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는 국가간의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다; 죄다 왕실간의 땅따먹기 싸움이었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헨리 5세 때부터다; 그 이전 영국왕들은 프랑스어를 했다; 17세기~20세기 초까지 유럽의 국제어는 프랑어였다

1066년부터 1399년까지 영국 왕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고, 영국의 법원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영어는 어떻게 프랑스어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제어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가? 이 책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제국의 운명을 걸고 격돌한 언어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왜 영국 왕들은 300년 이상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을까?
왜 영국의 법원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어가 통용되었을까?
이 책은 중세 영국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언어 전쟁의 관점에서 풀어쓴 인문학 책이다. 영어가 프랑스어의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나 지금의 자리에 올랐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중세 서양사에서 간단히 언급되는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 하지만 그는 영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정복 왕이었다. 이민족의 정복은 정복자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시작되고, 피정복민의 언어가 다시 살아날 때 끝이 난다. 중세 영국에서 정복자의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피정복자의 언어는 영어였다. 영어에서 ‘얼굴’을 의미하는 face가 순수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 차용어라는 사실은 두 언어의 지배 관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또한 이 책은 왜 영어에는 기르는 가축 이름과 먹는 고기의 이름이 다른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저자는 양국의 복잡한 관계가 11세기 중반에 있었던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 영국에는 앵글로-색슨 왕조가 들어서 있었는데, 윌리엄 공의 침략을 받아 프랑스 계통의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저자는 이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인 동시에 문화적인 침략을 알리는 시발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 왕들이 무려 333년 동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영국 왕실의 문장이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영어와 프랑스어의 애증 관계는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문화적으로는 프랑스 문화의 유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노르망디의 법률과 행정 제도가 영국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로 의회를 의미하는 Parliament는 고대 프랑스어로 ‘말’, ‘연설’을 의미하는 Parlement에서 만들어졌으며, 법원과 감옥을 의미하는 Justice와 Prison은 두 언어에서 철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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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바로 '백년전쟁'입니다.

다시말하면 백년전쟁은 현대인들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국가간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중세기에는 이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한 집안의 두 갈래가 프랑스 왕관이 누구의 상속권이냐를 놓고


유산 싸움을 한거라는 거죠.

https://m.blog.naver.com/nonepapa/22206202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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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 이래 영국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나',

'언제부터 잉글랜드 왕은 모국어를 사용했는가'가 궁금했을 뿐인데

어째 결과는 '우리 말, 우리 언어가 왜 중요한가'에 대한

깨달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네요.   



"이전에는 프랑스 말을 하는 영국 귀족과

프랑스 말을 하는 귀족이 싸웠습니다.

헨리 5세부터는 병사들과 똑같이
 1386년 9월 16일 · 잉글랜드 왕국 몬머스 성 ; 사망. 1422년 8월 31일 (향년 35세)
영국 말을 하는 왕이 프랑스 말을 하는 프랑스 왕과 싸웁니다.


국가간의 대결이 맞아요~"



'국가간의 대결'이란 문장이

이렇게 의미 있고, 크게 다가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영국이 프랑스의 속국이었는가'란 이야기는  

당시엔 국경이란 개념도 흐릿하던 시절이고

또 왕과 가신의 의미도 말만 '왕이시여~' 하던 시절이었지

왕한테 칼부림하고 왕하고 전쟁선포하고 싸우고 하던 시절이라

큰 의미는 없다고 보네요.

더군다나 정략혼을 통해 영국 영토가 프랑스 것이 되었다가

독일 것이 되었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었으니까요.

보면 유럽 왕실 역사는 땅따먹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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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에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이다. 하지만 메리 2세 본인의 역할은 크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치자 오라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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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는 혈통만 제임스 1세의 후손이지, 완전 '독일인'이었고, 갑작스레 영국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한참 오랫동안 고국인 하노버 선제후국을 지배하고 있던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영어 한마디도 할 줄을 몰랐고 결국 믿을 만한 오른팔을 만들어 수상으로 임명하는 정치를 시행했다. 이때 초대 총리로 20년 넘게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로버트 월폴. 덕분에 그는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독일어만 하고 영어를 못해서 국정을 내팽겨쳤다는 흔히 알려진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당시 유럽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임을 부연설명하지 않고 농담으로 넘어간 것으로, 신하들과 의사 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조지 1세는 오십 평생을 독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왕정이 그렇듯 신하들이 궁전에 들어와서 알현하는 독일식 궁정 통치에 익숙해서 무엄하게 왕이 신하들 만나러 출근하러 가는 영국의 의회 제도라는 요상한(?)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대리인 겸 연락책 신하를 보낸 것.솔직히 애들 보는 만화에서 정치 얘기를 복잡하게 하는 것보단 말이 안통해서라고 하는 쪽이 낫긴 하다.

