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베어링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지원해서 최대한 전쟁을 오래 끌려고 했다 -면직물 주요 납품처가 군대였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필요했고, 그 최대 공급처는 베어링 가문이었다; 베어링은 이 시기 프랑스로 밀수했지만, 로스차일드는 유통을 해보려다 큰 손실을 입었다; 1800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중앙은행 설립에 관여한건 호프 가문과 베어링 가문; 1802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프리메이슨이 된 것은 인맥관리용 - 코헨 가문과 결혼한 것도 도제 수업을 받기 위함; 1803년 루이지애나 매각 대금이 베어링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들어왔다; 1807년 스코틀랜드 롯지를 부추겨 영국의 노예무역 금지를 통해 영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는 자유주의자 나폴레옹의 '역린'을 건드려 식민지 팽창전쟁 대신 유럽대륙 전쟁에만 몰두하게 했다) - 프랑스 대동방 랏지가 스코틀랜드 의식을 채택했던 것은 베어링을 지지했다는 뜻; 스코틀랜드 의식이란 솔로몬 의식인데,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주장에 따르면, 이에 대한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6% 이자율 붙여 미국 국채 독점판매했던 베어링; 1810년 러시아가 대륙봉쇄령 파기한 것은 베어링 가문-나폴레옹 간 은밀한 동맹에 파열음이 난 것; 1813년 유나이티드 그랜드 롯지 오브 잉글랜드 (UGLE) 통합은 모던파+고전파 통합시킨 베어링의 작품; 1815년 2월의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도 베어링의 후원으로?; 나폴레옹 전쟁 끝나고, 대량 납품처가 사라진 영국에서 농업공황이 온다 - 이 때 베어링이 찾은 대안이 미국 남부 노예 노동을 통한 면직물 무역; 카자르 유태인은 19세기에 가서야 유럽에 진입했고 아슈케나짐이나 세파르딤과 서로 다른 유대교 전통으로 시나고그를 따로 운영했다; 1823년 영국 영란은행 회의록에 등장한 네이선 로스차일드; 1820년대 베어링 가문은 친프랑스 스페인어권 프리메이슨 독립운동 세력을 남미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페루)에서 지원했고 (프리메이슨 볼리바르가 대표적 예), 로스차일드는 브라질 페드루 왕자 등 그 반대세력을 지원; 1825년 공황은 로스차일드의 농간에 의해 베어링이 패배한 사건

인드라: 베어링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지원해서 최대한 전쟁을 오래 끌려고 했다 -면직물 주요 납품처가 군대였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필요했고, 그 최대 공급처는 베어링 가문이었다; 베어링은 이 시기 프랑스로 밀수했지만, 로스차일드는 유통을 해보려다 큰 손실을 입었다; 1800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중앙은행 설립에 관여한건 호프 가문과 베어링 가문; 1802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프리메이슨이 된 것은 인맥관리용 - 코헨 가문과 결혼한 것도 도제 수업을 받기 위함; 1803년 루이지애나 매각 대금이 베어링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들어왔다; 1807년 스코틀랜드 롯지를 부추겨 영국의 노예무역 금지를 통해 영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는 자유주의자 나폴레옹의 '역린'을 건드려 식민지 팽창전쟁 대신 유럽대륙 전쟁에만 몰두하게 했다) - 프랑스 대동방 랏지가 스코틀랜드 의식을 채택했던 것은 베어링을 지지했다는 뜻; 스코틀랜드 의식이란 솔로몬 의식인데,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주장에 따르면, 이에 대한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6% 이자율 붙여 미국 국채 독점판매했던 베어링; 1810년 러시아가 대륙봉쇄령 파기한 것은 베어링 가문-나폴레옹 간 은밀한 동맹에 파열음이 난 것; 1813년 유나이티드 그랜드 롯지 오브 잉글랜드 (UGLE) 통합은 모던파+고전파 통합시킨 베어링의 작품; 1815년 2월의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도 베어링의 후원으로?; 나폴레옹 전쟁 끝나고, 대량 납품처가 사라진 영국에서 농업공황이 온다 - 이 때 베어링이 찾은 대안이 미국 남부 노예 노동을 통한 면직물 무역; 카자르 유태인은 19세기에 가서야 유럽에 진입했고 아슈케나짐이나 세파르딤과 서로 다른 유대교 전통으로 시나고그를 따로 운영했다; 1823년 영국 영란은행 회의록에 등장한 네이선 로스차일드; 1820년대 베어링 가문은 친프랑스 스페인어권 프리메이슨 독립운동 세력을 남미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페루)에서 지원했고 (프리메이슨 볼리바르가 대표적 예), 로스차일드는 브라질 페드루 왕자 등 그 반대세력을 지원; 1825년 공황은 로스차일드의 농간에 의해 베어링이 패배한 사건

































