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권과 야쿠자의 유착 관계; 스미요시카이-가부키초 이권; 이나가와카이-미국 CIA/코다마 요시오-조지 H.W. 부시/노무라 증권/닛코 증권 스캔들; 야마구치구미-미국 CIA/코다마 요시오/정건영-고노 이치로-이시이 코키 살인사건-아베 신조 커넥션

 
스미요시카이

가부키초 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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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재일교포프로레슬러 역도산[4]과 친분이 깊어 토우세이카이에서 역도산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1963년 12월 8일, 도쿄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역도산이 야쿠자 조직원인 무라타 카츠시와 시비가 붙었다가 칼에 복부를 찔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무라타는 토우세이카이가 의형제를 맺은 야마구치구미의 경쟁 조직인 스미요시카이 소속이었다.[5] 결국 역도산은 며칠 후 자상으로 인한 복막염 발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격분한 정건영은 스미요시카이 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직원들을 집결시켰지만 야쿠자 원로들의 중재로 큰 사고 없이 휴전에 들어갔다.

 

 

이나가와카이

 

https://en.wikipedia.org/wiki/Susumu_Ishii

 

Kakuji Inagawa (稲川 角二 Inagawa Kakuji), also known as Seijō Inagawa (稲川 聖城 Inagawa Seijō; November 1914 – December 22, 2007) was a Japanese yakuza boss best known for founding the Inagawa-kai, Japan's third-largest yakuza syndicate.

Inagawa, son of a Meiji University graduate who fell on hard times, never attended school. He was recruited into the yakuza as an enforcer when he was a teenage judo student.

After serving in World War II, Inagawa formed the Inagawa-gumi, the predecessor to the current Inagawa-kai, in Atami, Shizuoka in 1949.

Inagawa was regarded as an "elder statesman" of the yakuza, and a peacemaker skilled in settling disputes between rival gangs. In the early 1960s, he headed the short-lived Kanto-kai, a federation of Kantō region gangs organized by Yoshio Kodama. That organization's rightist philosophy was summed up by Inagawa: "We bakuto cannot walk in broad daylight," he said. "But if we unite and form a wall to stop Communism, we can be of service to our nat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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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released from prison at the start of Japan's bubble economy in 1984. Through various loans, banking deals, and real estate scams, he accumulated assets of over $4 billion which he invested in projects around the world, including in Korea and the United States. In 1989, his group even hired Prescott Bush, George H. W. Bush's brother, as an advisor (Bush denied knowing his clients' criminal background).[2]

Under Ishii's leadership, the two largest Japanese investment firms, Nomura Securities and Nikko Securities, lent money to the Inagawa-kai; the sales director of Nomura personally administered Ishii's account.[2] Using $200 million in loans, Ishii was able to manipulate the stock market, including buying 27 million shares in the Tokyu Corporation. He made a profit of almost 2 billion dollars from his Tokyu investment.[3] Ishii also received credit and loans totaling to $2.5 billion from Sagawa Kyubin. The president of Nikko Securities and the chairman and president of Nomura resigned when their links to Ishii became public.[4]

 

 

야마구치 구미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건영은 1963년 일본 정치깡패계의 거물 코다마 요시오와 결탁하였고, 코다마의 주선으로 3대 야마구치구미 두목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와 사카즈키고토를 맺었다. 그 해 11월 9일, 도쿄회관 앞 길거리에서 토우세이카이 조직원이 사업가이자 정치 브로커인 다나카 세이겐(田中清玄)[2]을 총으로 저격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은 배후 인물로 정건영을 체포했지만 결국 혐의점을 찾지 못하여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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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다. 리즈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3대 구미쵸 타오카 카즈오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교통상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고노 이치로는 아들이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손자가 고노 다로 현 국무대신이다. 즉 전형적인 정치인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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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코키 살인사건

이시이 코키(石井紘基, 1940.11.6~2002.10.25)는 일본 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으로 젊은 시절에는 안보투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이었다. 이시이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안보투쟁 당시 일본사회당의 집행부서기장이었던 에다 사부로가 시위대 앞에 서서 경찰을 가로막은데서 감명을 받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소련에 유학을 다녀오고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뒤 일본 사회당에 입당해서 에다 사부로의 아들인 에다 사츠키비서로 활동하다가, 1978년간 나오토와 함께 사회민주연합을 결성했다. 1992년에는 일본신당으로 당적을 옮겨, 1993년 (구) 도쿄도 제3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쿠리모토 신이치로와 자유연합을 결성했고 쿠리모토가 자민당으로 옮겨간 뒤에는 일시적으로 자유연합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후에 신당 사키가케를 거쳐서, 1996년 민주당 결성때 참여하게 된다.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이후에는 도쿄도 제6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시이는 이른바 폭탄 발언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국회에서 내뱉는 발언들이 하도 폭발력이 높은 것들이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가 주로 관심을 가진것은 일본 정부의 예산낭비와 인사비리 같은 것들이었는데, 1997년에는 방위청 조달비리를 폭로하여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에 나서도록 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관료의 낙하산 인사도 강하게 비판했으며 궁극적으로 낙하산 인사들이 장악한 공기업이 맡고 있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민간 중소기업들로 이양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 이시이 코키의 죽음[편집]

2002년 10월 25일, 이시이 코키는 세타가야에 있는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날카로운 회칼에 찔려서 살해당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를 죽였다는 범인이 자수했는데 그는 야쿠자 야마구치구미 출신의 우익단체 회장인 이토 하쿠스이였다.

이토는 이시이에게 집세를 부탁했지만, 이시이가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그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토의 진술에 의문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애당초 이시이와 이토는 이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런 관계에서 집세를 마련해 달라는 이야기가 나올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것. 게다가 이시이가 평소 관료와 정부의 부패를 강하게 질타한 탓에 이토의 배후에 이런 관료와 정부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시이가 10월 28일에 대정부 질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시이는 이 날 자신이 대정부 질문에서 중요한 사실을 밝힐 것이라면서 이 사실이 밝혀지면 여당은 뒤집어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시이를 살해한 이토는 2004년 6월 18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판결에서 이토가 주장하는 범행동기를 믿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후 2005년 11월 5일, 최고재판소에서 이토의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4. 의혹[편집]

가장 큰 의혹은 사라진 이시이의 서류다. 이토가 이시이를 살해했을때 서류 가방에는 서류와 더불어 30만엔의 현금이 들어있었으나 정작 집세를 안줘서 죽였다는 이토의 말과는 달리 30만엔의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 서류가 없어졌다는것.

게다가 죽은 이시이의 시신 상태를 살펴본 결과 왼손 중지가 밖에서부터 잘려져 있는 걸로 드러났다. 이시이의 아내는 이시이가 왼손으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해 이시이가 서류가방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자 이토가 왼손 중지까지 절단해가면서 서류가방을 뺏어냈다는 결론이 된다. 결국 범인의 목적은 이시이가 가지고 있었던 서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2009년 2월 11일, TV 아사히의 "슈퍼 J채널"에서 옥중의 이토를 전격 인터뷰한 내용에 의하면 이토는 누가 시켜서 이시이를 죽였다., 법정에서의 증언은 터무니 없었다.라고 진술해 이시이 살해에 배후가 있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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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야마구치구미 고도카이 소속 조직원들의 고베측에 대한 공격이 계속 되고 있는데, 실행범만 처벌하고 윗선은 처벌하지 않는 것이 감지되고 있다. 미조구치 아츠시 기자는 이런 이유가 고도카이의 다카야마 기요시가 아베 신조나 자민당과 관련이 있는 경찰, 검찰 간부들과 밀접하게 연계됐었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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