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의 역사: 구덴베르크의 인쇄혁명이 마녀사냥을 촉발시켰다; 마녀사냥을 시작한 것도 종식시킨 것도 근대화 (과학과 기술) (feat. 한 남자의 질투에서 시작된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마녀 잡는 망치>)
구덴베르크의 인쇄혁명이 한편으로는 마녀사냥을 촉발; 마녀사냥을 시작한 것도 종식시킨 것도 근대화 (과학과 기술).
마녀사냥이 가장 유행했던 것이 계몽주의가 시작되는 17세기.
마찬가지로, 60년대 히피족/뉴에이지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은 과학을 경멸하지만, 과학기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도구 자체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그 인간이 문제일 뿐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85%80_%EC%9E%A1%EB%8A%94_%EB%A7%9D%EC%B9%98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원 제목을 줄인 말로, 원 제목은 MALLEUS MALEFICARUM, Maleficas, & earum hæresim, ut phramea potentissima conterens이다. 번역하자면 "모든 마녀와 이단 행위를 강력한 창처럼 심판하는 망치" 정도. 줄인 말인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 정도의 의미이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오랫동안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도미니코회의 두 수도자인 독일 쾰른 대학교 학장 야콥 슈프렝거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교 신학교수이자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 종교재판관인 하인리히(인스티토리스) 크레머가 작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
이
저자들은 정신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심각하게 분별력이 없는 광신도들이었다. 책 내용에 일관성이 굉장히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다 또
분량은 많아서,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글 여기저기 모순이 난무한다. 이 책의 추천사도 문제가 많았는데, 1장은 4명의
공증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교수의 추천사와 서명을 받았으나, 그 뒷장들은 공증인 없이 추천사와 서명을 받았다. 때문에 1장외에
추천사를 넣은 교수들은 "추천이 날조된 것"이라 주장했고, 1장을 추천한 교수들도 "내용을 대충 보고 추천했다"고 고백했으며, 한
교수는 "추천사를 쓴 것을 철회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신자들을 고발하고 사형을
주장해서 물의를 일으켰다.[2]
그러나 과학과 지성의 발달, 교회와 사회에 대한 불만, 전쟁, 질병 등으로 종교의 권위가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3]는 <지고의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Summis Desiderantes>라는 대칙서를 발행했는데, 특히 가톨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독일 지역에 주술이 퍼져 있음을 개탄하고, 자칭 마녀 전문가였던 슈프렝거와 크레머에게 이를 색출할 권한을 주었다.[4] 교회가 권위를 되찾겠답시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성직자들에게 칼을 쥐어준 셈.
이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작성된 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제목처럼 마녀 색출과 근절 방법이 담겨 있으며, 18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물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마녀를 잡는 게
아니라 마녀로 누명을 씌우기 위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당시 유럽의 마녀 관련 민담과 신앙을 집대성하고 구약성경 탈출기 22장 17절의 "너희는 주술쟁이 여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을 실행하기 위한 책으로서 3부로 나뉜다. 마녀와 주술사를 색출하기 위한 방법을 써놓은 책이라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전혀 상관
없는 미신적 수법들을 사용하는데 한 예로 많이들 묘사되는 유명한 '물에 빠뜨려서 마녀를 확인하는 방법'은 무려 함무라비 법전에 나와있는 방법으로 성경보다 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미신인데, 성경에 나와있다고 마녀를 처단한다는 사람들이 이교도의 방식을 사용한 셈이다.
첫 부분에서는 마술 혹은 주술이 실제로 존재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사탄의 유혹에 굴하기 쉽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 한다. 둘째 부분은 마술의 형태[5]를 설명하고, 셋째 부분은 마녀의 식별과 재판, 형벌의 상세한 '지침'을 제공한다.
여성만 희생당했다는 오해가 많지만, 남성들도 많이 피해자가 됐으며, 경건하고 인망이 높았던 사람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사실 마녀재판에 오른 남자도 사탄의 제자라고 부르며, 마녀 못지않게 많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어인 마녀(魔女) 대신 주술쟁이라는 표현이 더 옳다. 당시 마녀사냥 광풍이 얼마나 심했냐면, 가톨릭에 반기를 들었던 개신교조차도 마녀사냥을 옹호하면서 이 책을 참고했을 정도인데, 자세한 것은 마녀사냥 항목 참조.
