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周恩來)는 동성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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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사의 미스테리 :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동성애자(同性愛者)였나.
중국현대사의 거인으로 핸섬한 외모에 죽어서도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는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한 평판은 긍정적인 것 일색이다. 한국에서도 중국현대사를 안다는 이들조차도 그의 이런 모습에만 주목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한국인들도 그의 핸섬한 이미지 때문인지 보편적으로 알려진 그의 긍정적인 면만 보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대중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저우언라이의 감춰진 모습을 합리적인 추론으로 유추해낸 ‘저우언라이의 비밀정감세계’(周恩来的秘密情感世界)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됐다. 중국에서는 금서인 이 책은 한국에서는 출판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콩, 타이완의 언론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즈, BBC가 관심을 가지고 내용을 보도했다.
‘저우언라이가 사실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 책의 저자는 홍콩의 정치논평 매체인 개방(開放)기자였던 초이윙무이(蔡咏梅), 이 책을 낸 신세기출판사는 천안문사태 당시 학생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실각된 자오즈양 총리의 비서 바오통의 아들 바오푸가 설립자다.
초이윙무이는 일찍부터 발현된 저우언라이의 독특한 성적취향에 주목했다. 일찍이 난카이학당(南開學堂)에 재학했을 때 저우는 연극에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핸섬한 이목구비의 저우는 여성으로 분장해 무대에 오르곤 했다. 당시 2살 연하의 남성 후배인 리푸징(李福景)과 각별한 관계였다. 남성간의 우정을 넘어선 요즘식으로 말하면 특이한 브로맨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우언라이는 난카이에서 리푸징과 반년이상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1918년말 20세였던 저우언라이는 톈진을 떠나 일본으로 가면서 홍콩으로 떠나는 리푸징과 눈물의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에 머무르면서 가슴속에 응어리진 상처를 일기에 쓴다.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정(情)이란 것에 물들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라고나 할까.” “마음의 상처가 두 달이 됐다, 달이 뜨는 밤, 바람 부는 새벽, 비가 창을 두드리고 꽃이 피어날 때 내 마음이 상념은 깊어진다. 나의 ‘혜’동생(慧弟)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여기서 ‘혜’동생(慧弟)은 리푸징의 자(字)인 신혜(新慧)를 지칭한 것인데 이 일기는 1998년 저우언라이 탄신백주년을 기해 공개됐는데 중국당국은 저우언라이의 감성이 절절하게 표현된 구절을 시커먼 잉크로 덧칠했다.
저우언라이와 리징푸는 서로 헤어져 있기가 괴로웠는지 1921년에 영국에서 해후한다. 리푸징은 런던의 맨체스터 대학에 입학했지만 저우언라이는 런던의 생활비가 너무 비싸 견디지 못하고 일하면서 공부(勤工儉學)하겠다면서 프랑스로 건너간다.
프랑스에서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소련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 제공하는 생활비를 받는다. 이 때 리징푸와는 한동안 못 본 상태여서 저우는 멘털붕괴(情緒崩潰)상태에 빠진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느닷없이 1923년 광저우에 머물던 덩잉차오(鄧穎超)에게 우편엽서로 구혼한다. 덩잉차오와는 5년 동안 못 본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예전에 연애관계도 아니었다. 중학시절 학생운동단체인 각오사(覺悟社)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정도였다.
중국공산당사 전문가인 가오원쳰(高文謙)는 2007년에 출판한 만년의 저우언라이(晚年周恩来)라는 저서에서 광저우에서 저우와 덩의 해후를 결혼할 사이라고 보기에는 특이했다고 밝혔다.
“저우는 덩잉차오가 광저우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찾아가지 않았다. 결국 덩잉차오는 저우가 회의중이던 광동성 총공회로 찾아갔다. 공회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덩이 방으로 들어오자 슬쩍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 미래의 부인이 될 덩잉차오에게 저우는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국공산당은 덩잉차오에 대한 이 같은 저우언라이의 냉담한 태도를 두고 당을 우선시하는 사심 없는 자세라고 치켜 올리지만 상식적으로는 자연스럽지 않다. 초이윙무이(蔡詠梅)는 저우언라이 부부를 서로 손님처럼 공경(相敬如賓)하는 극도로 예의를 차린 관계이면서도 늘 독수공방(空殼一般)상태였다고 평가한다. 사실 덩잉차오의 외모는 미인이 아니며 공산혁명에 투신한 저우언라이가 그녀에게 애정을 표현한 경우도 발견할 수가 없다.
1925년에 결혼한 저우언라이 부부는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덩잉차오는 저우를 남자혁명동지로 여겼던 것 같다.
홍콩과 타이완의 여러 매체에 따르면, 저우언라이의 성적취향은 마오저동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저우언라이가 부인 덩잉차오에게 극진하게 예우를 갖춘 것(相敬如賓)처럼 마오에게도 굴종하는 모습(卑躬屈膝)으로 대했으며 불이익을 받더라도 감내(逆來順受)했다. 1930년대 중기 이전에 저우는 공산당내 서열이 마오보다도 높았지만 그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에서 동성애는 반사회주의적인 죄악이며 자산계급의 생활방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동성애자의 면모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거의 성인으로 추앙될 정도의 인물이다. 그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거론하는 자체부터 금기다.
이 때문이지는 확실치 않지만 2015년 말 홍콩에서 ‘저우언라이의 비밀정감세계’(周恩来的秘密情感世界)가 출판되자 중국에서는 2016년 1월초 공산당원과 청소년에게 저우언라이의 공작풍조(作风)와 품덕(品德)을 설명하는 저우언라이문답집(周恩来答问录)이 관주도로 출간됐다.
그런가 하면 2016년 1월에는 홍콩의 연예인 왕시(王喜)가 페이스북에 저우언라이가 동성애자일수도 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올렸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중국관영 CC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대단한 도전’(了不起的挑战)에 출연했는데 정작 방송에서는 그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채 나갔다. 당시 홍콩과 타이완의 연예매체들은 중국의 정치적 금기를 건드린 연예인이 방송화면에서 모자이크 처리됐다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반면 중국측은 왕시(王喜)가 홍콩독립분자라서 모자이크 처리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보통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해서 풍채(身)를 가장 먼저 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면목은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경우도 있다.
 
