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영국과 러시아간 그레이트 게임이 과장된 이유 - 크림전쟁 이후 알렉산드르 2세는 영국의 최신 전함을 영국 허락 하에 구매했고, 제2차 아편 전쟁 (1856-1860) 결과로 중국 연해주를 거저 먹는다; 알렉산드르 2세를 통해 보는 베어링 vs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vs 러시아의 대립사;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이유 (1) 러시아 바쿠유전 일대 석유망 동결 통해 전세계 유가 인상 (2) 베어링 영국은행 계좌 운용하던 짜르 정부 붕괴 (3) 폴란드, 러시아에서 유태인 탄압하던 짜르 정부 붕괴 (4) 공산주의 발흥과 제2차 세계대전 준비용 (5) 러시아 공산주의 통해 사회주의 병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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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이 단순히 일본과 러시아의 싸움이 아니었음을 밝히는 국제 정세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파헤칩니다. 이 콘텐츠는 100년간 이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이 어떻게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 자본이 일본의 승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배경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강대국들의 이합집산과 실용 외교가 어떻게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는지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국제 정세를 읽는 통찰력을 얻고 미래 전략을 고민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러일 전쟁의 역사적 중요성과 2024년의 의미러일 전쟁의 결과와 한반도에 미친 영향
러일 전쟁은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쟁 중 하나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 후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1945년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면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2024년의 역사적 의미
을사늑약 120주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2024년은 을사늑약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복 80주년: 2024년 8월 15일은 광복 80주년으로, 이는 한 세대(30년)가 세 번 지나가는 시점이다.
이 시점은 일본과의 식민지 경험, 한국 전쟁으로 인한 남북 갈등 등 역사적 경험이 상당 부분 희미해질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일 국교 정상화 65주년: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식민지 배상금은 경부고속도로, 포항 제철 건설 등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러일 전쟁의 중요성: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으므로, 러일 전쟁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러일 전쟁 개요
기간: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약 1년 반 동안 진행되었다.
주요 전장: 한반도, 만주, 요동, 동해 바다였다.
전개: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1905년 5월, 일본이 동해 해전(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며 사실상 전쟁이 종료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의 정의와 중요성
정의: 유라시아 대륙을 놓고 영국과 러시아가 약 100년간 벌인 거대한 지정학적 경쟁이다.
현재와의 연관성: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이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기간: 1813년부터 1907년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의 강대국 부상과 남하 정책
표트르 대제 시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스웨덴 격파: 발트해 지역에서 스웨덴을 격파하며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남하 정책 시작: 스웨덴 격파 후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시작하였다.
페르시아(이란)와의 전쟁: 카스피해 지역까지 지배권을 확장하였다.
오스만 튀르크 약화: 오스만 튀르크는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후 약 200년간 유럽을 위협했으나, 러시아의 남하 정책으로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1771년 이전 오스만 튀르크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장악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지나 동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위협 인식과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
인도에 대한 위협: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 1813년부터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레이트 게임을 시작하였다.
루소포비아(Russophobia): 동로마 제국 멸망 후 200년간 오스만 튀르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 이후 200년간은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루소포비아)이 유럽에 존재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저에도 루소포비아가 존재한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의 부상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 나폴레옹은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으나, 영국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대륙 봉쇄령과 러시아: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하지 못하게 했으나, 러시아는 영국과 식량 무역을 계속하였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점령하러 갔으나, 러시아의 청야 전술(후퇴 전 모든 식량과 집을 태우는 전술)과 겨울 추위로 인해 보급에 실패하고 패배하였다.
러시아군의 파리 점령: 러시아 육군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파리를 점령하였다.
비엔나 체제와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나폴레옹을 이긴 러시아의 힘에 유럽 국가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이는 비엔나 체제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크림 전쟁과 영국의 러시아 견제
크림 전쟁 발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오스만 튀르크와 손잡고 러시아와 크림 전쟁을 벌였다.
나이팅게일의 활약: 크림 전쟁 중 나이팅게일이 부상병 치료로 유명해졌다.
러시아 남하 저지: 영국과 오스만 튀르크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의 이중적 태도와 조선의 개방
제2차 아편 전쟁: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면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청나라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되었다.
조선의 개방과 러시아의 접근: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방되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를 맺었고, 1884년에는 조선이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다.