인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악의적 소문이다. 성직자나 재판관이 만지는 물건이라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만든 사람은 바로 파문 후 화형이다. 이단이나 이교도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해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 미국에서 라틴어-영어 대역판을 발행한 적이 있다. 물론 마녀재판을 다시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학술용으로 연구하기 위한 것이다. 영문 번역판이 인터넷에 공개되었으니 관심이 있으면 이 곳에 들어가 보자. 다만 고어투의 번역체라서 비영어권 독자들이 읽기는 쉽지 않다.
맨 위에도 나와있지만, 한국어 번역판이 있다(!) 특이하게도 이 번역판의 번역가인 이재필은 라틴어나 영어가 아닌 러시아어 전문 번역가이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면 러시아어 역본에서 중역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2. 시기별 마녀사냥[편집]
흔히 마녀사냥은 중세시대에 가장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하게 벌어진 시대는 근세로서, 대표적으로 30년전쟁 기간 독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마녀사냥이 벌어진 주요 원인이 종교개혁(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 포함)으로 교파화 사회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자세한 원인은 후술.) 그리고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결국 근세에 정점을 찍은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6]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76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종교개혁」, Peter Marshall[7]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에 대한 박해와 화형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격려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편에서도 상상된 악마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능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August Franzen & Remigius Bäumer 씀 최석우 옮김, "세계 교회사" 368쪽
16세기부터 마녀사냥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권에서는 남독일, 개신교권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8] 가장 심했다. 또한 프랑슈콩테에서도 마녀사냥이 많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개신교 지역에서도 남독일보다는 덜 하지만 마녀사냥 풍속이 남아있었고[9] 청교도들이 이주한 북아메리카에서도 한때 마녀사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신교 중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정착한 잉글랜드와 루터주의가 자리잡은 북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고,[10] 가톨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다.[11]
2.2.1. 마녀사냥의 경제[편집]
사실 이것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마녀사업이었다.
즉 종교의 이름을 팔아 부정한 재산 축적과 정적 제거, 당시 사회에 퍼져있던 다양한 재앙들로 인한 피지배층 불만 다른 곳으로
돌리기, 공포조장을 통한 사회통제강화, 개인적인 원한이나 경쟁자 제거 등을 합법화한 사업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로 보고 있다.
마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마녀라고 자백만 하면 규정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영주·주교·이단심문관 등이 배분하였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모든 비용도 수감자와 그 집안의 부담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마녀를 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녀 감별사들이 돌아다녔다.
마녀 혐의자를 체포하고 마녀재판에 회부한 뒤 재판을 통해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얻어낸 후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마녀 용의자가 사망하면 최후에는 전재산 몰수형에 처한다.
결국 애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서 돈 뜯어내려고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마녀사업인 것이다. 당연히 주 타겟은 부잣집 과부였다. 가족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엄청나게 많은 돈밖에 없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12] 다른 경우로는 의사와 성직자가 라이벌 관계였던 산파나 혹은 약초 관련 지식을 알고 있던 자들을 제거하여 수입을 늘리고자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13]
바늘로 찌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자 가운데는 '찌르면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서[14] 많은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마녀사냥은 사람들의 오락물이었다. 인권 의식이 없던 당시에는 공개고문과 공개처형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고 고대 로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을 환호한 로마처럼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과 잔인한 처형을
낄낄거리면서 즐기고 환호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15] 당시의 인권은 집행인이 미숙하게 목을 자르거나 죽이면 밑의 시민들이 쌍욕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이 당연했다.