 
 
 
 
 https://zh.wikipedia.org/zh-cn/%E6%9D%8E%E7%A6%8F%E6%99%AF
 

리푸징 (1901년 ~ 1960년 10월 3일), 자는 신후이(新派)이며, 중화인민공화국 톈진 출신의 남성 정치인 이었다.

전기

리푸징은 1914년 톈진 제1모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카이 중학교 에 진학했다 . 난카이 중학교 시절, 그는 동급생인 저우언라이, 우궈 전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 저우언라이는 1916년에 "내가 도덕적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진심으로 교류하며, 형제처럼 지내고 싶은 사람은 리신후이와 우즈즈 두 사람뿐이다"라고 썼다. 난카이 중학교 졸업 후, 리푸징은 1919년 홍콩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1920년에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옌슈의 "판쑨 장학금"을 받아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에서 공부한 그는 1925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진푸 철도국 , 베이닝 철도국 , 카이루안 광산국 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 항일 전쟁 승리 후 , 그는 푸순 광업국 부국장 겸 수석 엔지니어, 북중국 석탄 관리 위원회 수석 엔지니어, 그리고 행정원 산하 미 원조 활용 위원회 북경 사무소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그는 카이루안 광업국에서 일했다. 1956년 석탄산업부 로 전근하여 과학정보연구소 부소장 겸 수석기사로 재직했다. 1960년 10월 3일 베이징에서 폐암 으로 사망했다 . 그의 오랜 친구인 저우언라이가 가 싱사 장례식장 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에 직접 참석했다 . [ 1 ] [ 2 ] [ 3 ]

 
 
 
 
 
 
 
https://kknews.cc/zh-sg/history/n68lpk8.html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724229.html