영국의 검문도 점령: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여 부동항(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에 얼기 때문에 원산, 부산 등 얼지 않는 항구)을 얻을 것을 우려한 영국은 여수 밑의 검문도를 점령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의 영향: 비록 영국군이 검문도에서 철수했지만, 그레이트 게임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국제 정세의 구조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 입장에서 러시아는 **‘돈을 빌려주기 힘든 나라’**였습니다.
로스차일드는 1820~40년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철도 채권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는데,
러시아만큼은 군사 채권조차 국제시장에서 발행하지 않고,
특히 철도 채권은 철저히 국내화했습니다.
로스차일드의 불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입니다.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정책(농노해방, 지방자치제)이 가시화되자,
로스차일드 파리 지점은 러시아 철도 자본 개방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러시아 재무부는 **“국가 전략망은 외국자본에 절대 개방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로스차일드는 러시아 대신 오스만 제국·이집트 철도에 집중 투자하게 됩니다.
[출처] 계몽군주 알렉산드르2세 암살 이전 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대인 금융가 정리;스티글리츠, 폴리아코프, 자크, 크로넨베르크, 에프루시; 국제시장경제사론 169;국제유통자본 411|작성자 인드라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계몽군주’로 평가받으며, 농노해방(1861), 지방자치제(Zemstvo) 등 국가 회로의 내부 재구조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는 철도·국채를 철저히 국내 자본 중심으로만 운영했고,
로스차일드·베어링 등 국제금융세력을 제도적으로 배제했습니다.
1870년대 말, 로스차일드 파리 지점이 러시아 철도채권 시장 개방을 요구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전략적 기간산업은 외국자본 금지"**를 천명했습니다.
[출처] 계몽군주 알렉산드르2세 암살 이전 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대인 금융가 정리;스티글리츠, 폴리아코프, 자크, 크로넨베르크, 에프루시; 국제시장경제사론 169;국제유통자본 411|작성자 인드라
러시아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친프리메이슨 입장이었습니다. 왕 자신이 프리메이슨이 아니었지만, 최측근 인사가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프리메이슨 최측근 인사 조언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러시아 개혁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 농노 개혁에 대해, 휘그-맑스주의적 입장이 비판적이지만, 오늘날 평가로는, 알렉산드르 2세 농노 개혁이 오히려 러시아 쿠데타를 일으킨, 레닌-트로츠키-스탈린 농민 정책보다 더 개혁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당대 소련은, 특히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농민 학살을 통해서 보듯, 오히려 역사의 반동으로써, 러시아 농민 정책을 1850년대로 후퇴시켰다는 지적입니다.
셋, 알래스카 매입 중재자가 사실상 로스차일드 가문입니다. 흡사 루이지애나 매각 당시 미국과 프랑스를 중재한 베어링 가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전부터 러시아는 호프, 베어링, 로스차일드 등으로 부터 채무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호프 가문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베어링 가문도 1850년대 이르러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특히 전임 황제가 일으킨 크림 전쟁 패배로 인하여 후임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가 막대한 채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 채무 상당 부분의 채권자가 로스차일드 가문입니다. 러시아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1857년 등 처음에는 알래스카를 영국에 판매하고자 하였습니다.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와 영국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함대를 영국 회사에 요청하여 구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헌데, 베어링 계열 프리메이슨 파머스턴이 거부합니다. 이유가 수입보다 더 많은 재정 지출을 걱정한 것입니다. 이후,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으로 시선을 돌렸고, 미국에 먼저 알래스카 판매를 의뢰한 것입니다.러시아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크림 전쟁 패배로 인해, 철도 산업에 매우 긍정적이었음에도, 여전히 러시아 국내 자본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철도 산업 정책을 고수하였습니다.
또한, 당대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가 북부를 비공식적으로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프루시 러시아 우크라이나 곡물 재벌, 폴란드계 유대인 에프루시 가문이 남부 채권에 참가한 배경이 무엇입니까?
) 알렉산드르 2세와 북부 지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공식적으로는 중립이었으나,
남부 노예제 반대 및 연방 보존이라는 이념에서 북부를 비공식적으로 지지.
1863년에는 러시아 해군 함대를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파견,
북부에 대한 사실상의 정치적 지지 신호를 보냄.