2.2.2. 마녀사냥의 또 다른 실체[편집]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걸 종교적 광기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종교가 대표되어 벌어진 사건인데 종교만 기억에 남는 십자군 전쟁과 비슷한 사건이다. 또한 현재의 생각과 같이 굉장히 무식하고 줏대 없이 시행했을 것 같지만 이러한 예상과 달리 당시 지식인인 종교인과 정치가, 행정가, 판사들이 뭉쳐서 굉장히 체계적이게 일을 처리했다.원인으로 지목할 것이 많아 무엇이 정확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다.[16] 또한 지역이 방대하다 보니 원인들 중에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것과 안되는 것도 나뉜다. 먼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대기근과 흑사병 문제이다. 당시 16세기에서 17세기 소빙기[17]였다는 점(17세기 위기론), 그로 인한 대기근,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와 식량 사정악화 , 그 전부터 맹위를 떨치던 흑사병과 가축들의 전염병,[18] 개신교 등장으로 인한 다양한 종파등장과 사회적 불안, 개신교 등장과 30년 전쟁 이후 약해지기 시작한 교황의 세속 권력, 지방권력의 약화 시작[19], 30년 전쟁(1618∼1648)과 가톨릭 국가들의 패배와 가톨릭으로부터 해방된 개신교 국가들, 각종 반란이 당시에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흔히 학계에서 '교파화( confessionalizaion)'라고 부르는 용어를 유의해야 한다.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은 최종적으로는 사회의 세속화라는(당사자들마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왔으나, 당사자들이 개혁하고자 한 것은 개개인의 신앙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앙이었다. 이 시기의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은 대체로 세속권력에 호의적이였으며[20] 군주들은 자신의 왕국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군주이든 교황이든 점점 더 '중앙집권화된' 교회조직을 원했다. 가톨릭은 근대적 의미의 신학교를 통해 성직자 양성시스템을 혁신했고, 이들은 마치 근대국가의 '사관학교'처럼 국가를 중앙집권화시켰다.[21] 개신교에서도 '애국자'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며, 칼뱅주의자들이 극찬하던 도시국가인 제네바 역시도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국가란 결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따로따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사회 전체였다. 다양한 종파의 등장으로 인한 기본질서의 혼란, 계속된 사회 혼란(기근, 흑사병, 전쟁, 흑사병으로 인한 장원의 약화) 등등 사회는 각 부분에서 혼란이었고 그 혼란을 직격으로 맞는 것은 대중들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버티려고 노력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분노는 한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각 사회의 수장들 역시 이 사회의 혼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쇄신하기 위하여 불순분자들을 걸러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보에 오른 것은 오랜 종교적 전통상 '악마'였지만(그 실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도 아니었으니 이에 대한 처벌을 할 수가 없었다. 즉 군중들이 '사회 쇄신'의 거름으로 삼고 박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친숙하고, 물리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더 실체가 명확한 마법사와 마녀였다. 마법사와 마녀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마녀사냥으로 마녀와 마법사를 죽여 혼란의 원인을 차단했으니 우린 이제 안전하다는 안정감과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고 그 원인들이 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해결과정에서 각 계층은 순수하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손익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대한 원인과 호소의 대상이 필요하였고, 각 종파는 혼란스러운 사회 현상 속에서 쇄신된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국가는 이 신앙들을 바탕으로 지방권력을 누르고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왕의 입지를 강화해보고자 하였고,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고, 결정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바로 냉전시대의 환경일 것이다. 실제로 냉전시대이든 종교개혁 시대이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경건한', 혹은 '애국적인' 모두를 위한 행동을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혼란스러움과 상황통제의 어려움이 오히려 병폐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재판 과정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마녀재판이 너무 심해지면서 도리어 지역 공동체가 극도로 분열, 나중에는 마녀재판 그 자체가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세일럼 마녀 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정도쯤 되면 이단심판관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하여 각 나라들은 사법개혁을 통해 마녀사냥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끝내 마녀사냥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게 된다.
2.2.3. 마녀사냥의 희생자들[편집]
고위인사도
드물게 기소되었지만 피고인의 대다수는 유럽 사회의 하층 계층이었다. 주요 타깃은 지위가 낮은 여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보다
우둔하고 변덕스러우며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성차별적 사회풍조도 한 몫을 했다.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지역은
희생자의 80%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사탄의 제자 혹은 하수인, 마귀 등으로 불리며 희생된 경우도 적잖게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피고인의 92%가 남성이었고, 에스토니아에서는 60%, 모스크바에서는 피고인의 3분의 2가 남성이었다. 그러므로 번역어인 마녀(魔女)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어떤 책에서는 여성 마녀, 남성 마귀로 번역하였다.
