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맨, 트랜지스터와 마찬가지로, 편의점의 원조는 일본이 아닌 서양; 히사이시 조의 지적처럼, 일본인은 처음부터 뭔가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개량하는데 특화된 민족; 1974년 만들어진 일본 세븐일레븐의 원조는1927년 미국 텍사스에서 창립된 사우스랜드(Southland Ice Company); 일본의 이토요카도가 세븐일레븐을 수입해 성공한 것도 잡화점에서 주부들이 많이 필요한 상품만 빼와서 진열하고, 주부들의 주활동시간대를 고려해 7:00AM-11:00PM까지 영업하는 사우스랜드의 영업형태, 1968년 마진을 가맹업체와 배분하는 사우스랜드의 프랜차이즈 시스템, 또 사우스랜드가 마진이 높은 슬러쉬/삼각 샌드위치(일본에선 삼각김밥)/패스트푸드를 판매했던 전략을 그대로 베낀 것; 이토요카도/세븐일레븐/데니스 회장을 지낸 '장사의 신' 이토 마사토시: 현대의 장사는 감으로 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로 하는 것 / "재고를 줄이면서 (물건을 팔릴만큼만 갖다놔서 손실을 줄인다), (수요에 맞는 상품을 판매하면서) 지속적인 가설검증을 해아한다"; (워런 버핏의 사례에서 보듯) 투자도 이익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큰 손실을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 1977년 이후 세븐일레븐의 재고 (편의점에서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물건들)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retail(소매)은 detail; 고객顧客의 한자어 고顧는 돌아볼고로 고객에게 어떻게 했는지 직원과 사장이 돌아봐야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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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가수의 레코드판이나 카세트테이프를 산 뒤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 집에 가야 카세트나 전축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원하는 장소는 물론 길을 걷거나 운동할 때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소니 ‘워크맨’ 덕분이다. 이전엔 없던 이 휴대용 오디오는 당시 생활과 문화를 크게 바꾸는 전환점 제품이며 소니를 세계적인 유명기업으로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이 달에는 컴퓨터, 가전기기, 게임기 등 소니의 복잡한 가계도 대신 국내외 음반 사업과 오디오 제품 사업 판도를 바꾼 ‘워크맨’ 비하인드스토리를 살폈다.


고전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면 휴대용 음향기기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소니 ‘워크맨’이다. 지금은 MP3 플레이어가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모두 워크맨이 차려놓은 휴대용 오디오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제품들이다. 2010년 이후 소니가 휴대용 카세트형 워크맨 생산을 중단해 더 이상 ‘신상’은 만날 수 없지만, 생김새와 기능을 바꾼 워크맨은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걸으면서 들을 수 있다는 뜻을 담아 만든 초기 워크맨 로고.


점점 작아지는 워크맨 제품에 적합하게 재구성한 현재 워크맨 로고.(우)

‘휴대용 카세트 = 워크맨’ 공식화
‘스카치테이프’나 ‘대일밴드’처럼 하나의 상표가 마치 전체제품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처럼 굳어버린 것들이 있다. 소니 워크맨도 그중에 하나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까지 수많은 미니카세트가 등장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모두 통틀어 워크맨이라 부른다. 문법에 맞지도 않는 영어 단어가 ‘개인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라는 고유 명사로 영어 사전에 실릴 만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디어, 기술력, 눈높이 홍보 전략의 3박자가 고루 갖춰져서다.

워크맨 탄생신화는 1946년 5월,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Ibuka Masaru)와 모리타 아키오(Morita Akio)가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국 여행 중 트랜지스터 기술을 접한 이부카와 모리타는 1949년 테이프형 녹음기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을 개발하며 전자기기 전문회사의 기초를 다진다. 이 둘은 1958년 회사 이름을 지금의 소니로 바꾸고 라디오와 카세트 녹음기를 만들며 계속 성장했지만, 1970년 쯤 단순한 녹음과 라디오를 벗어난 새로운 제품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이디어를 찾던 중 이부카는 큰 음향기기를 들고 다니는 자사 직원의 불평을 듣고 음악 재생기의 가능성을 발견해 ‘개인용 음악 엔터테인먼트 기기’라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로 한다.

기존 취재용으로 쓰던 녹음용 제품에서 녹음 기능을 없애고 작고 가벼운 헤드폰을 달아 움직이면서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콘셉트를 잡았다. 소비 계층으로 잡은 10~20대와 나이대가 비슷한 어린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워크맨’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모리타는 획기적인 제품인 만큼 몸값을 높이자는 주변 의견을 거스르고 소니 창립 33주년이라는 합당한(?)이유를 들어 3만 3000엔을 주장했다. 들어간 기술과 부품에 견주면 저렴한 값이었다. 1979년 1월 드디어 워크맨 초대작 ‘TPS-L2’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야 해서 네모난 크기를 벗어날 순 없었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몸집으로 줄어든 것만 해도 생김새는 예쁨을 받았다. 원하는 노래를 들으려면 테이프를 바꿔넣어야 했고, 앞뒤감기를 되풀이했지만 당시엔 이러한 번거로움도 놀라운 변화였다.

