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과 하멜 표류기, 그리고 박연 / 하멜 일행을 괴물로 여겼던 조선인들 / 하멜 일행을 측은하게 느껴 잘해주었던 승려들 /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며 하멜 일행에게 탈출을 종용했던 전라 좌수사 이도빈 / 메마른 내용들로 가득한 표류기의 내용들 중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은 아마도 조선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있던 하멜 일행에게 정부가 떠나라고 재촉했기 때문으로 추정 됨 / 하멜 일행 중 최연소였던 아이는 네덜란드보다 조선에 산 시간이 더 길었고, 네덜란드 언어를 다 까먹어서 네덜란드 귀국 후 다시 네덜란드어를 공부해야했다 / 조선에게 네덜란드를 일본의 속국으로 묘사하고, 네덜란드에게 조선과의 무역을 하면 관계를 끊겠다고 하여, 중계무역에서의 실리를 계속 취하려고 했던 에도막부 / 극한직업이었던, 막장인새들의 집결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하멜보다 30여년 앞서 조선에 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벼슬도 받으며, 완전히 정착했던 박연 - 하멜 표류기에서는 오로지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윤행임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하멜로서는 표류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서 만난 '이역만리에 사는 네덜란드 사람' 정도였겠지만 벨테브레이로서는 수십 년 만에 만난 동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 박연은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영영 고향을 볼 수 없게 된 그리움은 컸던 모양인지,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인조에게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서기관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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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출생
사망
1692년 2월 12일 (향년 61세)
국적
직업
서기, 선원
조선 이름
남하면

1. 개요2. 생애
2.1. 조선에서의 삶2.2. 《하멜 표류기2.3. 조선과 일본의 외교 분쟁
3. 대중매체에서4.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헨드릭 하멜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이다.

1653년(조선 효종 4년)부터 1666년(조선 현종 7년)까지 조선에 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라는 책을 써낸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하멜'로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어로는 '하멀'에 가깝다.

2. 생애[편집]

2.1. 조선에서의 삶[편집]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市長)이었으며, 300휠던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

고향 호린험(Gorinchem)[1]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후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입사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 기준,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주식회사개념을 만든 곳이었다.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Sperwer, 네덜란드어로 '새매')에서 회계 및 서무(Bookkeeper)로 일하며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했고, 제주도에서 몇개월간 억류되었다. 이때 머무른 폐주 광해군유배되었던 집이라고 한다.[2] 당시 제주목사(155대)[3]이자 하멜의 일을 처리한 이는 태호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인데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자 성호 이익의 당숙되는 사람으로, 그가 제주목사 시절 저술한 《탐라지》는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 1621~?)과 판관(判官) 노정(盧錠)[4]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 · 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7,000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키리시탄(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5]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제주목사 이원진의 치계(馳啓),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8월 6일 무진 2번째기사

조정에서는 이들을 한성으로 올려 보내도록 명령했다. 실록에는 "그들 중에는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잠시 제주에 머물던 하멜은 일행들과 함께 수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가 기나긴 억류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들보다 먼저 조선에 표류해 아예 조선에 정착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가 이들의 통역으로 오게 되어 만남을 가졌다. 박연은 오랫동안 조선에 머문지라 네덜란드어가 상당히 서툴렀고, 다시 능숙히 네덜란드어를 구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멜과 일행은 송환 의사를 박연에게 전달했으나 박연은
"한번 여기 들어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라"

라는 절망적인 답을 해줬다. 하멜은 효종에게도 일본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결국 기각되어 훈련도감에 소속되었다.

이게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쇄국정책에 따라 억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 시대에는 이방인에게도 예와 체통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표류해 온 외부인은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단적으로 하멜보다 80여 년 전에 표류해 왔던 서양인명나라를 통해 송환한 적이 있고, 정조때는 영국 함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왔을 때 물자와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이들보다 30년 전인 인조 때에 표류해온 같은 네덜란드인 박연도 원래대로라면 명나라에 보내 줬겠지만 당시 명나라의 정세가 혼란하여 명나라로 보내지도 못했고, 일본을 통해 송환하려 했으나 당시 기독교 탄압 중이던 일본 에도 막부는 박연이 키리시탄이라는 이유로 "키리시탄 안 받아요"라고 거부하여[6] 그는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벌이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하멜과 박연의 억류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던 셈이다.