“인생에서 연애와 부부는 별개의 일이다. 연애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한쪽이 감정을 발산하면 다른 쪽이 감응하는 것이 곧 연애다. 하지만 부부는 순전히 가정을 꾸리고 인종을 유전시키는 관계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초대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주은래·1898~1976)가 스무살이던 1918년에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이다. 홍콩 언론인 초이윙무이(67)는 저우언라이의 일기, 그가 아내 덩잉차오(등영초·1904~1992)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분석한 끝에 “그는 안타깝게도 100년 전 태어나는 불운을 겪은 동성애자 정치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보 성향 잡지 <개방>의 편집장 출신인 초이윙무이는 31일 출간되는 저서 <저우언라이의 비밀 감정세계>(사진)에서 저우언라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2년 후배인 리푸징이었다고 적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저우언라이는 2년간 기숙사에서 함께 살았던 리푸징에 대해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주는” 상대로 묘사하며, “그림자도 떨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1918년말 리푸징이 홍콩대 진학을 위해 떠나자 저우언라이는 “달, 아침 바람, 창밖에 내리는 비, 꽃, 모든 게 내 가족과 후이(리푸징의 애칭)를 그립게 한다. 끔찍이 힘들다”고 적었다. 저우언라이는 리푸징과 연락을 유지했고 1921년엔 함께 대학에 진학할 것을 꿈꾸며 영국에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리푸징은 맨체스터대에 입학했지만 저우언라이는 프랑스로 가서 중국공산당 세포조직에 가담하면서 둘은 다시 떨어졌다. 초이윙무이는 “단순한 우정이라기보단 사랑이었다”고 적었다. 리푸징은 1960년 사망했다.

반면,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데면데면했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저우언라이는 1919년 귀국해 5·4운동 뒤 꾸린 ‘각오사’ 활동 중에 만난 덩잉차오와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러나 1925년 그를 찾아 5년 만에 혈혈단신 상하이에서 광저우까지 온 21살 덩잉차오를, 저우언라이는 마중조차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슬하엔 자녀가 없었다. 지은이는 “두 사람 사이엔 로맨스 감정이 없었으므로 결혼은 유명무실했으며, 그는 부인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은이는 “중국의 작가들도 이런 자료들을 다 봤겠지만 저우언라이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이 고위 지도자들의 개인신상 논란을 금하는 중국에선 판금 조처를 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https://www.news1.kr/world/northeast-asia/2529699


(베이징 로이터=뉴스1) 정은지 기자 =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한명인 저우언라이 전 총리가 게이였을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로이터통신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홍콩 정치매거진 에디터로 활동한 초이윙무이는 최근 동성애를 주제로 발간된 자신의 첫번째 책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정치인으로 평가되는 전 중국 공산당 고위 관리의 동성애 성향을 폭로한 이 책은 논란을 야기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이는 "그동안 저우 전 총리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가 주고받은 편지와 일기, 저우가 감정을 주고받았던 그의 후배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통해 그가 아마도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저우 전 총리는 자신보다 2년 어린 학교 후배인 리푸징과 정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일기에서 "리푸징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다"며 "리와 함께라면 슬픔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저우와 리는 1917년 함께 기숙사를 사용했는데 이들은 항상 함께 다녔다고 초이는 전했다.


저우는 덩잉차오와 1925년 결혼했으나 이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초이는 "이들의 결혼생활에는 로맨틱한 감정이 없었으며 명목적으로만 결혼했다"며 "저우는 그의 부인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저우언라이는 1949년 마오쩌둥의 혁명 이후 1976년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중국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번에 입수한 '저우언라이의 사생활(The Secret Emotional Life of Zhou Enlai)' 발췌록이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실직한 자오즈양 전 부주석의 비밀 일기를 출판한 출판사와 같은 곳이라고 덧붙였다.

초이는 "저우언라이는 게이 정치인으로 100년 일찍 태어났다는 불운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법적으로 동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공인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런 성향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인 초이는 중국의 유명 지도자인 저우언라이의 사생활을 담은 이번 책은 중국에서 출판이 금지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초이는 로이터통신에 저우 전 총리가 자신의 일기에서 진심을 숨겼을 수도 있지만 이는 쉽게 찾아낼 수 있다"며 "중국 본토 학자들은 이 내용이 알려지기전에 그가 게이일 가능성을 연관지으려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미국의 전기 작가인 가오원취안은 저우언라이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다면서도 "여러 기록들이 있으나 이를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국무원, 공산당 역사연구사무실 측은 어떠한 논평도 거부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1229163900074

(베이징 로이터=연합뉴스) 홍콩의 한 작가가 새해 출간할 예정인 서적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중국 초대 총리가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서 논란이 예상된다.