일단 명목은 마녀사냥이지만 실제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주로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이나, 종교에서 아무런 득을 입지 못하고 민간 신앙에 기댔을 뿐인 못 먹고 못 살던 하층민들이었다. 심지어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의 모친도 마녀로 몰렸다.[22]
특히 재산이 많은 과부들이 타겟이 되기도 하였는데, 가족과 남편이 없으니 '악마와 간통했다' 는 식으로 덮어씌우기 편했던 데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일법상 마녀재판으로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마녀로 누군가를 지목한 사람의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마녀의 재산을 가지지 못하게 했더니 신고율이 급감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과부는 어떻게 뜻대로 해보려다 거절당해 앙심을 품은 남성들이나 질투한 여성들이 신고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산파나 민간요법에 통달한 자들도 주술을 부린다는 명목으로 희생되었다. 의사들이 이들을 경쟁자로 여겨 고의로
고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평소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자를 제거하기 위해 살인사건이나 질병의 원인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일수록 마녀로 몰려 죽는 경향이 심했다. 젊은 가임기 여성은 인구 수, 즉 세수를 늘리기 위해 필요했으므로 무죄방면한
사례가 있다. 소위 마녀라 하면 떠올리는 '심술궂게 생긴 노파'의 이미지를 여기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한편 어머니가 마녀인 경우 아이들까지 악마의 자식으로 몰려 함께 처형당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어린아이도 마녀라면 죽여야 하며, 나이를 감안해 목 졸라 죽인 후[23] 불에 태우라는 내용이 있다.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등 성소수자들도 함께 몰이당해 처형되기도 했는데, 보통 마녀사냥에서의 화형은 잘 알려진대로 희생자를 장작 위에 새운 말뚝에다가 묶고 불로 태우는 방법인데 반해, 동성애자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해 말뚝에 묶이는 것도 아깝다고 여겨 다른 장작들과 같이 묶어서 그냥 불에 던져졌다고 한다. 영어 욕설 중 남자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로 "Faggot"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묶어놓은 장작 더미를 일컫는 말이었다가 게이를 향한 욕설로 쓰이게 된 것은 여기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이 있다.
개신교도들
또한 마녀사냥의 피해자이다. 당시, 마녀사냥은 마녀로 지목된 여성들 뿐 아닌 이단자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도들은 이단자로 취급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개신교도들도 마녀사냥을 하여 무고한 피해자를 양성하였다.
이
마녀사냥으로 인해 기독교 전파 이전의 토착 민속 신앙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버리고 일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전승해 오던 전통 약초학도 일부 기록만 남긴 채 사실상 소멸했다. 실제로 현대 의사들과 약사들은 이 사실을 많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3.1. 지역별 마녀사냥[편집]
마녀사냥이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글로벌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마녀사냥이 단순히 유럽에서만 일어난 종교적, 역사적인 이벤트이기보다는 인간의 집단 폭력성을 배출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29]
유럽사에서의 마녀재판은 지역마다 워낙 양상이 다양해서 연구자들이 머리칼을 쥐어뜯는 주제 중 하나다.
- 독일은 마녀사냥이 가장 심한 곳이었는데 그마저도 지역마다 서로 대단히 달랐다.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 강하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가끔 어떤 재판은 10년이 넘게 계속 됐으며, 혐의자가 석방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심문받고, 다시 훈방 조치되고를 반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녀사냥은 도시처럼 번화한 곳보다 시골에서 더 잔인하게 시행된 경우가 많았다. 도시에서는 고문을 하더라도 법대로 하라고 따질 사람이 많지만 시골에서는 법에서 정한 제한 따위 다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서 그렇다. 또한 마녀라고 해서 여자만 잡은 게 아니었다. 기회만 되면 마녀라고 몰아갈 수 있을 만한 독거 노인을 몰아서 잡았는데 그 중에는 남자도 상당했다고 한다. 물론 전체적인 비중으로 따지면 여성 희생자가 더 많지만 모스크바의 경우 희생자의 70% 이상이 남성이였다.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의 10년 동안에 2살 난 어린이를 포함하여 1,000여 명이 처형된 데 비해, 영국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마녀사냥은 적은 편이었으며 처형당한 숫자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 뿐 실제로는 마녀로 고발되어도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독일과는 반대로 마녀를 처형하는 것이 죽인 마녀에게서 압수한 것보다 돈이 더 드는 데다가 마녀사냥이 미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독일 등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은 마녀를 사형에 처할 때 때 화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만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불로 태웠다.