당시 조정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하멜 일행은 군사 기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총을 개량하는 등 조선에서 살게 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기술자들은 표류 과정에서 익사해 다 죽었고, 이들에겐 별다른 기술이 없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과 같이 조선에서 탈출한 일행 중 서양식 배를 만들 수 있는 선박 제조 기술자, 그리고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이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조선 정부가 화포 기술 외엔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국제 정세를 너무 몰랐던 탓이 크다.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기술이야 애초에 바다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 조선이 무슨 관심이 있었겠느냐만.

그리고 하멜은 항해사였다. 처음에 이들을 써먹으려던 조정은 별 수 없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서 효종의 친위대로 썼다. 이는 중앙정부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멜이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알려졌기도 하지만,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한 번뿐이었다. 먼젓번에 있었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중 첫 번째 탈출은 제주도에 표류한 지 얼마 안되어 어부들의 어선을 탈취해 시도한 것인데 하멜은 포함되지 않았었고, 탈출을 시도한 자도 다섯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의 범선과 항해술이나 조종법이 다른 조선 배는 타본 적이 없어 기술 미숙으로 결국 잡히고 말았다. 청나라 사신 일행에게 뛰어드는 일도 하멜은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고, 그가 직접적으로 가담한 탈출 시도는 최후에 일본으로 탈출한 것뿐이다.

다만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이송되던 중에 군졸들이 죄다 배멀미로 골골거리자, 이 맥주병들을 바다에 처넣고 배를 탈취할까?라고 고민했으나 군졸들이 배의 탈취를 걱정하여 하멜 일행을 4척에 배에 나눠 태운 것도 모자라 다리와 팔 하나씩을 나무 기둥에 묶어두어서 포기하였다고.....

하멜 일행은 왕명에 의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멜은 자신이 들른 조선의 고을들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며 그가 상륙한 이 신세계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중에 《하멜표류기》의 기초 자료가 된다. 1개월여 간의 여정 끝에 한양에 도달한 하멜은 효종을 알현했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
라고 기록했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하멜의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신기해했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은 하멜 일행 외에 다른 서양인을 보고는 '면철'(面鐵), 즉 '녹슨 철빛 얼굴'을 가졌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서양인은 붉은 피부를 지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건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괴물 취급받던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을 느낀 사찰의 승려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승려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해 식량을 얻었고,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7]와 포수인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 데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뭐야, 이것들은?" 하고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되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 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다. 먼저 청나라 사신들을 '타르타르'(혹은 타타르)라 적었다. 하멜은 청나라를 이렇게 불렀다. 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비교적 여러 유목민족들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몽골족 등으로 다르게 불렀지만, 유럽은 유목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목민족들을 그냥 싸잡아서 '타타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몽골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렀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유럽인들은 중국이 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또 하멜에 따르면 이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이 불안해했다고 서술했다. 청나라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이 취한 30만 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할까봐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나라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조정에서 청나라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되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33명'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다. 처음에 표류한 사람은 36명인데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고 전라도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파울루스란 사람이 죽어 35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장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다.

조정에서는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 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으니 통역으로 차출하라고 거짓 지시를 내려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사실상의 인질로 삼고, 하멜 일행과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다.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 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이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라 전했을 정도였다.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해놨다.

이 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고 추정된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 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들은 남만인이라 모두 '남(南)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었다. 일행 중에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며 '병영 남씨'라고 해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의령 남씨에 별보로 편입된 상태라는 얘기도 있으며, 남일도 병영 남씨라는 얘기가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처음엔 전라병영에서 7년 가량 지냈다.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는 당시 전라병영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병영성 동문 맞은 편에 하멜 기념관을 지어 역사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멜은 전라병영에 도착한 직후, 성벽과 돌담을 쌓는 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인근 민가에는 이들 일행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스타일의 돌담이 남아있다.[8] 강진군은 매년 4월 중순에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를 개최한다.