홍콩의 진보 성향 작가인 초이윙무이는 자신이 펴낸 '저우언라이의 비밀스러운 감정 생활'의 발췌문에서 저우언라이가 청년 시절 두 살 연하인 남자 후배와 사랑에 빠진 적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남자 후배에 대한 애정과 아내 덩잉차오(鄧潁超)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을 묘사한 글을 포함해 저우언라이 부부가 쓴 편지와 일기 등을 다시 읽고서 저우언라이가 게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우언라이가 100년 일찍 태어나는 불행을 겪은 게이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덧붙였다.

진보적 정치잡지 편집자 출신인 작가는 발췌문에서 저우언라이가 학교 2년 후배인 리푸징을 가장 좋아했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일기에 리푸징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으며 리푸징과 함께 하는 것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고 썼다고 작가가 전했다.

작가는 저우언라이와 리푸징이 1917년부터 기숙사를 함께 썼다며 "그들의 그리자조차 떨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리푸징은 1960년 사망했다.

저우언라이는 1925년 덩잉차오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작가는 저우언라이의 결혼 생활에 대해 "애정이 없는 명목상 결혼일 뿐이었다"며 "저우언라이가 아내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덩잉차오는 1983∼1988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政協) 주석을 역임하고서 1992년 사망했다.

초이윙무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일기의 진정한 의미가 뻔히 보이는 곳에 숨겨져 있었지만, 예전 중국 학자들이 동성애라는 주제를 몰랐기 때문에 연관짓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서적이 저우언라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위지도자의 개인 신상 논란이 금지된 중국에서 판매 금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저우언라이의 전기를 집필한 재미 작가 가오원첸은 저우언라이의 성적 취향에 대한 추측을 알았지만, 추측이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국무원 신문판공실이나 대변인실은 코멘트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중국공산당 역사연구실도 전화 통화에서 코멘트를 거부했다.







https://www.newsis.com/view/NISX20160112_0013832152


【서울=뉴시스】이재준 기자 = 홍콩 톱스타 왕시(王喜 48)가 중국 초대총리로 아직도 많은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동성애자'라고 매도했다는 이유로 퇴출 위기에 몰렸다.

왕시는 지난달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저우언라이에 대해 "게이인가"라고 글을 올렸다가 갖은 봉변을 당하고 있다. 벌써 중국 당국이 대륙에서 왕시의 연예활동을 금지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그는 홍콩 여성 언론인 초이윙무이(蔡詠梅)가 최근 출간한 책에서 "저우언라이가 청년시절 두 살 연하의 남성에 애틋한 감정을 품었다"며 동성애자 가능성을 제기한데 대해 느낀 감상을 페이스북에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 국내에선 "홍콩 연예인이 대륙에서 돈을 벌면서 뒷구멍으로 우리 영도자를 모욕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비등했다.

왕시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찍은 중앙TV 등 방송국에는 항의 편지가 쇄도했다.



이에 중앙TV를 비롯한 각 방송국은 왕시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의 방송을 연기하거나 그의 출연 장면을 통편집해 삭제해 버리는 등 조치에 나섰다.

지난 10일 CCTV 인기 예능 프로그램 '대단한 도전'(了不起的挑戰)은 왕시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 누군지를 알 수 없게 해서 방송했다.

한국의 '무한도전'을 본따 제작한 프로그램은 연예인이 군인이나 소방관, 요리사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는 포맷이다.

왕시가 직접 체험하는 장면은 모두 들어냈고 다른 연예인과 함께 찍은 장면을 모두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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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지난해 초 왕시는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보안검사 도중 "당신들 중국..."이라고 무심코 말했다가 "당신은 중국사람이 아닌가"는 힐난을 받은 사연을 페이스북에 실었다가 구설에 올랐다.

당시 왕시의 발언에 수많은 홍콩 누리꾼이 지지를 표명했으나 중국 누리꾼에게선 '홍콩 독립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홍콩 BTV 드라마 '열화웅심'(烈火雄心)으로 스타덤에 오른 왕시는 중국에서 여러 편의 드라마를 찍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발히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작년 봄에는 CCTV의 간판 사회자 비푸젠(畢福劍)이 공산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우리를 힘들게 했다" 비판한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방송계에서 추방당했다.

현지에선 "왕시의 발언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꼬투리를 잡아 사회에서 매장하고 학대하는 문화대혁명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yjj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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