러시아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매입한 최신 전열함대를 미국에 파견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 일반적으로 휘그-맑스주의적 역사 관점에서, 러시아 황제이자 계몽 군주 알렉산드르 2세 업적을 폄하합니다. 가령, 알래스카 매각에서도 고스란히 휘그-맑스주의적 역사 해석이 지나치게 파쇼적이라는 것이 인드라 비판입니다. 계몽 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당할 때조차 러시아 인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종대왕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고, 전임 황제가 일으킨 크림 전쟁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대안을 제시합니다. A. 영국으로부터의 최신 함대 구매가 예입니다. 러시아가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해군력 열세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B. 철도 산업에 대한 각별한 애착입니다. 육상 물류에서 철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한 것입니다. 예서, 흥미로운 건,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러시아 모델로 철도 부설을 추진한 셈입니다. 오스트리아가 메테르니히 - 오스트리아 로스차일드 체제로 세계 최초 철도 산업을 일으켰다면,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는 프러시아처럼 가급적 국내 자본으로 철도 산업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실제로 알래스카 매매 자금 을 채권자 로스차일드 가문 등에 대한 빚 대금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철도 투자 등 국내 자금 등에도 절반 가까이 썼습니다. 이것이 기존 휘그-맑스주의적 역사 관점의 오류인 것입니다. 마치 계몽 군주 알렉산드르 2세가 멍청하다, ㅄ이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례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대 미국 국무부 장관 수어드에 대한 평가와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폴레옹 황제와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각에 대해서 최소한 같은 관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계 정보부 기원인 영국 정보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영국의 안보기관은 두 가지로 나뉘어 국내 안보는 MI5의 관할이며 해외에 관한 것은 MI6가 담당해 왔다. 정식명칭이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인 MI6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 해당하는 영국의 대외정보기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MI6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영국의 정보기관은 위에 설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I세 여왕 밑에서 사재를 출연해 해외정보망을 구축하였던 웰싱햄경에서 출발한다. 이후 크림전쟁 이후 지형통계국, 1873년에 정보국을 창설하였다. 1916년 군사정보국은 국내과 MI5, 국외과 MI6로 개편되었으며 이후 MI5는 보안국의 명칭을, MI6는 비밀정보국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차 대전시 군사암호 해독을 담당하는 부서를 개편하여 GCHQ라는 정부통신본부를 만들었는데 미국의 NSA와 협력하여 전세계 통신망 감청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873년 정보국 창설에 주목하길 바랍니다.
1873년은 대공황이 있던 해이며,
노벨 형제가 바쿠 유전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가 승인하던 해입니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으킨 세포이 항쟁 여파로
동인도회사가 1850년대부터 청산 절차를 밟다가
[출처] 영국 정보부가 러시아 정보국 오흐라나 실제 주인이자, 러시아 혁명 이후 체카 실제 주인이다 ; 러시아는 한번도 소비에트 국가인 적이 없었다; 한국 국정원은 시작부터 빅터 로스차일드계 김종필과 친일반한 쪽바리 이후락 이중권력이었다;케렌스키=고르바쵸프, 레닌,트로츠키 =옐친, 스탈린=푸틴|작성자 인드라
흥미롭게도 러시아 정보국인 일명 오흐라나는,
러시아 링컨,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던 1881년에 창설됩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이후,
러시아는 노벨 유조선 사업에 필요했던 프랑스 로스차일드 자본을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러불동맹을 맺기까지 합니다.
하고, 프랑스 로스차일드 자본으로 석유사업을 하고, 철도를 놓았던 것입니다.
철도 전문가 세르게이 비테라는 인물이 로스차일드와 인연을 맺고,
러시아 재정을 책임집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흐라나 조직이 어찌 변했을 것인지 쉽게 유추가 가능할 것입니다.
[출처] 영국 정보부가 러시아 정보국 오흐라나 실제 주인이자, 러시아 혁명 이후 체카 실제 주인이다 ; 러시아는 한번도 소비에트 국가인 적이 없었다; 한국 국정원은 시작부터 빅터 로스차일드계 김종필과 친일반한 쪽바리 이후락 이중권력이었다;케렌스키=고르바쵸프, 레닌,트로츠키 =옐친, 스탈린=푸틴|작성자 인드라
만일 베어링형제 가문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배후라면
노벨 회사에 투자한 회사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니라
베어링형제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300인위원회 정치 외교 성과입니다.