그러다가 현종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9]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전라좌수영으로 가게 되었다[10]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李道彬, ? ~ ?)은 네덜란드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 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자주 연회를 베풀며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

고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멜도 그의 말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도빈은 훗날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전라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승려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한다.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승려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네덜란드의 얘기도 듣고 했다고 한다.(출처 <역사저널 그날>, -네덜란드 청년 하멜, 조선에 표류하다- 편)

그러던 중 전라 좌수사가 총 네 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이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좌수사인 정영(鄭韺, ? ~ ?)이라는 자를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 등 요구를 해댔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이 때 수사들이 딱히 인종차별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하멜 일행에게 잘 대해준 이도빈과 정영은 맡은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고, 하멜 일행을 괴롭힌 자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라 같은 조선인들도 싫어했다.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2~3배의 가격을 더 주어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했다. 이 때 모두 온 것은 아니라서 8명은 조선에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으로 인계했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했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요청 이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 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 사실이 보고 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했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했다. 나가사키 부교가 당시 하멜에게 던진 질문은 모두 54가지로 "하멜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난파된 지점, 하멜이 타고 있었던 배의 대포 수, 배의 화물, 한양으로 압송된 연유 등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묻고는 더 나아가서 조선의 산물,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 세세한 정보들까지 체계적으로 질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14년 동안 조선에 머무르며 보고 들은 정보를 단 하루만에 캐냈다.

또한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끝나버린다.

또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해서 결국 네덜란드로 송환하기로 했다.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다.[11]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 동인도 회사는 13년만에 돌아온 이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기 싫어서, 항해중 실종 당일부터는 근무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2년치의 임금을 제시했다. 다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12]은 8명이 송환될 때 이미 죽었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사실은 살아있는데 송환을 거부했고 이를 받아들인 나머지 일행들이 입을 맞춰 계속 조선에 남았다는 설이 있다.

2.2. 하멜 표류기[편집]

귀국한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였다. 이 《하멜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 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되어 있다.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다시 귀국할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지이며, 난파 경위, 조선에 표박한 이후 하멜 일행이 겪은 체험과 감상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왕국기>는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형법 제도, 종교, 교육, 교역 등 하멜이 조선에서 체류하면서 보고 들은 조선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기록한 것이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이다. 참고로 하멜과 그 일행들이 청구했던 임금의 경우,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 걸로 간주한다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다.

반면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치의 봉급을 지급했다. 이유는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한다. 《하멜 표류기》는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불역본, 독역본, 영역본이 나왔으며 17세기에 나온 책이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이랬다. 21세기에도 한국이 동남아 정글이고, 한국인들이 쿵푸와 기체조를 즐긴다고 아는 사람이 있다. 인터넷TV도 없던 17세기에는 동양에 대한 온갖 판타지가 난무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통해 조선이 더 자세히 알려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하멜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물건을 조선에 팔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실은 일본의 방해를 피할 꼼수도 부릴 겸,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조선 상인이나 사신들을 대상으로 간접 무역을 했다.

조선에 대한 악평이 보이는 등 우리에겐 다소 비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편인데, 13년 동안이나 억류돼있었으니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

이를 위해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생겼다"라는 불리할듯 싶은 이야기도 제외했다. 물론 옆에 있었던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는 있었다. 사실 창창한 22세부터 36세 중년이 되도록 10년 넘게 여기저기 이송다니며 각종 부역에 동원되는,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13]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 조선에서 맺어진 처와 자식에 대한 감정도 실려있는 듯 보인다. 메마른 내용들로 가득한 <표류기>의 내용들 중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다. 전라도 유배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자
"우리가 어떻게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
라며 한탄하는 내용이다.