- 개신교 국가에서도 마녀사냥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마녀가 종교적·사회적으로 위험시되지 않게 된 18세기에 와서는 박해가 격감하여 병리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이주한 미국에서는 꽤 근대까지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일럼 재판으로 이때 이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유명한 작가 너새니얼 호손[30]의 조상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호손은 자기 성을 'Hathorne' 에서 'Hawthorne' 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세일럼 재판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완전 무죄는 거의 2000년대에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아서 밀러가 이 사건을 걸작 희곡 크루서블로 남겼고 영화화도 되었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풍자했는지는 상상 가능한 일이다.
- 파푸아뉴기니에서도 마녀 사냥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병사한 사람이 나오면 고문을 하고 화형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 경찰도 마녀 사냥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크게 터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1. 개요[편집]
2. 전개[편집]
※ 세일럼 재판 당시 영국과 식민지 지역은 율리우스력을 사용했으므로, 관련자료들도 전부 율리우스력 날짜를 따른다.
발단은 1692년 1월 20일, 매사추세츠의 청교도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딸 베티 패리스(Betty Parris)와 조카 애비게일 윌리엄스(Abigail Williams)가 발작과 이상 행동을 보이면서부터다. 두 소녀의 치료를 하던 의사 윌리엄 그릭스는 증상이 낫지 않자 2월 중순쯤 "이들이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란 진단을 내렸다.[3][4] 이들은 환자들을 저주하고 있는 마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호밀가루와 두 소녀의 소변으로 반죽한 '마녀의 빵'을 개에게 먹이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의 추궁에 두 소녀는 남아메리카계 노예 출신 하녀인 티투바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두 소녀는 이후 패리스 목사에게 구걸하러 온 세라 굿과 1년이 넘도록 교회에 나가지 않는 병든 노파 세라 오즈번을 더 지목했고, 사람들은 이 세 명을 고발한다. 결국 수 일간의 '조사' 끝에 티투바가 자신이 그 둘을 저주했으며 나머지 두 명이 공범이라고 진술한다.
이후 두 소녀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늘었고, 애비게일 윌리엄스를 포함한 소녀들이 여러 사람을 마녀로 지목하면서 몇 개월간 마녀 재판이 진행되었다.
특히 이 광기어린 재판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코튼 매더 목사였다. 당시 뉴잉글랜드 일대 식민지 청교도 도시들은 목사가 지배하는 신정 왕국들이 할거하는 곳에 가까웠고, 그중에서도 코튼 매더는 '매더 왕조'로까지 불리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인 가문 출신이었다. 사실 코튼 매더는 개인적으로는 과학에 지대한 흥미를 가진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종두법을 도입해 자신의 아들에게 직접 접종할 정도로 깨어있는 사람이었으며, 이른바 허깨비 증거가 재판에 도입되는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목사 왕조들은 문명이 종교에서 멀어져 타락해간다고 여겼으며, 그 역시 이 재판을 일종의 명분으로 삼아서 민중의 신앙심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특히 버로스 목사가 처형당할 때 찝찝해 하던 사람들에게 '버로스는 안수받지 않았고 악마는 천사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근거 없는 선동을 하여 끝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이후 재판의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신정 체제의 파멸에 결정타를 먹이고 말았다.