기술자 출신인 이부카가 제품을 진두지휘 했다면 모리타는 개발 단계는 물론 소비자 층을 꼼꼼히 체크해 눈높이 홍보 전략을 준비했다. 그는 “창의적인 기술력이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품의 기획, 마케팅 창의력이 기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음악 관련업계 전문가와 영화, 드라마 배우들에게 워크맨을 공짜로 보냈다. 또 소니 직원들이 직접 워크맨을 착용하고 긴자, 신주쿠 등 일본 주요 시내와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워크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운동할 때 유용하고 나만의 제품이라는 콘셉트를 광고에 내세워 워크맨의 장점을 한껏 부각시켰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70~80년대 유행한 팝송을 걸으면서 들을 수 있게 만든 워크맨은 카세트테이프의 발전 뿐 아니라 음반 산업, 생활 습관과 문화 전반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워크맨은 오랫동안 졸업입학 선물 1순위였으며 노래 테이프가 잘 팔린 것은 물론, 워크맨을 넣을 수 있는 가방, 옷 등 다양한 액세서리와 아이디어 제품 산업도 발달했다. 1980년대 후반 열풍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로 뻗어나가 미국에도 불어 파나소닉, 도시바, 산요 등에서 ‘워키’나 ‘아이와’같은 제품이 나왔고, 국내에도 삼성과 LG에서 ‘마이마이’와 ‘아하프리’를 만들며 미니카세트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자랑한 소니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약 2억만 대(2008년 기준) 이상의 놀라운 판매를 기록했고 소니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준 효자 상품이다. 지난 2010년 타임지는 1923년 이후 출시 상품 가운데 인류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100대 제품에 워크맨을 꼽았다. 제품은 오래됐을지언정 그때의 향수를 떠올리는 글과 사진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워크맨은 1990년대 중반 CD가 등장하기 전까지 황금기를 누리다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90년도 후반부터 MP3 플레이어 시장이 활기를 띄면서 점점 추억속의 제품이 되었다.

특허권 논쟁
미니카세트 분야에서 오랫동안 왕좌를 지킨 워크맨의 발목은 잡았던 사건은 초기 특허권 분쟁이다. 1979년에 세계 최초 미니카세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워크맨 TPS-L2’의 특허가 이미 신청되어 있었다. 워크맨 개발 7년 전인 1972년 독일의 안드레아스 파벨이 이미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스테레오벨트’를 발명해 이탈리아, 미국, 영국 등에 특허를 신청했던 것이다.
파벨은 소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몇몇 제품에 대해서만 특허료를 받았을 뿐이다. 영국 법원은 “소니는 분명히 파벨의 특허권을 침해했다. 하지만 파벨의 특허는 무효다. 워크맨은 오랫동안 축적된 소니의 기술이 발전한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소니에게 175억 원을 배상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파벨은 특허권을 포기하고 손해배상을 면제 받았다. 파벨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발명자로 인정은 받았지만 결론적으론 소니의 승리였다. 최고 변호사를 기용한 대기업과 개인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이기지만, 특허권만 냈을 뿐 상업적 성공을 이룬 것은 소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출처 : 스마트PC사랑(http://www.ilovep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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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마사토시 (1924 학년의 사업가)

일본 사업가 (1924-2023)

이토 마사토시 (이토 마사토시, 1924년 4월 30일 - 2023년 3월 10일 )는 일본사업가 . 이토요카당 , 세븐일레븐 재팬 , 데니즈 재팬 [1] [2] 의 설립자이다. 일본 체인 스토어 협회 회장. 출신지는 도쿄도 . 그 수법은 「자본주의의 정신」 그 자체라고 말해졌다 [3] .

인물·경력

도쿄도 출생. 1944년 요코하마 시립 상업 전문학교 (현 요코하마 시립 대학 ) 졸업, 미쓰비시 광업 (현 미쓰비시 머티리얼 ) 입사. 대일본 제국 육군 특별 갑종 간부 후보생 (특갑 간)을 거쳐 일본의 항복[4] , 아다치구 기타 센주 에서 가업의 “양화당”이라는 명칭의 양품점에 참가 [2] .

1958년 요카당(현 이토요카당 )을 설립하여 동사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 1973년 요크 세븐(현 세븐-일레븐 재팬 )을 설립해, 동사 대표 이사 사장에 취임. 같은 해 데니즈 재팬을 설립해, 동사 대표 이사 사장에 취임. 1978년 세븐일레븐 재팬 회장, 1978년 일본 체인점 협회 회장. 1981년 데니즈 재팬 회장 [1] [2] .

1996년 이토요카당 명예회장 [5] . 2005년부터 세븐&아이 홀딩스 명예회장을 맡았고, 2016년에는 오랜 세월 자신의 후임을 맡아온 스즈키 토시분 세븐&아이 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겸 CEO를 창업가와 이토 쿠니오 이사 ( 창업가 동성 하지만, 일족이 아니다)등으로 퇴임에 몰렸다 [6] [7] .

2023년 3월 10일 노쇠 때문에 사망. 98세몰 [8] .

친족

교우

칭호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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