2.3. 조선과 일본의 외교 분쟁[편집]

조선에서는 십수 년간 하멜을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조차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일본스페인, 잉글랜드,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14] 일본은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서 건너오자 그 날 조사를 통해 하멜의 국적과 소속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멜이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죄다 캐냈다. 일본은 조선에게 "하멜 등은 화란인으로[15] 일본의 속국민[16]들인데 어찌하여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멋대로 억류하고 재물을 강탈했느냐"고 항의하여 외교적 문제로 번지게 된다. 조선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일본인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겠냐"며 적당히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조선에게 일본으로 가고자 한 사실을 분명히 밝혔고 박연이라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까먹은 통역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조선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곧 적절한 '반박 사례'를 찾게 되는데 바로 벨테브레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조선에서 왜관을 통해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일본에서는 벨테브레가 키리시탄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이 이걸 들이밀면서 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17]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6년 KBS에서 방영된 2부작 다큐멘터리, <'일요스페셜: 중세 조선의 비밀-하멜 표류기'>의 재연극에서 당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외교관들이 직접 네덜란드 표류자들을 연기했는데, 당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농무관이었던 프레드릭 보스나가 헨드릭 하멜 역을 맡아 연기했다.##2
  • 네덜란드 유튜버 <아이고바트> 채널에서 다룬 헨드릭 하멜 시리즈 **
  • 2015년 네덜란드 국영 항공사인 KLM은 한국으로 향하는 비즈니스석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기념품 "델프트 블루 하우스"[18] 모델로 하멜의 생가를 선정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A급 교역 항해사로 등장한다. 교역 항해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성능은 약간 아쉬운 편. 박성태성우가 보이스를 맡았는데, 대단히 개성적인 톤으로 연기했다. 목소리가 굉장히 호불호가 갈린다. 고용및 회식항구가 굉장히 괴랄하다. 실제 등장 및 회식 항구는 북해의 안트베르펜(앤트워프), 동남아시아의 자야카르타(자카르타), 나가사키, 그리고 표류했던 제주를 포함한 조선 전역[19]인데 안트베르펜의 경우 옷토 패거리가 여관을 장악하고있으며 회식 등장 비율이 굉장히 낮고, 자야카르타까지 진출하면 그나마 회식에 자주 등장한다. 제주의 경우 조선에서의 고된 노역으로 술이 없으면 못사는 몸이 됐는지 붙박이 수준으로 나온다(유럽의 필리푸스급으로 등장). 의약품 상인이라는 비주류 교역품 전문 상인이지만, 바스쿠 다가마, 알베르트, 필리푸스와 조합해서 함대 백병강화 4레벨을 만든 후 살바도르 레이스의 제독 스킬 목숨을 건 돌격을 사용하면 평전선으로도 라레알을 원킬 낼정도의 정신나간 죽창질이 가능해진다.

4.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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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아이콘   동명의 조선 세종 시절 음악가에 대한 내용은 박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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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朴延 | 朴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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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알크마르의 한 마을이자 그의 고향인 더레이프(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의 동상.[1]
출생
사망
1668년 이후 추정[2]
네덜란드명
Jan Janse de Weltevree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
성별
남성
국적
직업
무관

1. 개요2. 생애3. 왜 돌아가지 않았나?4. 대중매체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 본명은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 귀화 후 하사받은 조선 이름은 박연.

화란[3] 출생으로 조선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다.[4] 박연이라는 이름은 '벨테브레이', '얀'과 비슷한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일본에 윌리엄 애덤스가 있다면 한국엔 벨테브레이가 있는 셈이다.

2. 생애[편집]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5]인 더레이프 출신으로 추정된다. 어느 시점에서 선원이 되어, 1626년에는 홀란디아(Holandia)호의 승무원으로 근무했다. 30대 초반인 1627년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표류해 제주도에 상륙했으나 곧바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탑승한 아우베르케르크 호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6]로 몰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중국 상선에 옮겨 탔다가 태풍을 만나 아우베르케르크 호와 헤어지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침 가까이 보이던 제주도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때 중국 상선의 원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환해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7]

