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미나티 역사에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보다는 크니게-미라보 라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인드라는 프랑스 혁명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전면 비판합니다.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일루미나티 음모 비판론 역시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인드라 관점에서, 일루미나티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조직이란, 자생적이었기 보다는, 오히려 호프 가문의 은밀한 지원과 영국 정부의 대유럽 정책 속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조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크니게의 기획이 성공했다면, 일루미나티 조직이 프랑스 혁명 등 당대 정세에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크니게 기획이 실패함에 따라, 일루미나티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당대 주도하던 유럽 세력들에 의해서, 필요에 의해서, 과대평가당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일루미나티 음모론이나 일루미나티 음모론 비판론이나, 모두 일루미나티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프랑스 혁명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전면 비판하는 동시에 일루미나티 음모론 비판론 역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드라가 왜 미라보를 중시하고, 미라보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네케르나 로베스피에르보다 왜 더 중요한가를 설명드립니다.

일,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회와도 별 관련이 없습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1774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으나, 이내 프리메이슨에 실망하여 1776년 일루미나티를 만드는데, 예수회 시스템을 응용해서 모던파를 비판하고 고전파를 강화시켜 독일식 고전파를 만들어서 조직 이념을 강화하려고 하였을 뿐, 예수회와 관계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학자풍의 지식인이었지, 당대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조직가가 아니었습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당대 유럽에서 당대 각국 사정에 따라, 합법, 반합법, 비합법으로 비밀리에 유행하던, 독서회의 주관자였을 뿐입니다. 학습회는 영국에서 클럽으로, 프랑스에서 살롱으로 발전한 반면, 그외의 지역에서는, 귀족과 부유한 시민, 지식인(주로 신학과 행정을 연구, 공부하던 대학 교수 및 학생)의 소수 모임이었을 뿐입니다.

이, 인드라는 오늘날까지 일루미나티 명성을 떨치게 한 인물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아니라 조직가 크니게라고 보고 있습니다. 크니게는 몰락 귀족 출신으로 독서회에 머물던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조직을 전유럽적 차원으로 키운, '진정한' 일루미나티였다고 인드라는 평가합니다.

크니게를 삼국지 시대로 비유하면, 동탁 사위 우보 밑에 있었던 가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보는 당대 권력가들 일부가 그러하듯 점술사를 맹신하였습니다. 그처럼,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자신이 만든 일루미나티 이념에 지나치게 맹신했던 것입니다. 구조는 우보나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나 인드라 관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가후가 우보에게 실망하듯, 크니게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에게 실망한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크니게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에게 일루미나티 지분을 요구한 것입니다. 크니게 입장에서는 당연하였습니다. '아담아, 네가 창시자라는 건 인정하겠는데, 중시조는 크니게. 내가 아니냐,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반만 다오, 엄밀하게 보면, 78%가 내 몫이지만.'

크니게의 일루미나티는, 음모론에서 곧잘 등장하는, 교황파 대 국왕파로 갈리는 유럽 대륙 정세 속에서 러시아 황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조차도 프리메이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몽 군주였기에, 은근한 묵인 속에서 급속히 세를 확대하여 회원 수 삼사 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당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수준이 아니라, 정보에 민감했던 호프 가문이나 영국 정부에게도 알려진 것인데, 호프 가문이나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미개한 독일 지역에서 나름 노력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나쁘지 않다고 방관했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긍정적이었습니다.

비유하면, 미라보가 협천자 조조였다면, 크니게는 서량 변방 호족 가후였습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와 가후가 우여곡절 끝에 연대하였다면, 프랑스 혁명 직전 미라보와 크니게 연대가 불발하였던 것입니다.

사건은, 당대 프랑스 혁명의 유일한 희망, 미라보와 당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후진 야만 지역이었던 변방 크니게의 결합이, 세 가지 이유로 좌절합니다. 그 사건이 미라보와 크니게를 연결하여, 독일 일루미나티와 프랑스 프리메이슨을 연합하는 큰 그림을 무너뜨린, 미라보 - 크니게 연락책이 사망한 것입니다. 기록으로는 '벼락에 맞아 뒈졌다'고 하지만, 이는 훗날 이 연합 영향력이 엄청나서 천벌을 받았다, 는 식으로 정리되었을 확율이 매우 높습니다.

ㄱ. 인드라 관점에서, 크니게 - 미라보 회동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입장에서 충분하게 배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크니게 - 미라보 회동에 대해, 인드라는 크니게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에서 미라보로 말을 갈아타려는 실천으로 보입니다. ㅄ 같은 우보 밑에서 숨쉰 채 있기 보다 조조로 전향하는 게 개이득이 아니겠습니까.

ㄴ. 인드라는, 크니게 - 미라보 회동 이전에, 크니게 -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간 지분 갈등이 우선이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대 크니게의 합리적인 요구에 대해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반대했던 것입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전형적인 꼴통인 셈입니다. 마치 '창천이사 황천당립'으로 한순간 반짝하고 뒈진 장각 황건적인 셈입니다.

ㄷ. 크니게는 가후였습니다. 크니게의 마지막 승부수였던 것입니다. 미라보와의 프랑스 프리메이슨, 크니게의 독일 일루미나티 승부수는, 마치 삼국지 적벽대전에서의 촉-오 동맹이었던 셈입니다. 허나, 유럽의 적벽대전은, 처절하게 패배한 셈입니다. 꼴통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덕분인 것입니다. 꼴통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계산은 분명합니다. '크니게가 없다면, 내가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어.' 허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인드라가 보기에, 크니게의 마지막 승부수란, 당대 유럽 금융 지배 세력인 호프 가문, 영국 정부, 프랑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모두 흔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크니게 기획이 성공했다면, 오늘날 역사는 새롭게 작성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미라보 - 크니게 연락책이 급사하면서, 크니게는, 가후처럼 깨끗하게 포기하고, 가늘고 오래된, 새로운 삶을 삽니다.

반면, 꼴통이자 미련퉁이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크니게가 없으니, 이젠 내가 유럽의 왕이다' 라는 착각 속에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프랑스 지도부에게 수도 없이 편지를 날립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지도부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를 존중하였으나, 이내, '아담 바이스하우푸트는, ㅈ도 모르는 ㅄ이다'라는 판단 속에서 무시합니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자신을 보호했던 고타 영주 밑에서 열심히 편지질했는데, 반응이 없자, 절망하고 맙니다. 어느 시기부터, 자신이 가장 반대했던 교회에 매일 가서 참회하면서, '내가 ㅄ이었다'라고 회개하면서 '고타'에서 일생을 마칩니다.

반면, 크니게는 책까지 내면서 행복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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