마녀재판이 일어나자 세일럼의 유력 가문들은 정적을 해치우는 데 이를 이용하기도 했다. 유력가 중 하나인 퍼트넘 가[5]의 앤 퍼트넘은 딸인 앤 퍼트넘 주니어와 다른 마을 소녀들[6]과 함께 법정에서 마치 마녀의 저주라도 받은 듯한 연기를 해서 남편의 정적을 처리하려 했다. 이 연기가 얼마나 요란했는지 다른 도시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나중에 일이 잦아들고 나서 1706년까지 마을에 남아있던 앤 퍼트넘 주니어는 이때의 행동에 대해 공개사과하는 처지가 된다. 당시 자신이 사탄에게 홀린 상태였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진심으로 참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 당시에 무고한 사람들을 고발하면서 발작까지 했던 출중한 연기력을 보았을 때, 진심으로 뉘우친 게 아니라 훗날 여론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기한테 벌어질 공격을 모면하기 위해 가식적으로 눈물을 연기하면서 벌인 쇼일 가능성도 있다. 앤 퍼트넘 주니어는 부모가 사망한 후 남은 형제자매들을 세일럼에서 계속 부양해야 했기에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의심스럽다. 애비게일 윌리엄스는 일찍 죽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당사자들은 사건 이후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 결혼도 하고 천수를 누렸다.
결국 여자 13명, 남자 6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남자 한 명은 압살당했다.[7] 주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온 도시가 불안에 떨었지만 세일럼 내부에서는 도저히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고, 견디다 못한 세일럼 주민 일부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1692년 10월, 마침내 매사추세츠 총독 윌리엄 핍스(William Phips) 경[8]이 허깨비를 증거로 채택함을 금지하고 곧 세일럼의 마녀 재판 법정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 재판을 불법으로 선언한다. 덤으로 이전에 재판으로 죽은 사람들도 사면받았다.3. 영향[편집]
유럽의 마녀사냥 전성기와 비교하면 매우 뒤늦은 시기로, 본토인 유럽에서마저도 그런 것이 없던 시기에 터진 만큼 후폭풍도 컸다. 이 사건은 마을 전체를 광풍으로 휘몰았기 때문에 재판이라는 행정적 절차보다는 세일럼이라는 마을 공동체 전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 당시 사정을 다룬 논문이나 책이 많지는 않으나 꾸준히 나온다. 미국의 초창기 이주민 주류였던 청교도들이 본토 유럽의 기독교인들보다도 더 열렬한 신자였다는 점. 영국과의 전쟁, 원주민들과의 대립, 전염병, 그로 인한 농사의 흉작. 또한 기존에 땅을 개척했던 개척민들과 뒤이어 새로 이주한 개척민들과의 갈등 등이 유럽에선 이미 한물 간 마녀사냥 열풍이 늦게서 불어닥친 원인으로 지목된다. 실상 19~20세기 초엽에도 미국은 기독교 문화와 청교도 금욕주의가 유럽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였다. 여담으로 지금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보수적인 면이 많지만 이는 세속화된 북부 청교도보다는 남부의 복음주의 교회의 근본주의 사상의 영향이 크다.
미국 정부나 반미활동위원회는 '세일럼의 마녀들'이 매카시즘 비판을 위해 쓰여진 것을 알고 불쾌해했지만 1957년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1692년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 재판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악마나 영혼 따위의 종교적, 초자연적 현상을 재판에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증거의 여왕이라는 자백도 고문으로 인한 자백은 무효로 해야 하고, 자백이나 다른 사람의 증언도 객관적 물증의 뒷받침 없이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는 증거주의재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 1594년 독일 뇌르틀링겐에서는 11달동안 약 56번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끝까지 마녀가 아니라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엔 고향인 울름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는 마리아 홀린(Maria Hollin)이라는 이름의 강철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56번 정도 고문을 당했는데도 마녀라는 자백을 얻지 못하면 풀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녀사냥은 경제적 갈취가 목적인데 이 당시 고문은 사형집행관이 했는데 이들은 고문을 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때마다 돈받고 일했다. 그런데 한 일로 56번이나 고문을 했다는 건 그만큼 고문하는 측에서 돈이 줄줄 샜다는 얘기가 된다. 56번이나 고문했는데도 굴하지 않았으니 한번 더 한다고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며 설령 자백을 받아냈다 쳐도 이미 56번이나 고문했던터라 이문도 (보통 상황에 비해서) 별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잡아와 고문해서 자백받아내는게 더 이득이었을지도 모른다. 담당자들 심리에서도 생각해보면 저 질긴 여인을 계속 고문하는 것도 못할 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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