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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도 극찬했던 성북동의 대양역사관 (스티븐 홀이 설계) - 일부는 주택으로 이용 됨; 소유주는 대양상선 회장 정유근으로 1993년 48세 나이에 창업해 중국의 원자재 수요 폭발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해운업 매출이 폭등; 한국 부자순위 282위로, 재산 1240억 이상 보유

  

https://blog.naver.com/ywpark5293/221799117593

 https://www.ohseoul.org/post/%EB%8C%80%EC%96%91-%EC%97%AD%EC%82%AC%EA%B4%80/page/35/openhouse-seoul-bag-badg-set/page#:~:text=%EA%B1%B4%EC%B6%95%EC%A3%BC%EC%99%80%20%EC%82%B6%EC%97%90%20%EB%8C%80%ED%95%9C%20%EB%AC%B8%ED%99%94%EC%A0%81%20%EC%A0%95%EC%B2%B4%EC%84%B1%EC%9D%84%20%EA%B3%B5%EC%9C%A0%ED%95%98%EC%A7%80%20%EB%AA%BB%ED%95%9C,%EC%84%A0%EC%A0%95%EB%90%98%EC%97%88%EC%9D%84%20%EB%95%8C%2C%20%EC%9D%B4%EB%9E%98%EA%B1%B4%EC%B6%95%EC%9D%80%20%EC%83%9D%ED%99%9C%EB%B0%A9%EC%8B%9D%EC%9D%98%20%EA%B7%BC%EC%9B%90%EC%A0%81%20%EC%B0%A8%EC%9D%B4%EA%B0%80%20%ED%91%9C%EB%A9%B4%ED%99%94%EB%90%98%EC%96%B4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4787.html

‘빈손 창업’ 위기 헤치니 대기업 샛별로 

외환위기 이후 불어닥친 기업 구조조정과 중국 특수 바람을 타고 신흥 재벌들이 떠오르고 있다. 대기업 말단 사원에서부터 건설사 직원,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들은 거의 빈손으로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대양상선 정유근사장
항만청 외항과장 출신
10년 내다본 물길 개척
중국 원자재 수송 대박

대양상선=해운항만청 외항과장 출신인 정유근(58) 사장이 직장을 나와 대양상선을 차린 것은 1993년이다. 단돈 1억원으로 세운 회사는 6천~7천톤짜리 배를 빌려 비료를 나르는 작은 기업이었다. 96년 7만톤짜리 파나맥스급 선박을 사들여 중국의 석탄을 수송하면서 비로소 해운회사의 면모를 갖춘다. 그러나 비약적 발전을 이뤄낸 것은 최근 2년이다. 2001년 1천억원이던 매출이 2004년 9461억원으로 늘어나면서 3년 만에 10배 가까이 성장했다. 대양의 성공비결은 중국의 원자재 수요가 해운시장의 폭발을 가져오리란 정확한 예측이었다. 대양은 중국에서 고로 등 제철소 설비 주문이 급증하는 것을 미리 알고 2003년 초 40여척의 벌크선을 싼값에 빌렸다. 당시 용선료는 7만5천톤급이 1만2500달러였다. 그러나 중국의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용선료는 4만달러로 치솟았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지금은 중국 다롄에 수리조선소를 건립 중이다. 동북아 지역에 수리조선소가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중국 특수의 수혜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니라 10여년에 걸쳐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공을 들인 결과”라며 “세계적 해운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주그룹 허재호회장
구조조정 뒤 현금 확보
덩치 큰 기업 할값 인수
‘고래’ 삼킨 ‘새우’ 급성장

대주그룹= 체신부 공무원과 건설회사 출신인 허재호(64) 회장이 지난 81년 창업한 대주건설 역시 처음에는 광주의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97년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다. 허 회장은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즉각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현금 보유액을 늘렸다. 불과 6~7개월 뒤 외환위기가 터졌다. 다른 건설사들이 줄줄이 쓰러질 때 대주는 확보한 현금으로 1년여를 버텨냈고, 99년부터 경기가 풀리자 공격경영에 나섰다. 2000년 두림제지를 인수했고, 2001년에는 자신보다 덩치가 몇배 큰 대한화재까지 손에 넣었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 꼴이다. 뒤이어 불어닥친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회사는 급성장했다. 2003년 광주일보와 에이치앤에이치레저(다이너스티 골프클럽), 2004년 대한조선까지 인수했다. 남보다 앞서 구조조정을 한 덕분에 기업들을 손쉽게 인수할 수 있었다. 계열사는 10개로 늘었고 2000년 3천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1조9천억원까지 불어났다. 사업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해남 화원반도에 5만톤급 중형 조선소 건립을 추진 중이며, 중국과 베트남에 시멘트 공장과 조선소를 건립할 계획이다. 또 1조5천억원 규모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대우건설과 인터내셔날까지 인수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STX그룹 강덕수회장
되찾은 쌍용중 발판
조선·해운업 적극 인수
도약 날갯짓

에스티엑스그룹= 에스티엑스는 전문경영인이 재벌그룹의 부실 계열사를 인수해 성공한 특별한 경우다. 에스티엑스그룹의 전신은 쌍용중공업이다. 강덕수(55) 회장은 지난 2000년 경영 부실로 쌍용중공업이 한누리컨소시엄에 매각될 당시 이 회사 전무였다. 경영권이 넘어간 뒤 대표이사가 된 강 회장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정상화시키고 불과 1년여 만에 경영권을 되찾아 오는 데 성공했다. 강 회장은 당시 한누리컨소시엄이 철수한 에스티엑스의 주식을 꾸준히 사들이면서 최대주주로 올라선다.

회사 이름도 에스티엑스(System Technology eXcellence)로 바꾸고 적극적인 기업 인수에 나서면서 도약의 기회를 잡는다. 결정적 발판이 된 것은 2001년 10월 대동조선(에스티엑스조선)의 인수였다. 조선 경기가 호황으로 돌아서면서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가 2001년 84억원, 2002년 436억원의 흑자를 냈다. 2002년에는 에스티엑스에너지를 설립하고 2004년에는 범양상선을 인수해 에스티엑스팬오션으로 이름을 바꿨다. 에스티엑스 역시 중국 특수로 인한 조선과 해운의 호황으로 급성장한 사례다. 2000년 쌍용중공업 시절 2605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계열사가 9개로 늘어나면서 지난해 4조7천억원까지 올라갔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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