시각으로는 토착종교의 정의에 완전히 부합했다. 애당초 서구에서 "Religion"이라는 용어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외의 종교에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4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Chinoiserie
프랑수아 부셰, "중국식 정원 (Le Jardin Chinois)" |
1. 개요[편집]
2. 유행[편집]
당시 유럽에 들이닥친 중국의 수많은 공예품(주로 도자기)과 그림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미술품들을 뜻한다. 자포네스크와 마찬가지로 동양에 대한 판타지, 즉 '오리엔탈리즘' 취향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짝퉁 중국 미술. 사실 소위 '동양풍'의 원조는 이 시누아즈리가 먼저다. 물론 기본적으로 서유럽을 문명적-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동아시아를 신비적-원시적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매우 많이 섞여있었다.
오늘날에는 자포네스크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시누아즈리가 유행하던 시절은 아직 왕정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교적 중산층에게도 널리 알려진 자포네스크와 달리 시누아즈리는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중국풍 가구·도자기·칠기·정원 건축 등에만 남았다.[1] 단 이후로도 박람회에서 중국관의 개설을 통해 시누아즈리의 유산은 계승되었다.
당시 중국 가구나 도자기는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한마디로 왕족이나 귀족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돈지랄이었다.
이런 거 사두고 다른 귀족들 불러 자랑하는 용도였단 이야기. 시누아즈리의 핵심에 있는 중국의 고가 도자기들은 이미 1세기 이전인
16세기 말부터 미친 듯이 긁어모아대었고, 1세기나 계속된 유행이다 보니 귀족들 사이에선 이를 모방하거나 변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근세에 시누아즈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가며 당시 대세를 이루던 고전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응이 미적지근해지면서 벌어진 일로서, 당대 유럽인들이 고전주의의 뚜렷한 형식미를 벗어나 자극적인 비장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중국 문화의 이국적 향취가 당대 유럽인들이 새로 찾아나서던 비장미를 구현하는 데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극성을 목표로 유행하기 시작한 서브컬쳐라서 그런지 당시에도 고전주의 특유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에겐 좋게만 여겨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전주의 쪽의 기록을 보면 특히 중국 도자기 특유의 청·백이 주를 이루는 색상 배합에 대해 맹렬히 비판을 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이 유행하여 시누아즈리 열풍이 한 풀 꺾이는 계기가 된다.[2] 실제로 중국풍이 혼재되어 있던 로코코 양식과 달리 19세기의 빅토리아 양식은 디자인 측면에서 중세 유럽으로 부분적 회귀를 하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 덕분에 굳이 미술 분야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로코코 양식과 빅토리아 양식의 차이는 굉장히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건축 구조상 로코코 양식에 비해 고딕 양식이 사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3] 19세기 당시의 유럽 각국이 결국 반동주의를 도입하고도 정작 혁명 이전의 로코코 양식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던 것 역시 당시의 가파른 도시화를 고려했을 때는 고딕 양식의 경제성이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가이기 때문인지 중국 도자기에다가 청동 등의 금속으로 장식적인 보호틀을 결합시켜서 전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유럽의 경매 등지에서 중국 도자기를 거래할 때 보호틀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가격이 높아진다고 한다.
한편, 아무래도 만주족 출신의 정복왕조라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 청나라에서도 유럽의 문명이 제법 관심을 끌었다. 서양의 천문학자들이 등용되어 본래의 한족 관료들을 몰아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고, 옹정제는 유럽식 가발을 쓰고 스타킹까지 신은 채 초상화를 남겼으며 건륭제는 유럽식 정원을 본딴 여름궁전을 짓기도 했다.[4] 강희제는 아예 유럽의 악기를 연주해보고 라틴어를 배워 라틴어 책을 읽기도 할 정도. 그러나 청나라에서 서양문화에 관심하는 정도는 귀족문화나 예술계의 유행이 아니라 몇몇 황제들이 심취했던 취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는 일이다.