당시 네덜란드에 조선(고려)은 식인 풍습이 있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어서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먹는다고 들었다며 처음 제주에 상륙했을 때 마침 밤이라 병졸들이 횃불을 켜고 다가오자 선원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줄 알고 하늘이 사무치게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전반의 관례로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는 국가 중에 접경 국가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조건 명나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서로 싸우는 등 정세가 좋지 않았기에 부산의 일본 왜관에 의뢰해서 일본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려 했으나, 일본은 박연의 일행이 절리지단(切利支丹 - 크리스천)[8]이란 이유로 거절했다.[9] 그러자 조선 조정은 곧바로 송환을 포기했다. 결국, 그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해서 귀화했다. 외국 귀화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본관을 하사받은 기록이 없다. 조선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하나,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 문파도 현재는 없는 상태다. 한국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라는 기사를 냈으나 원산 박씨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에 전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등 가족이 있었고, 그렇게 후손이 이어져 소르본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후손 한 명이 1991년경에 한국에 있는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한국에 입국, 학계와 치안본부(경찰청)의 도움을 받아 수소문을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어 출국했다고 한다. 김충선과는 정반대인 경우다. 후손이 있더라도 본관이 없거나 여계 후손[10]만 남으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등 족보를 통해서는 후속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국쪽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네덜란드쪽 후손과 만나 유전자 감식을 받아보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동료 2명[11]과 함께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았고 동료들은 전사했다. 그 후 항복해 온 일본인청나라 사람들을 감시하는 일,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 자리, 대포를 개량하는 일 등을 맡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헨드릭 하멜조선으로 표류했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 그것도 같은 나라 출신이 와서 하멜과 동료들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6년이나 지나서 조선에 적응이 다 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어를 같이 나눌 사람들도 병자호란 때 죽어서 도통 말을 나누지 못해서 통역을 꽤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네덜란드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다만 며칠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고 한다.[12][13] 하멜에게 벨테브레를 가리키며 "이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하멜이 "이분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14]이 틀림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자는 조선 사람[15]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을 보아 조선인들에게는 인종은 달라도 같은 조선인으로 대우받은 모양이다.

사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화이관과 덕치주의에 입각한 덕화 사상 하에서는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조정의 통치에 감화되어 전향하는 경우 오랑캐가 아닌 향화인(向化人)이라 해 특별히 우대했다. 고조선과 삼국시대 당시에 스키타이인이나 소그드인 내지는 토하라인들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남북국시대에도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신라로 귀화하고[16] 발해에서도 소그드인과 토하라인들이 무역을 했으며, 고려 말기에 유라시안[17] 민족인 위구르[18]이 고려로 귀화하기도 했으니, 백인계 이민족이 한민족계 국가에 귀화한 것 자체는 벨테브레이가 처음이 아니었다. 단지 유럽계로서는 최초였을 뿐이다. 벨테브레이를 처음 본 토착 조선인들의 심정은 중앙아시아 백인 민족(스키타이인, 소그드인, 토하라인)을 처음 본 고조선인들과 삼국시대 사람들 그리고 발해인들, 아랍계 귀화인이나 페르시아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신라인들, 위구르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고려인들의 심정과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오로지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윤행임이 지은 <석재고(碩齋稿)>에 따르면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뒤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하멜로서는 표류하고 나서 얼마 안 지나서 만난 '이역만리에 사는 네덜란드 사람' 정도였겠지만 벨테브레이로서는 수십 년 만에 만난 동포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당연히 혼혈이라 네덜란드 얼굴과 조선 얼굴이 반반 섞여 있다고 놀랍다는 기록이 있다.[19] 하멜은 자신이 탈출하던 1668년까지만 해도 벨테브레이가 살아있었다고 했는데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시점이면 이미 70이 넘은 나이로 고령이었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3. 왜 돌아가지 않았나?[편집]

