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어떻게 국토의 65%를 나무로 덮었을까? 세계가 놀란 '산림녹화' 비하인드 스토리! (KBS 20130803 방송); 박정희가 전국토를 산림화했던 것은 자신의 왕국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좌파들도 등신들이고,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우파들도 등신들이다.

왜 그런고 하니, 좌파들은 경제분야에서 머리가 텅 비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둬가며 박정희의 업적 전체를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우파들은 박정희가 자행한 수많은 고문, 살인, 인권 유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영웅으로 신격화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병신들이다.

다만 병신의 서열을 매기자면, 좌파들이 조금 더 병신들이긴 하다.

 

박정희는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의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나라의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개판 오분 직전으로 말아먹었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왕국'을 정원의 화분 가꾸듯 정성스럽게 가꿨다. 

하여, 자신의 왕국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부족한 국가예산을 쏟아붓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전국토의 65%를 나무로 덮었던 것이다. 왕국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진보네, 좌파네, 민주당이네 하는 것들이 박정희의 이기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서 왜곡하는 것은 확실히 그들이 병신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병신같은 우파들은 '나라에 대한 사랑'과 '왕국에 대한 사랑'을 구분할 정도의 지능이 없다. 과연, 좌파와 우파 어느 쪽이 더 병신들인지는 다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양쪽 다 병신들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경제발전과 산림녹화를 동시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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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한반도에는 민둥산만 가득했다. 하여, 한국인의 상징인 백의와 붉은산. 2~3년 주기로 홍수가 나고, 흉년이 이어졌다. 국토 전체가 사막화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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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지역에 가면 산림철도가 있었다. 왜놈들이 철도를 놓고 울창한 나무를 다 베어서 동해안으로 실어 빼갔다.


일제는 마을주민들 강제동원 해 모든 소나무 벌채하고 뿌리마저 파헤쳤다. 뿌리에서 송탄유를 채취해서 군사용 유류로 공급하는 바람에 그렇게 파괴를 해놓고 복구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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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는 산림보호의 필요성을 알고 장려했지만 국가정책상 제대로 정책을 세우지는 못했다. 예산도 없어서 미국에서 식량, 구호양곡이 오면 사방사업할 때 밀가루를 한 바가지씩 줬다. 그 때는 마지못해 나무를 심했지 가꾸지는 않았다. 실패의 원인은 가난. 밀가루 얻기 위해 나무 심었지만, 곧 아궁이 속으로 사라졌다.

쇠고랑 각오하고 도벌했다.

현금화하기 가장 쉬운 게 나무와 솔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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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12년동안 산림법 못 만들었는데 박정희가 1961년 12월 27일 발표.

군사정권 사회 5대 악: 도벌, 밀수, 마약, 깡패, 사이비 기자

 

현신규: 산림이 황폐한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를 못봤다; 추위에도 잘 자라는데다 훌륭한 목재를 생산하는 리기테다 소나무를 육종함.

 

현신규가 개발한 일리노이와 미시간 주의 탄광지를 녹화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 상원 원조 삭감감이 부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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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도 그린벨트 제도 만듦. 영국, 캐나다 정도만 했던 것. 

 

고건: 어떤 전문대 교수의 도움 덕택에 심줄 박기 실행. 사방산지의 물길을 잡아주는 아주 가느다란 철근이 들어간 콘크리트 수로로.

 

사방사업은 황폐지, 붕괴지, 붕괴 우려지에 지반안정사업을 시행하고 식생을 조성하여 집중호우 시 토석류의 유출을 막고 산사태를 예방하여 산림을 보호하고 산지 주변의 가옥과 농경지 피해를 예방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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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농무부에서 산림산업을 전국 각지에 지부가 있던 내무부 관할로 옮김.

3억이 넘는 나무들이 심어졌다.

한국이 1200만톤의 석탄을 생산할 수 있게되자, 나무없이 석탄으로 연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연탄보급을 표준화하고 아궁이, 구들을 석탄에 알맞게끔 주택개량사업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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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임목육종학자. 본관은 연주(延州)[3], 호는 향산(香山).

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리며, 대표적 업적은 리기테다소나무와 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의 육종을 통해 산림녹화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 육종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것이다.

2. 생애[편집]

음력 1911년 12월 9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당시 안주군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 현도철(玄道澈, 1869. 9. 22 ~ ?)[4]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응선(金應善)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현도철은 평양 지역의 유학자[5]로,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종9품 숭령전 참봉,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평양군 향장(鄕長), 1906년부터 1908년까지 평양군 주사(主事),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안주군 서기를 역임했다.# 한편, 일제 말 애국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07년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 평양군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서우학회에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1909년에는 서북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지역 유지로 있다가 1927년 11월 안주금융조합 정상화를 위한 전형위원(銓衡委員)에 선임되었다.#

그는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맏형 현인규(玄仁圭)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보 시절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6]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7]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8]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1933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技手)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이곳에 근무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하다가 1945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 케이치(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1949년 7월 한국인 최초의 임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 제5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공로상을 수여받았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제2대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에는 5.16 민족상 학예부 본상을 수여받았다.#

1986년 11월 21일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9] 자택에서 별세했다.#

3. 연구[편집]

3.1. 포플러 개량[편집]

포플러는 빨리 자라 헐벗은 산야를 녹화하는데 적합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태리포플러를 도입하여 한국의 기후 풍토에 맞는 품종을 찾아 전국에 보급하였다.