후일 비스마르크가 물러나면서
독일 - 러시아 동맹 관계가 끝났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스차일드 자본이 물밀듯이 러시아를 침공한 것입니다.
[출처] 러시아 혁명은 바쿠유전, 러시아 국력 소모(이차세계대전준비용), 사회주의 병쉰 만들기 국유본 일타삼피입니다; 인드라 쪽발타도해방투쟁론,안젤리카 발라나노프,알렉산드르 2세,비테,노벨,레닌,트로츠키,버트런트 러셀 반전운동 뻘짓하기^^! , 로스차일드는 이미 러시아혁명 전에 석유시장을 장악했었다 |작성자 인드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러시아는 로스차일드 가문 자금으로
세르게이 비테와 스톨리핀 쌍두마차로
러시아 자본주의화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중 바쿠 유전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가 있었습니다.
하면,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왜 일어났고, 왜 실패했던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300인위원회 비주류 혹은 극단주의 세력(?)인
프리메이슨 - 베어링형제 가문이
위서 시온의정서 유출을 시도한 결과라고
인드라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로스차일드 가문도 동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했다면,
1905년 러시아 혁명 혹은 쿠데타가 성공했을 것입니다.
300인 위원회 주류가 기획한 것이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해서, 인드라가 정리한 것입니다.
300인위원회가 필요 조건이요,
로스차일드 가문이 충분 조건이다.
좀 더 큰 판이 필요했나요?
1차 세계대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출처] 러시아 혁명은 바쿠유전, 러시아 국력 소모(이차세계대전준비용), 사회주의 병쉰 만들기 국유본 일타삼피입니다; 인드라 쪽발타도해방투쟁론,안젤리카 발라나노프,알렉산드르 2세,비테,노벨,레닌,트로츠키,버트런트 러셀 반전운동 뻘짓하기^^! , 로스차일드는 이미 러시아혁명 전에 석유시장을 장악했었다 |작성자 인드라
레닌이 독일 정부가 마련한 열차 타고 가고,
트로츠키가 미국 록펠러 집에서 지내다가 자금 지원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간 이야기는 너무 유명합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록펠러 스탠다드 오일 회사가
유일 외국회사로 들어섰다는 것도 말할 것 없습니다.
[출처] 러시아 혁명은 바쿠유전, 러시아 국력 소모(이차세계대전준비용), 사회주의 병쉰 만들기 국유본 일타삼피입니다; 인드라 쪽발타도해방투쟁론,안젤리카 발라나노프,알렉산드르 2세,비테,노벨,레닌,트로츠키,버트런트 러셀 반전운동 뻘짓하기^^! , 로스차일드는 이미 러시아혁명 전에 석유시장을 장악했었다 |작성자 인드라
베어링형제 가문은 전임 황제에 이어 러시아 프리메이슨 인맥으로 알렉산드르 2세 때에도
러시아와 거래합니다.
핵심은, 알렉산드르 2세 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러시아에 투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주요 국가에서 금융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미국 등등.
300인 위원회 주류와 로스차일드 가문이
알렉산드르 2세를 얼마나 없애버리고 싶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으킨 1873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경제 위기에 대처하고자 외국인 바쿠 유전 개발 투자를 허용합니다.
이에 스웨덴 노벨 형제가 1873년 바쿠 유전을 개발해서 대박이 납니다.
노벨 형제는 러시아에서 크림전쟁 때도 러시아군에 군수품을 납품합니다.
허나, 니콜라이 1세에 이어 취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베어링형제가문과는 인연을 지속시키면서
군수품 납품 계약을 파기해서
노벨 형제가 파산하고 맙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노벨 형제를 의심했던 것일까요?
스웨덴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리메이슨이 왕이 되어서
노벨 형제가 프리메이슨이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파산한 임마누엘 노벨이 스웨덴으로 돌아와 니트로글리세린을 개발해서 초대박나는 동안
다른 노벨 형제들이 러시아에 계속 남아 바쿠 유전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보불전쟁 영향과 대공황 여파로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가 바쿠 유전 개발을 승인합니다.
[출처] 러시아 혁명은 바쿠유전, 러시아 국력 소모(이차세계대전준비용), 사회주의 병쉰 만들기 국유본 일타삼피입니다; 인드라 쪽발타도해방투쟁론,안젤리카 발라나노프,알렉산드르 2세,비테,노벨,레닌,트로츠키,버트런트 러셀 반전운동 뻘짓하기^^! , 로스차일드는 이미 러시아혁명 전에 석유시장을 장악했었다 |작성자 인드라
포츠머스 강화 조약 (1905년)
중재자: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미국이 중재하여 러시아와 일본이 강화 조약을 맺었다.