당시 네덜란드 기록을 추적한 결과,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 호의 간부급 선원이었다.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or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된다. 후일의 행보로 봐서 무장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추측대로 해적에 가까웠던 셈이다. 고향이 현대에도 4,000명 정도만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상경한 뒤 동인도회사에 입사해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초반의 청년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선원은 대표적인 막장 인생 중 하나였고[2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중에서도 극동 원양항해까지 다닐 정도로 힘든 곳이었다. 선상의 위생과 안전이 많이 발달해 웬만해선 안전하게 돌아오는 현대에도 원양항해는 매우 힘든 직업이라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데, 그 당시 원양항해는 살아 돌아올 확률보다 죽어서 시체도 못 찾을 확률이 훨씬 컸다. 동인도 회사 출신 선원 중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은 1/3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살이었다. 마이크 대쉬의 '미친 항해'에 의하면,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네덜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하는 회사이기에 생환율도 극도로 낮아서, 기록이 나쁜 사람들이나 범죄자 출신도 자주 뽑아 썼다. 안 그러면 선원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 선원 출신이라고 하면 뭐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갔냐며 다른 뱃사람들조차 채용을 꺼렸다고 한다. 하물며 정규 상선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흉악범 취급인 사략선의 간부라면 안정된 직업이라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21]

당시 조선은 박연이든 하멜이든 일단 서양인이면 서양식 무기 기술을 얻어내기 위해 무기 관련 직책을 맡기려 했다. 박연은 여기에 굉장히 해박했으며, 사략선에서도 무기나 화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직책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조정에서도 계속해서 중용했다.[22] 또한, 박연은 네덜란드 본국에서 입지가 없었던 인물이며, 먹고 살기 위해 개막장 취급받는 사략선에 몸담아야 할 정도로 거친 생활을 보냈다. 이처럼 조선 귀화 전에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시골 흙수저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다가 바다로 떠밀려버리고 말았고, 어쩌다 이세계에 도착하니 거기선 나름대로 가진 기술을 인정해줘서 고향에선 꿈도 못 꿀 벼슬에 후한 대접까지 내려주니[23] 눌러살기로 마음먹을 동기가 충분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하멜은 300굴덴이나 하는 집을 살 수 있는 부유한 건축가 집안 출신이고, 시장(mayor)의 대자(대부-대자 관계)에, 사략선 출신이었던 박연과 달리 정식 선원이었다. 그러니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 남기보다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게다가 하멜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24] 무기 쪽은 아는 바가 없었고, 조선에서도 원하는 기술을 얻을 수 없으니 하멜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부려먹히며 '인질'처럼 살아가던 하멜은 본국이 그리웠을 것이며 결국 조선을 떠나 귀환한 것이다. 이래저래 하멜과 벨테브레이는 처지가 많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하멜의 기록을 살펴보면 벨테브레이는 최소 73살까지는 생존해 있었는데, 21세기 기준으로도 단명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25] 17세기 기준으로는 대단히 장수한 삶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위험한 원양 사략선 선원 생활을 계속했다면, 운 좋게 전사나 사고사를 피하더라도 고되고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인한 질병이나 건강 악화 등 때문에 70대까지 장수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을 것이다. 반면 조선에 정착하게 되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신분에서 벗어나 나름 요직에 등용되고 결혼도 하는 등 큰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니, 조선에 정착한 것은 박연 본인에게도 상당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영영 고향을 볼 수 없게 된 그리움은 컸던 모양인지,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인조에게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26]


즉 박연이 네덜란드로 가지 않은 것은 정착 자체는 자의로 했을 수 있겠지만, 이후 조선의 여건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편집]

  • 소설 <천년의 왕국>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은탄에서 박연과 하멜을 모티브로 둔 것으로 추정되는 힐데가 등장했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얀 야스 벨테브레이라는 이름의 B급 모험 항해사로 등장한다. 조선 소속으로[29] 역사적 고증을 살려 조선 무관복에 대포를 들고있는 일러스트이며, 조선어와 네덜란드어[30]를 구사 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네덜란드 출신의 조선인. 최초로 조선에 귀화한 유럽인이기도 하며, 귀화 후의 이름은 박연이다.
    네덜란드 선단 소속으로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관헌의 눈에 띄어 한양으로 보내졌다.
    이후, 조선에 유럽을 소개했고,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무신의 신분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항해사 열전

5. 관련 문서[편집]