3.2. 리기테다소나무[편집]

미국 원산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새로운 잡종인 리기테다소나무를 만들어 1962년 미국 학회지에 소개되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생장속도가 느리고 가지가 구불구불하며 송진이 많고 재질이 좋지 않았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빨랐으나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랐다. 이 잡종소나무는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빨리 자라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도 강했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산림국이 이 품종을 미 북부 탄광지역에 심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특히 1962년 미국이 對한국 원조를 삭감하려 하자 리기테다소나무가 대한 원조의 대표적인 성과로 제시되어 삭감안을 부결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개화 시기가 달라 자연적인 잡종 교배가 불가능하여[10], 일일이 수작업으로 교잡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종자 생산 효율이 좋지 않아 녹화사업 당시에도 많이 식재되지 못하였다.[11] 산림녹화가 완료된 현재는 힘들게 리기테다소나무의 종자를 생산할 이유가 없으므로 추가로 심고 있지 않고 있다.

3.3. 은수원사시나무[편집]

유럽 원산의 은백양과 한국 원산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은사시나무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평지 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잘 자라 1973년 치산녹화10개년계획에 따라 전국에 대량으로 심어졌으며, 1979년 박정희대통령의 권유로 육종을 한 현신규 박사의 성을 붙여 현사시나무라고도 명명하였다. 국내 뿐만 아니라 포퓰러나무의 나무녹병으로 골머리를 앓던 뉴질랜드에서도 1976년부터 이 나무를 대거 수입해 전국적으로 심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나무를 수원사시나무의 서식지였던 수원 여기산의 이름을 따 'Yeogi'라고 부른다.

4. 가족[편집]

5. 평가[편집]

흔히 리기테다 소나무의 육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 외에도 1호 임학박사로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신품종의 육종, 종자의 채취 보관, 정책 수립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과학 명예의 전당과 임업 명예의 전당에 모두 올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1] 양력 1912년 1월 27일.[2] 박사학위논문 : クエルクス属及びカスタニア属樹木の血清学的類縁関係 (1949)[3] 좌승선공파 25세 규(圭) 항렬.[4] 이명 현도철(玄道轍, 玄道徹).[5] 평안남도 평양부 융흥면에 거주했다.#[6]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구제고등학교 참조.[7]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는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8]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9] 1988년 장안구, 2003년 팔달구에 편입되었다.[10] 작은 관목도 아니고, 키가 큰 소나무 상층부에 있는 수꽃과 암꽃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수분시켜야 한다.[11] 약 6000만 본이 식재되었는데, 많은 양처럼 보이지만 1차, 2차 치산녹화 사업 통틀어 약 50~60억 그루의 묘목이 식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다.[12] 수안 이씨(遂安 李氏) 이시우(李時雨)의 딸이다.[13] 족보명 현정형(玄正馨).  https://economy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4/2009110400057.html 

돌이켜보면 우리 곁에 숲이 있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시골에서 자란 삼사십 대들은 반질반질하던 산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연료를 나무 등 자연적으로 채취한 땔감에 의지했기 때문에 산에 잔가지 하나 남아나는 게 없었다. 어른들은 겨울이 오면 온종일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그 전에는 아예 벌거숭이 산이었다. 6?5전쟁을 거치면서 숲은 황폐화됐다. 그 황량한 숲에서 사람들은 나무를 얻기 위해 경주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나무를 심는 일에 온힘을 기울인 사람이 있었다. 춘원 임종국(1915∼1987). 그의 이름 석 자 앞에는 ‘산림왕’이란 별칭이 붙는다. 그가 평생에 걸쳐 나무를 심은 전남 장성 축령산은 지금 ‘미래의 숲’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림청은 이 숲을 ‘22세기 후손에게 물려줄 숲’으로 지정했다. 2000년에 열린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도 우수상을 받았다.  

춘원은 이름부터가 숲과 연관이 있다. 춘원의 이름을 한자로 쓰면 ‘林種國’이다. 숲(林)과 씨(種)와 나라(國)가 이름 석 자에 모두 들어 있다. 좋은 뜻으로 풀어보면 ‘나라를 위한 숲의 씨앗’이다. 그는 그 이름대로 숲을 위해 살다갔다.

춘원이 최초로 조림사업을 시작한 때는 1955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불과 두 해 뒤다. 당시 춘원은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일제 때 조림한 장성군 덕진리의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보면서 숲의 가치를 깨달았다. 모든 산이 헐벗어 있는데 반해, 이 숲은 한겨울에도 푸른 기운을 사방에 떨치고 있었다. 춘원은 그때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춘원은 그해 1헥타르에 삼나무와 편백나무 5000본을 시험적으로 심었다. 나무들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자신감을 얻은 춘원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춘원이 1956년부터 20여 년 동안 심은 나무는 모두 253만 주에 달했다. 면적은 569헥타르나 됐다. 여의도보다 두 배 가까이 넓은 규모다.