배상금: 러시아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이는 청일 전쟁 때 청나라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를 할양한 것과 대조적이며,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남사할린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장춘과 뤼순 철도를 일본에 양도하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강화 조약 직전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일본은 조선 지배권을 상호 묵인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강대국의 외교 방식: 강대국은 도덕보다는 힘과 실용주의에 기반한 외교를 펼치며, 약소국은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다.
강대국의 실용 외교
이합집산: 강대국들은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실용 외교를 펼친다.
국가 이익 기반 외교: 이념에 매몰된 외교보다는 국가 이익에 기반한 실용 외교가 중요하다.
역사적 흐름: 이러한 강대국의 외교 방식은 수천 년 인류 역사의 흐름이다.
영국-러시아 관계 변화와 독일의 부상
그레이트 게임 종식: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우호 조약을 맺으며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하였다.
독일의 위협: 독일 빌헬름 2세의 세계 전략 추진으로 독일의 국력이 막강해지고 GDP가 영국을 추월하며 해군력까지 강화되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대신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삼국 협상: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삼국 협상을 맺었고, 일본 또한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과 1차 세계 대전을 치렀다.
이는 강대국들의 이합집산이 얼마나 빠르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러일 전쟁의 영향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일본 경제의 폭발적 성장: 1차 세계 대전 중 영국과 프랑스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여 일본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채권국으로 전환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붕괴: 무기력한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하고 러시아 공산 혁명이 발발하였다.
한반도 분단: 러일 전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면서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러일 전쟁은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쟁 중 하나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할
유대 금융 자본: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의 유명한 유대 금융 자본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성공: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이 승리할 것을 미리 알고 국채를 매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 지원: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일 전쟁 당시 일본에 자금을 지원하여 일본 국채 발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본을 지원한 배경에는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가 있었다.
폴란드 분할: 러시아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여 120년간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폴란드에는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 러시아는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에 유대인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으로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발생하였다.
유대 민족주의의 부상: 이 박해로 인해 러시아 유대인들은 러시아인이 아닌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1890년대부터 민족 국가 건설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건국 지원: 러시아 유대인들이 정치적 주도를,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제적 지원을 하여 오늘날 이스라엘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의 많은 유대인들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이다.
일본 지원의 목적: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였고, 일본은 이 자금으로 영국 군함을 구매하여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려 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본을 지원한 결과였다.
4.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변화 (1881~)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알렉산드르 3세 시기에는 상황이 급변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급격한 산업화 자금 조달을 위해 프랑스 금융시장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로스차일드 파리 지점이 러시아 국채와 철도 채권을 대규모 인수하게 되고,
이는 1890년대 **프랑스-러시아 동맹(Franco-Russian Alliance)**으로 이어집니다.
즉, 1881년 이전까지는 완전 배제였으나, 암살 이후에는 러시아가 국제금융에 편입되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이는 **ρ(국가 회로 재구조화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자,
러시아가 더 이상 국내 자본만으로 산업화 지속이 불가능했음을 의미합니다.
[출처] 계몽군주 알렉산드르2세 암살 이전 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대인 금융가 정리;스티글리츠, 폴리아코프, 자크, 크로넨베르크, 에프루시; 국제시장경제사론 169;국제유통자본 411|작성자 인드라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전까지 러시아는 국내 채권, 특히 철도 채권 등을 로스차일드나 베어링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특히 불만이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런 이유로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음모론이 있습니다.
[출처] 계몽군주 알렉산드르2세 암살 이전 19세기 러시아에서 활동한 유대인 금융가 정리;스티글리츠, 폴리아코프, 자크, 크로넨베르크, 에프루시; 국제시장경제사론 169;국제유통자본 411|작성자 인드라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 왕실 금고지기 역할을 맡았던 호프 가문이 쇠퇴하고, 그 자리를 베어링 가문이 맡습니다. 다만, 베어링 가문 역할은, 계몽 군주 알렉산드르 2세까지 러시아 왕실 해외 국채 발행 및 관리에 있었고, 베어링 가문조차 러시아 국내에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ChatGPT의 말:
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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