[1] 제작자는 엘리 발튀스(Elly Baltus). 공식 홈페이지 조선에서 무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융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왼쪽 허리에는 머스킷, 왼쪽 가슴부위에는 카메라 3대가 오른발은 자동차, 왼발은 가 조각되어 있다. 항해자의 물품과 조선의 복식, 그가 만들었던 화약무기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 산업으로 박연의 복잡한 인생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서울어린이대공원에도 복제품이 있다.[2]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68년까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고 하니 사망 당시 나이는 최소 73세 이상이다. 하멜을 만나고 2~3년 뒤에 조선 전국에 경신대기근이라는 헬게이트가 발생했는데, 이때도 살아있었는지는 불명이다.[3] 네덜란드는 '홀란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는 홀란트를 한자로 치환한 화란으로 불렀다. 일본에선 포르투갈어 '올랑다(Holanda)'를 옮긴 '오란다'로 읽는다.[4] 정착이 아닌 서양인의 최초 조선 상륙 기록은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이는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리녜이루(Marinheiro)의 음차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그는 명나라 사행길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5] 2005년 기준으로 4,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파주시나 연천군에 속한 면읍 같은 곳이다.[6] 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7] 이글루스 서비스 종료로 인해 아카이브 링크로 대체.[8] 일본식 표현으로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다.[9]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가톨릭 탄압 정책을 취했고 결국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류한 지 10여년 뒤엔 시마바라의 난을 겪으며 가톨릭과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국이라 가톨릭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이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에도 막부 사이에 분쟁이 있던 시기여서 네덜란드인에게도 적대적이었다.[10] 딸이나 손녀 등 여성 직계 자손의 후손이다.[11]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 얀 피르터르츠(Jan Pierterz).[12] 유년기에 도미하여 20대 중반에야 귀국한 유일한 박사도 유년기를 미국에서 지낸 탓에 귀국 당시에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하고 한국어 말하기가 서툴러졌으나, 그래도 한국어가 모국어였다보니 금방 감을 되찾고 나중에는 한국어 대화는 물론 연설도 멀쩡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재필 박사 역시 미국 귀화 후 잠시 방한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했을 때에는 한국어를 다 잊었다고 영어만 썼으나 이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가족 숙청에 대한 원한 때문이고, 실제로는 한국어를 온전히 기억하여 해방 후 방한에서는 서투른 부분 전혀 없이 멀쩡하게 한국어 연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영친왕 역시 유년기에 일본에 끌려가 노년에 뇌출혈 후유증으로 1963년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귀국할 정도로 오랫동안 일본 왕공족으로 살았으나 수시로 한국어를 중얼거리고 한국어로 영어 교재도 집필하는 등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쓰던 사람이 해방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멀쩡히 한국어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이 놀랐다고 전해진다.[13] 마찬가지로 현대 귀화인들도 모국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아 거의 까먹다가도 며칠 계속 쓰면 금방 능숙해지고 감을 되찾는 경우가 많다. 미국계 한국인 변호사 하일이 하도 영어를 안 써서 가끔씩 영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적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미국계 한국인 의사인 인요한도 자신은 외국인학교와 미국 의대를 다녀서 영어도 하지만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익숙(실제로 완벽한 호남 방언을 구사한다.)하며, 형들은 영어를 까먹은 것 같다고 농담을 했었다. 물론 실제로는 하일 변호사도, 인요한 교수도, 그리고 인 교수의 형들도 모두 영어를 잘 쓰고 있으니 예능용 멘트라고 보면 된다.[14] 실록 기록에는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나와 있다.[15] 하멜 표류기에는 '코레시안(Coresi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16] 처용이 아랍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슬람측의 기록에도 신라(알 실라)를 두고 "그 땅은 물이 맑고 땅이 좋아서 거기 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고 있을 정도였다.[17] 위구르 제국의 고대 위구르족은 순혈 동북아인이었지만 한국사의 여말선초, 중국의 원말명초 시점에서 위구르족은 토하라인, 스키타이족 등 백인 민족들과의 지속적인 혼혈 때문에 유라시안화가 완료된 상태였다. 