왕가는 이슬람이지만 유럽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치고받고, 교류도 나누며 맥락을 함께 하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시누아즈리 열풍이 일었다. 오히려 유럽이 본격적으로 시누아즈리 열풍에 접어들기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는 중국산 도자기를 수입해와서유럽에도 팔아먹고 부유층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톱카프 궁전의 군주의 부엌(Matbah-ı Amire)은 현재에도 2만 점이 넘는 중국, 후기에는 일본 청화백자 컬랙션을 소장 중이다. 대체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인 16-18세기에 수입해온 명·청시대의 자기가 많은데, 심지어 오스만 제국 측에서 중국에 발주를 넣어 쿠란의
문구나 오스만 제국 특유의 문양들을 넣은 물건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고가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는 이즈닉과 퀴타햐의
도자기처럼 이를 모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특히 귀중한 도자기들은 금·은으로 보호 및 장식용 틀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깨진
도자기조차도 금이나 은으로 수리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자포네스크에 비해서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시누아즈리가 유행하던 시절은 아직 왕정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교적 중산층에게도 널리 알려진 자포네스크와 달리 시누아즈리는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중국풍 가구·도자기·칠기·정원 건축 등에만 남았다.[1] 단 이후로도 박람회에서 중국관의 개설을 통해 시누아즈리의 유산은 계승되었다.
당시 중국 가구나 도자기는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한마디로 왕족이나 귀족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근세에 시누아즈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가며 당시 대세를 이루던 고전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응이 미적지근해지면서 벌어진 일로서, 당대 유럽인들이 고전주의의 뚜렷한 형식미를 벗어나 자극적인 비장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중국 문화의 이국적 향취가 당대 유럽인들이 새로 찾아나서던 비장미를 구현하는 데에 안성맞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극성을 목표로 유행하기 시작한 서브컬쳐라서 그런지 당시에도 고전주의 특유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에겐 좋게만 여겨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전주의 쪽의 기록을 보면 특히 중국 도자기 특유의 청·백이 주를 이루는 색상 배합에 대해 맹렬히 비판을 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이 유행하여 시누아즈리 열풍이 한 풀 꺾이는 계기가 된다.[2] 실제로 중국풍이 혼재되어 있던 로코코 양식과 달리 19세기의 빅토리아 양식은 디자인 측면에서 중세 유럽으로 부분적 회귀를 하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변화 덕분에 굳이 미술 분야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로코코 양식과 빅토리아 양식의 차이는 굉장히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건축 구조상 로코코 양식에 비해 고딕 양식이 사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3] 19세기 당시의 유럽 각국이 결국 반동주의를 도입하고도 정작 혁명 이전의 로코코 양식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던 것 역시 당시의 가파른 도시화를 고려했을 때는 고딕 양식의 경제성이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가이기 때문인지 중국 도자기에다가 청동 등의 금속으로 장식적인 보호틀을 결합시켜서 전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유럽의 경매 등지에서 중국 도자기를 거래할 때 보호틀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가격이 높아진다고 한다.
한편, 아무래도 만주족 출신의 정복왕조라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 청나라에서도 유럽의 문명이 제법 관심을 끌었다. 서양의 천문학자들이 등용되어 본래의 한족 관료들을 몰아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고, 옹정제는 유럽식 가발을 쓰고 스타킹까지 신은 채 초상화를 남겼으며 건륭제는 유럽식 정원을 본딴 여름궁전을 짓기도 했다.[4] 강희제는 아예 유럽의 악기를 연주해보고 라틴어를 배워 라틴어 책을 읽기도 할 정도. 그러나 청나라에서 서양문화에 관심하는 정도는 귀족문화나 예술계의 유행이 아니라 몇몇 황제들이 심취했던 취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는 일이다.
왕가는 이슬람이지만 유럽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치고받고, 교류도 나누며 맥락을 함께 하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시누아즈리 열풍이 일었다. 오히려 유럽이 본격적으로 시누아즈리 열풍에 접어들기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는 중국산 도자기를 수입해와서
3. 기타[편집]
철냄비짱 때문에 시노와즈리(シノワズリ)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프랑스어의
간혹 '중국풍 취향' 그 자체가 아니라, 중국에 환상을 품은 서양인들을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
nwa]
를 일본어에서 '노와(ノワ)'라고 옮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누아'이다.[5][6]간혹 '중국풍 취향' 그 자체가 아니라, 중국에 환상을 품은 서양인들을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4. 관련 문서[편집]
[1] 프랑스 혁명 이후 기존의 왕족과 귀족들을 부르주아 계층이 대신하게 되었을 때는 새로 등장하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영향을 받았기에 자포네스크가 더 유행했다. 결정적으로 중국이 20세기에 들어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으로 자국 문화를 신나게 말아먹어 시누아즈리는 더욱 재조명되기 힘들어졌다.[2] "Chinoiserie (design)," 《Encyclopædia Britannica》. Edinburgh: Encyclopædia Britannica Incorporation, 2013[3] Toman, Rolf. 《Gothic: Architecture, Sculpture, Painting》. Potsdam: Ullmann Publishing, 2011[4] 이게 바로 자금성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던 원명원이다.[5] 한편 1996년 표기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프랑스어에서의 "oi
[
wa]
"가 "으와"였다.(마리 앙투아네트를 "마리 앙트와네트"로 표기했다) 이 예전 표기법을 적용하면 "시느와즈리"가 될 것이다. 현재는 "oi[
wa]
"를 "우아"로 적으므로 "시누아즈리"가 되는 것.[6] 단, 프랑스어 발음으론 '시놔즈히'정도 된다.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자포네스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포니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자포니즘이란 넓게 본다면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에 미친 일본 문화 전반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단어이며, 좁게 본다면 유럽의 도자기, 정원, 미술 등에 한정된 영향을 일컫는 말이다.
