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화평의 계획에서 시작된 예정에도 없던 아웅 산 묘소 방문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에서 전두환만 무사했던 이유 + 그리고 생각해보는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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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두환 대통령이 무사했던 이유[편집]

여러모로 명백히 전두환을 노린 폭탄 테러였으나 정말 우연하게도 현장에 없어서 살았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져 살아남았다.

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유칫흘랭 (U Chit Hlaing)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해서 대통령을 잠시 접견한 후 10시 20분에 묘소로 함께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의 승용차가 운행 중에 길바닥에서 고장났다.

문제는 당시 미얀마는 1960년대 대한민국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진 나라여서 길바닥에 지나가는 택시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운전기사는 주변을 사방팔방 뛰어다녀 간신히 대체 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가 이미 도착 예정 시각이었던 10시 15분이고 당연히 지각은 불가피했다.

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은 도착해 있을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려고 1층 로비에 내려갔으나 외무장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국빈인 국가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서는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고 그럴 경우 외무장관이 더 미안해할 것 같아 대통령은 그냥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와서 "이왕 기다리는 김에 영빈관의 영접 요원들에게 격려라도 하자"며 영접 요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4분 뒤인 10시 19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격려 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며 격려 인사를 끝까지 했다.[27]

그러다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한 시각은 예정 시각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이었다. 영빈관에서 묘소까지는 4.5㎞. 오전 일정이 대한민국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다 보니 스케줄이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니라서 굳이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4분의 스케줄 지연이 전두환을 살린 것이다.

아웅 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의 도착이 지연되자 장세동 경호실장[28] 또는 경호실 넘버 투인 천병득 경호처장의 요청[29]에 따라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웅 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 스케줄 지연과 함께 전두환이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이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웅 산 묘소로 향할 때 당시 박상범 청와대 경호실 경호관은 전두환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 바로 뒤의 경호차량 앞자리에 타고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었는데 묘소에 거의 다 와가는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폭탄이 폭발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황급히 대통령 일행을 되돌리게 했다. # 영빈관에서 순교자 묘역까지의 거리는 불과 4.5㎞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각이 10시 28분이었고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그로부터 4분 전에 영빈관을 출발해 테러의 순간에 묘역을 1.5㎞ 정도 남겨 놓고 있었다. 공식 행사는 2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 끗 차이였다.

한편, 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했던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에 묘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이계철 대사가 머리 스타일이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까지 착용한 상태였고 모터사이클 경호를 받으며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린 후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대통령인 양 오인될 수도 있었다.

위 주장과는 달리 약간 상황이 달랐다는 주장도 있는데 참배할 묘지의 행사장이 좁다는 이유로 장세동 경호실장의 요청에 의해 함병춘 비서실장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함병춘 실장도 대머리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이계철 미얀마 대사 또는 함병춘 실장을 전두환으로 잘못 봤거나 관례처럼 비서실장이 도착하니 전두환도 당연히 도착했다고 생각되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고 한다.[30] 이계철 대사와 함병춘 실장 둘 다 순직했다.

이렇게 전두환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는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 펑크 + 세계 최빈국[31]인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어 택시를 타는 게 늦어짐 +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아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 = 스케줄이 늦어지게 되었다.
    2. 전두환과 비슷한 용모의 주 미얀마 한국 대사 or 비서실장이 태극기가 휘날리는 차를 타고 먼저 도착함 + 경호실장 or 처장의 시범연주 지시로 나팔소리가 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려 버렸다.

위 두 가지 기막힌 상황들이 우연스럽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테러범이었던 강민철이 동료 죄수에게 해 준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전두환이 늦게 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서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폭탄이 미리 터졌다고 한다. 혹시 전파로 조종하던 폭탄이 현장에 있던 경호실/국정원 등의 무전기의 전파로 인해 간섭받은 것 아닌가란 추정도 있는데 자신들은 실수한 적이 없으니 북한은 우리를 탓하면 안 된다는 면피성 발언일 수도 있다.[32]

노신영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미군과의 연계를 통하여 항로를 변경하는 예리한 판단, 즉 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스케줄이 미루어져서[33] 전두환의 목숨을 구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원래는 전날 도착하여 바로 아웅 산 묘소에 오후 4시쯤 참배할 예정이었지만 항로가 변경되는 바람에 한 시간이 늦어져 아웅 산 묘소에 가면 오후 5시로 어두워지는 시간이라 너무 컴컴하다고 하여 도착 다음날 참배하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만약 일정대로 전날 참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미얀마 외부장관의 타이어 펑크도 없을 것이고 날이 금방 어두워져 공작원들의 탈출도 용이했을 것이지만 항로 변경으로 미루어진 스케줄로도 전두환은 죽을 뻔했다.

테러의 배후였던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을 부정하기 위해 이 항로수정안을 가지고 노신영과 장세동이 계획한 전두환 암살 작전의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늘 같이 다녔기 때문에 묘소 방문 일정이 그대로 굴러갔으면 전두환과 손잡고 같이 훅 갈 운명이었다. 게다가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 노신영은 외교관 출신이기 때문에 접점이 없어 둘이 힘을 모아 무슨 일을 꾸밀 확률은 매우 낮았고 전두환 정권 후반기에는 아예 권력 때문에 다투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가안전기획부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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