물론 현대 위구르족도 한족,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 카자흐족 등 동북아 계통 민족들과의 혼혈에 따른 영향으로 동북아 계통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도 존재한다.[18]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인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던 설장수의 아버지 설손이 바로 위구르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고려로 도망쳤다가 눌러 살았다고 한다. 설장수는 이민 2세대에 해당한다. 설손 말고도 임천 이씨의 시조가 된 이현(李玄)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위구르 출신이다. 덕수 장씨 역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19] 물론 이들이 혼혈이더라도 한국인들과 오랜 통혼 때문에 이들의 후손들의 얼굴은 한국인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위구르계인 덕수 장씨의 후손들도 현대의 시점에서도 뜯어 보면 왠지 아랍이나 중앙아시아 느낌이 나는 사람이 있는 등 전형적인 한국인 얼굴과 조금 다른 사람은 있을 것이다.[20]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으로 접했다면 항해가 낭만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냉장고에 싱싱한 식재료를 가득 싣고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는 현대의 항해와는 달리 그 당시는 물은 변질이 쉽기 때문에 물 대신 실은 원액 수준의 독주로 목을 축이며 소금친 고무타이어 같은 염장고기와 돌덩이 같은 쉽비스킷을 씹어먹어야 했고, 괴혈병각기병은 기본 소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불만을 막기 위해 구타도 심했다. 19세기 미국 포경선에서 일하다 보트를 타고 도망친 선원들이 조선에 표착했다가 베이징을 통해 송환된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사람 대접을 해줬다"고 증언할 정도로, 근대까지 선상업무는 매우 고된 일이었다. 사실 현대에도 선원은 상당히 고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 여느 노동집약 산업과 마찬가지로 가끔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국적 원양 어선에서 생기는 사고들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개도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 분야다. [21] 실제로 헤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선원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던 포르투갈 해군에 잡혀서 전부 마카오로 끌려가 교수형을 당했다.[22]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한족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삼는 동시에 병장기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이때 조선에 플린트락이 전래되었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제작에 필요한 부싯돌이 조선에선 희귀해서 양산되지는 못했다.[23] 현대로 치면 사령부 직할대 특임대장 / 국방부 육본 정책과장(중령급) 정도로 특채된 셈이고, 대략 5급 공무원 정도 되는 위치다. 조선의 기준으로나 현대의 기준으로나 결코 낮은 벼슬이 아니다.[24] 조선 측의 기록에서는 하멜도 무기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하멜은 선원 시절 회계 담당이었으므로, 총기를 다루는 법 정도는 알아도 제작하는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밝혔다.[25] 물론 70대 후반 이상의 연령대까지 산 사람에 비하면 장수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는 편이긴 하다.[26] 물론 조선 입장에서 훈련도감의 핵심인물이자 조선의 군사정보에 대해 깊숙히 관여하게 된 사람인 만큼, 그 시점에서는 마음대로 돌려보내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현대에도 국방부 쪽에서 근무하는 외국인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계속 호소를 하거나 탈출 시도라도 했다간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27] Frederik Vossenaar. 현재 검색해보면 현재 네덜란드 농림축산식품부 특사로 활동중이다.[28] 원작에서는 주인공 윌리엄에게 조선을 탈출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조선에 정착해서 살아볼 것을 권유하는데 아예 훈련도감에 자리까지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원작과 드라마 둘 다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하는데 심지어 인물 소개 항목을 보면 "지는 마 원래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예. 인자는 마 조선 사람 다 됐다 아인교? 인자는 네덜란드 말도 다 잊아뿌고 우리 조선말이 더 편합니더. 지는 마 조선이 너무 좋심더."라고 소개되어 있다.[29] 하멜은 네덜란드 소속이다.[30] 언어 레벨이 다소 논란이 되는데, 네덜란드어 2레벨에 조선어 1레벨이다. 너무 조선에 오래 살아서 네덜란드어가 매우 어색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로 적어놨다. 참고로 하멜은 네덜란드어 4레벨 조선어 2레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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