가장 주요한 뜻은 미술 용어로, 19세기 경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본의 판화에 영향을 받은 화풍을 뜻한다. 주로 인상주의자들이 자포니즘에 심취했다. 유럽으로 유입되었던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그 특유의 평면성과 과감한 구성, 과장된 표현 그리고 유럽인에게 낯선 풍경을 통해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미술가와 유행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미술 분야에서는 이러한 사조를 자포니즘(Japonisme/Japonism)이라 부른다. 인상주의 화가나 아르누보 계통의 화가들이 이에 속하며 서양 미술사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다만 같은 자포니즘 화가들이라 해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작이나 영향을 받은 화풍을 구축한 것뿐만 아니라 열렬한 일본 미술품의 수집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키요에가 저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신문지로 도자기를 포장하듯, 당시 일본의 도자기는 우키요에가 인쇄된 종이로 포장해서 수출되었다.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등 미술 분야 전반에서 자포니즘의 광범위한 영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 중에선 일본 미술작품 수집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유행(자포니즘) 속에서 일본풍으로 만들어진 서구 물건 스타일을 자포네스크라고 칭한다. Japon(일본)+esque(~식의). 게르만인들이 로마인들의 건축을 흉내낸 로마네스크와 마찬가지로 진짜 일본인들이 만든 그림이나 도자기가 아닌 일종의 모방작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키에몬 자기(右衛門 磁器)가 있는데 지금도 일본에서 이어져오고 있긴 하지만 유럽의 가키에몬 자기를 닮은 많은 도자기들은 실제 가키에몬 자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가장 주요한 뜻은 미술 용어로, 19세기 경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본의 판화에 영향을 받은 화풍을 뜻한다. 주로 인상주의자들이 자포니즘에 심취했다. 유럽으로 유입되었던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는 그 특유의 평면성과 과감한 구성, 과장된 표현 그리고 유럽인에게 낯선 풍경을 통해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미술가와 유행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미술 분야에서는 이러한 사조를 자포니즘(Japonisme/Japonism)이라 부른다. 인상주의 화가나 아르누보 계통의 화가들이 이에 속하며 서양 미술사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다만 같은 자포니즘 화가들이라 해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작이나 영향을 받은 화풍을 구축한 것뿐만 아니라 열렬한 일본 미술품의 수집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우키요에가 저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신문지로 도자기를 포장하듯, 당시 일본의 도자기는 우키요에가 인쇄된 종이로 포장해서 수출되었다.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 등 미술 분야 전반에서 자포니즘의 광범위한 영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 중에선 일본 미술작품 수집으로 유명했던 사람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유행(자포니즘) 속에서 일본풍으로 만들어진 서구 물건 스타일을 자포네스크라고 칭한다. Japon(일본)+esque(~식의). 게르만인들이 로마인들의 건축을 흉내낸 로마네스크와 마찬가지로 진짜 일본인들이 만든 그림이나 도자기가 아닌 일종의 모방작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키에몬 자기(右衛門 磁器)가 있는데 지금도 일본에서 이어져오고 있긴 하지만 유럽의 가키에몬 자기를 닮은 많은 도자기들은 실제 가키에몬 자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구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자포니즘은 큰 영향력이 없었다. 오히려 시누아즈리, 즉 중국풍 도자기, 칠기, 가구, 정원 건축물이(예를 들어 정자 같은 것) 귀족들에게는 더 인기였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로 자포니즘이 주류가 된 것.
자포니즘이 우키요에가 인쇄된 종이를 통해서만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 정부(메이지 유신 이후 내각)는 만국박람회 등지에서 일본관을 열어 적극적으로 일본 문화를 알리기도 했다. 일본의 이런 정부주도 자국 문화 홍보는 역사가 깊은데, 심지어 워싱턴 D.C.에는 벚꽃 가로수길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현재는 독일과 하와이에 있는 박물관에 관련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3. 유사 사례, 원류[편집]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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