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적 시각에서 진시황의 외모에 대한 기록으로 생각해보는 역사기록의 주관성
글: 수은하(水銀河)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많은 제왕들은 모두 비범하게 태어났다. 마치 그들은 보통사람과 외견상 다르게 생기지않으면 자신의 황제라는 신분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예를 들어, 주문왕(周文王)은 4개의 눈동자가 있었다고 하고, 유방(劉邦)은 엉덩이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권은 푸른 눈동자에 자색 수염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어, 겉으로보기에는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것같다. 이들 제왕과 비교하자면, 진시황은 비교적 특수하다. 왜냐하면 사서에서 그의 용모에 대하여 전혀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지없이 추악하다고 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지없는 미남자라고 되어 있다. 도저히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진시황에 대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인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황제는 "봉준(峰準), 장목(長目), 지오응(摯烏膺), 시성(豺聲), 은혜를 잘 베풀지 않았으며,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마음을 지녔다. 본인이 곤란할 때는 바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자리하고, 뜻을 얻었을 때는 쉽게 사람을 먹어치운다" 여기서 "봉준"은 그의 코를 묘사한 것이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메부리코이다. "지오응"은 그의 가슴을 얘기한다. 요즘 말로 하면 새가슴이다. "시성"은 이해하기 쉬을 것이다 승냥이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이다. 이런 야수와 같은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기관지염을 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 진시황은 가늘고 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요소를 합쳐보면 대추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조희)는 대기(大期)가 되어 자정을 낳았다." 기(期)의 옛 발음은 'ji'인데, 1년을 의미한다. 즉, 진시황은 부친 자초가 부인 조희를 얻은 후 1년만에 조희가 그녀를 낳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10달동안 어미뱃속에 있는데, 그는 어미뱃속에 2달을 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이 놀랄만한 용모를 지니게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태평어람>>이라는 책에서는 진시황의 용모를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진시황은 이름이 정(政)이다. 호구(虎口), 일각(日角), 대목(大目), 융준(隆準), 키는 팔척육촌이고, 둘레가 칠위(七圍)이다" 진나라때 1척은 오늘날의 23.1센티미터정도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진시황의 키는 1.98미터에 이른다. 1위는 옛척(尺)으로 5촌 내지 1척의 사이이다. 7위는 약 1.2미터정도이다. "호구, 일각, 대목, 융준'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위풍당당한 용모이며 전형적인 제왕의 용모이다. 만일 이러한 기재가 사실이라면, 진시황은 아주 건장하고 당당한 사나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전백찬이 동의하는 것이다. 그는 <<진한사>>에서 진시황은 영준하고 잘생겼다고 말했다: "(진시화)은 후세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엄숙하고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느 정도 부모의 유전을 받았다면, 그는 당연히 영준하고 잘생긴 청년일 것이다. 즉, 그의 영준함으로 인하여 그는 상인, 지주의 역량을 모을 수 있었고, 중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사실 출생지점으로 보면, 진시황은 관중(關中)에서 태어났으므로, 서북사람이다. <<관중비사>>, <<관중남인>>을 본 사람이면 기억할 것이다. 서북대한은 대부분 키가 크고 용모도 당당하다. 현재 우리가 자주보는 진시황의 화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그린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때의 대화가 염입본의 <<역대제왕도>>의 아이디어를 결합시켰다. <<역대제왕도>>는 서한에서 수나라까지 13명의 황제의 화상을 그렸다. 그 중에는 개국황제도 있고, 망국의 군주도 있다. 그런데, 유독 '천고일제'인 진시황의 화상이 빠졌다. 이것은 서한의 한무제때부터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치국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2천여년간 유가사상을 정통으로 보고, 진시황시대에는 일찌기 법가로 통치하고, 분서갱유를 했었기 때문에 역대왕조에서 진시황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마광조차 한무제를 비판할 때 진시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얘기했다. <<역대제왕도>> 중의 개국지군은 모두 위무강의하고 의표당당하며, 기도비범하게 그렸다. 후인들은 고양이를 가지고 호랑이를 유추하듯, 진무제 사마염의 화상을 가지고, 진시황이 허리를 곧게 펴고 서서, 입가를 꽉다물고 두 눈은 형형한 모습으로 그렸다. 섬서역사박물관의 연구원인 장명흡은 "진시황을 본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영화티비에서는 인물을 그릴 때 외재적인 이미지를 중시한다. 내재적인 성격의 발로로 보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각종 성격으로 분석하면, 필자는 진시황의 용모가 몸이 약간 마르고, 눈은 깊으며, 눈썹은 약간 길고, 코는 약간 높으며, 광대뼈는 튀어나온 모습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진시황을 "봉준, 장목, 집오응, 시성"의 추악한 모습으로 묘사했을까? 여기에는 아마도 개인적인 호오가 반영된 것같다. 사마천은 잔혹한 궁형까지 받았으므로, 그의 붓아래에서 역대의 혹리, 폭군은 모두 좋지 않게 그려졌다.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그에 대한 반감으로 과장해서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조희는 진시황의 모친으로 진시황과 관계가 가장 밀접한 여인이다. 그녀는 여불위와의 사이에 영정을 가졌는데, 자초를 속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즉위한 후, 조희는 태후가 되고, 여불위는 상국이 된다. 그리고 둘은 음란한 생활을 계속한다. 나중에 그녀는 다시 다른 남자와 통간한다. 그리고 두 아들을 낳는다. 진시황이 이를 알고난 후에 무정하게 모친을 쫓아낸다. 진나라대신들이 속속 간하였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는다. 그리고 놀랄만한 명령을 내리는데,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계속 간언한다. 진시황은 연속으로 27명의 대신을 죽였다. 그리고 시신을 성문아래에 쌓아두었다. 그러나, 모초(矛焦)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한 후, 모후를 축출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고, 진시황은 친히 태후를 함양으로 데리고 온다. 그러나, 조희는 더더욱 음란한 생활을 한다. 그리하여 진시황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치욕을 준다. 그녀는 모친을 미워했고, 모자간의 정을 돌보지 않고 태후를 궁안에 연금시킨다. 그와 모친은 일찌기 조나라에서 현지인들의 괴롭힘을 당했다. 그의 군대가 조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는 다시 한단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일찌기 그의 모친과 원수지간인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산채로 매장한다. 이로써 옛날의 한을 푼 것이다. 그의 몸에는 다른 사람의 피와 눈물이 가득 묻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글을 쓸 때 심하게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어찌되었건,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첫인물이다. 그의 역사공적은 없애버릴 수 없다. 만일 육국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각종 문자, 도량형은 통일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아마도 제2의 유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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