1825년 공황(Panic of 1825)은 주로 영국에서 발생한 금융 위기로, 당시 세계 최초의 근대적 금융위기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 공황은 과도한 투기, 특히 라틴아메리카(신생 독립국들)에 대한 투자 버블이 터지면서 촉발되었으며, 수많은 은행과 금융 기관들이 도산하거나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베어링스 은행 (Barings Bank) 도 이 공황에서 손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1. 라틴아메리카 채권에 대한 과도한 투자

  • 베어링스 은행은 남미 국가들(예: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이 독립한 이후, 이들 신생국가의 채권 발행을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매입했습니다.

  • 특히 페루의 채권 발행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 이들 국가들은 신생국으로서 재정 기반이 불안정했으며, 정치적 혼란이 심각했습니다.


2. 페루 광산 투자와 관련된 손해

  • 베어링은 페루 은광 투자와 관련된 금융상품을 다루면서 막대한 자금을 잃었습니다.

  • 해당 사업은 과장된 기대와 허위 정보에 기반한 투자였으며, 실제로는 수익을 거의 내지 못했습니다.


3. 유동성 위기

  • 채권 가치가 폭락하고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베어링스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을 겪었습니다.

  • 당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개입과 다른 민간 은행들의 도움으로 파산은 면했지만, 회사 신뢰도는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 요약: 베어링스의 손해

  • 막대한 채권 투자 손실

  • 페루 광산 관련 투자 실패

  • 유동성 위기

  • 평판 손상


이 공황 이후, 베어링스는 투자 심사 기준을 강화하고, 한동안 신흥국 채권 시장에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95년에도 베어링스는 또 다른 투자 실패(닉 리슨 사건)로 결국 파산하게 됩니다.




C. 인드라 평가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사실상 중남미 국채 붐을 일으킨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23년 영국 영란은행 회의록에 등장할 만큼,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금융 시장의 갑이었습니다. 베어링 가문 제휴 세력인 호프 가문과의 연대도 구축할 정도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인드라 관점상, 1820년대 중남미 국채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베어링 가문의 스페인어권 투자에 맞서, 오직 포르투갈어 브라질 투자만 합니다. 여기서, 브라질 투자 정당성을 금 투자에서 찾는데, 이는 베어링의 스페인어권 은 투자와 명확한 대비가 됩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은보다 금이 아니야?라고 하겠지만, 당대는 아니었습니다. 실물 자산 가치로, 금과 은보다 영국 국채였습니다. 이는,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직후 빈 체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지급 보증력'은, 단지 금이 많다거나, 영국 국채이거나가, 아닙니다. 78% 금융 경제력이지만, 22% 정치 종교력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지급 보증력'은 당대 영국 중심 평균이므로, 여타 유럽 제국과 제 3세계에서는 78% 이상이었을 것이며, 영국 제국만 국한한다면, 당대 영국 귀족 베어링 가문 견제로 최소 51% 이상 최대 55% 수준이었을 뿐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프리메이슨 롯지(Freemason Lodges)**가 노예무역을 금지한 연도에 대한 구체적인 공식 기록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련된 역사적 맥락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드릴게요:


🔎 1. 스코틀랜드와 노예무역

  • 스코틀랜드는 영국 전체의 노예무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지역 중 하나입니다.

  • 18세기에는 스코틀랜드 상인, 은행가, 지식인 등이 **서인도 제도(카리브 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투자하거나 관련 산업으로 이득을 봤습니다.


🔎 2. 노예무역 폐지 연도 (영국 전체 기준)

  • 1807년: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 금지법(Slave Trade Act) 통과
    → 대영제국 내 노예무역 자체 금지 (노예 자체는 여전히 허용)

  • 1833년: 노예제도 자체 폐지 (Slavery Abolition Act)
    → 영국령 전역에서 법적으로 노예 해방


🔎 3. 프리메이슨과 노예무역 금지

  • 프리메이슨 단체(롯지)는 공식적으로 인종 차별을 금지하거나 노예제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낸 경우도 있었지만,
    스코틀랜드 롯지 전체가 특정 연도에 노예무역을 금지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일부 개별 롯지 또는 구성원이 노예제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졌던 경우는 있었고, 이와 관련된 논문이나 자료가 연구되고는 있지만,
    제도적 혹은 공식적 금지 시점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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