그러나 나무를 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춘원은 조림사업에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양잠을 통해 번 돈은 물론 집과 논밭을 판 돈도 조림사업에 바쳤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져가며 나무 심기를 계속했다. 그에게 나무는 자식만큼 귀한 존재였다.

조림사업에 대한 춘원의 집념 가운데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가뭄으로 죽어가는 나무를 살리겠다고 물지게로 물을 퍼 올린 일이다. 1968년과 1969년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논농사는 물론 밭농사도 망칠 지경이었다. 산에 심어 놓은 나무도 가뭄에 목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해에 심은 것은 물론, 전년에 심은 것도 말라죽어갔다. 춘원은 애가 탔다.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물지게였다. 물지게로 물을 퍼 날라 고사 직전에 빠진 나무에게 물을 주는 것이었다.

춘원의 행동을 마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농작물도 살리기 힘든 판에 험한 산까지 물을 져 올리는 것은 우매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원은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도 물지게를 들고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이 동요했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춘원에게 감동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주민들도 물지게를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나무들을 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축령산의 숲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일생일대의 사업으로 나무를 심었던 춘원은 1987년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가 타계한 후 한때 축령산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벌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산림청이 춘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숲을 매입하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그 후 전북 순창군 선영에 안치됐던 춘원은 다시 축령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축령산 중턱 편백나무 숲 한가운데 느티나무 밑에 수목장 됐다. 산림청은 춘원의 공을 기려 그를 ‘숲의 명예전당’에 모셨다. 

축령산휴양림으로 가는 길은 금곡영화마을에서 시작된다. 이 마을은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 드라마 <왕초> 등의 촬영지다. 지금도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초가집이 많은 금곡마을은 40~50년 전 시골마을의 전형을 보여 준다.

 마을 앞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초가집 가운데 몇몇은 영화의 세트장을 지금껏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다. 오순도순 살아가는 20여 가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느낌이다. 과거 우리네 고향도 이 마을처럼 생활과 정서가 일치되어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축령산휴양림으로 가는 길은 마을 끝 초가로 지붕을 만든 우물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편백나무와 측백나무가 싱싱한 자태를 뽐내는 휴양림으로 간다. 초입은 특별할 게 없다. 길도 시멘트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고갯마루에 닿을 때까지는 확실하게 마음을 휘어잡는 숲이 없다. 오히려 활엽수림이 더 큰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그러나 갈지(之) 자를 그리는 길을 따라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축령산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곳에서 숲속의 교실까지는 아름드리 편백나무들이 사열하듯이 서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쭉쭉 뻗어 있는 편백나무와 삼나무의 위용은 대단하다. 한세상 살려면 이처럼 올곧아야 한다는 것을 시위라도 하듯이 수직으로 솟아 있다. 이 숲은 사시사철 푸르다. 숲이 워낙 우거져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돌아보는 길은 곧게 뻗은 적이 없다. 부드럽게 휘어져 돌며 곡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다. 숲속의 교실로 가는 길에는 나무에 홈을 파 물을 흘려보내는 샘이 있다. 임도를 거슬러 오느라 타들어간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고개를 넘느라 흘린 땀을 씻고 다리쉼을 하다보면 축령산의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아니, 이 숲을 만든 춘원이 선사하는 고마운 공기다.

숲에 들면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진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 때문이다. 피톤치드는 나무들이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기 중에 발산하는 물질을 말한다. 피톤치드는 해충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이보다 이로운 게 없다. 피톤치드는 인간에게 항균과 진정효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

피톤치드만 놓고 따진다면 축령산의 숲은 다른 숲에 비해 아주 특별하다. 이는 수종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는 피톤치드를 발산한다. 하지만 양은 차이가 있다. 침엽수가 활엽수보다 두 배 이상 많이 발산한다. 침엽수 중에서도 편백나무가 가장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는다. 전국의 삼림욕장 중 축령산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다.  

샘터 곁에 ‘삼림욕장 1㎞, 조림 기념비 1.2㎞’라 적힌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300m쯤 가면 왼편에 숲속의 교실이 보인다. 이곳은 쉼터로 꾸며졌다. 작은 연못이 있고, 벤치도 있다.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물드는 활엽수림도 있다. 이곳에서 1㎞ 더 가면 이 숲을 가꾼 춘원 임종국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러나 숲의 운치는 고개에서 숲속의 교실까지가 최고다. 금곡마을에서 숲속의 쉼터까지는 3.2㎞. 어른 걸음으로 1시간쯤 걸린다.

하산은 다시 금곡마을로 잡는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도 되고, 우회로를 이용해도 된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 고개를 넘어가면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왔던 길을 따라 금곡마을로 되돌아간다. 오른쪽 길은 금곡마을로 드는 길 초입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길로 가도 시간은 얼추 비슷하다. 편한 내리막길이라 취향대로 선택하면 된다.

단,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고갯마루를 넘기 전에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제는 ‘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축령산을 보면서 숲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던 거룩한 이를 떠올려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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