 

조지 3세 George William Frederick Hanover. 대영제국 시기 영국과 하노버의 군주. 하노버 왕조에서 처음으로 영국 태생인 군주다.[1] 1738년 6월 4일 조지 2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 독일의 왕조 중 하나이자 인도 역사상 유일하게 인도 전역을 통일한 왕조이다.

하노버 선제후 가문에서 영국 왕위를 획득하고 선제후령이 승격하여 하노버 왕국까지 지배했다. 20세기 초반엔 독일 제국 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3]까지 차지한 적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부군 앨버트 공의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교체되고, 엘리자베스 2세 이후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의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생물학적으로 교체되었지만[4] 현 영국 왕실인 윈저 왕조는 하노버 왕조의 방계 후손이다. 그리고 하노버 가문의 수장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외증손녀[5]와 결혼했다.
하노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유서깊은 중세 독일의 명문가 벨프 가문(Welfen)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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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왕실
빅토리아 여왕 후손들
독일, 러시아, 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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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부터 1399년까지 영국 왕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고, 영국의 법원에서는 17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영어는 어떻게 프랑스어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제어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가? 이 책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제국의 운명을 걸고 격돌한 언어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문화적으로는 프랑스 문화의 유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노르망디의 법률과 행정 제도가 영국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로 의회를 의미하는 Parliament는 고대 프랑스어로 ‘말’, ‘연설’을 의미하는 Parlement에서 만들어졌으며, 법원과 감옥을 의미하는 Justice와 Prison은 두 언어에서 철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 p.45

 

프랑스어의 다른 이름이 국제어(Lingua Franca)이며, 그 어원 역시 당시 세계공용어였던 프랑스어에서 기원했다. 스웨덴 국왕 칼 13세의 양자로 간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도 프랑스어를 스웨덴 귀족들도 다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고[20] 러시아 제국 궁정에서도 프랑스어 못하면 야만인 취급했다.[21] 또한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도 논문이나 저작은 프랑스어로만 작성할 정도로 유럽 상류층에선 프랑스어가 보편화되었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만 봐도 20세기 초반까지 상류층에서 별로 실용성이 없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배우며 그들만의 리그의 장벽으로 삼았다.[22] 이러한 풍조는 사실상 20세기 초중엽까지 계속되다가, 양차대전으로 영불 등 구 열강들이 몰락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미국의 '영어패권주의' 와 소련의 '러시아어패권주의' 앞에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영어의 발상지인 영국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래도 아직 FIFA 등에서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다수의 프랑코포니 국가가 존재하는 등, 프랑스어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다.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이 그랬지만 프리드리히의 일상어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무 언어로 프랑스어를 썼고, 프리드리히가 남긴 모든 글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한 신하와 독일어 vs 프랑스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도 있을 정도.
물론 평생지기 볼테르와의 대화와 서간 왕래도 전부 프랑스어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편지라는 것들 중에 뭔가 비범한 것들도 섞여 있는데, 볼테르가 포츠담에 기거하던 시절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에는 웬 그림 문자가 섞인 분수[23]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볼테르의 답장은 더 간단해서 "Ga!"라고만 덜렁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주고 받은 것.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메모의 분수 숫자를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Deux mains sous pe à cent sous scie"[24]가 되는데, 이것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 문장인 "Demain souper à Sanssouci", 직역하면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식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 수라를 함께 들겠느냐?(Demain souper à Sanssouci?)" 볼테르가 보낸 "Ga!"[25]라는 답장의 경우, 그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프랑스어로 풀어보면 넌센스 퀴즈가 된다. Ga를 "Gé grand, A petit"(대문자 G, 소문자 a)라고 풀어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와 발음이 비슷해진다. 둘 다 "제 그랑[26] 아뻬띠"로 읽으며, 이 문장의 뜻을 직역하면 "나는 매우 크게 식욕을 느낍니다." 즉,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은 "시장하옵니다 폐하! (J’ai grand appétit!)" 그리고 실제로 볼테르는 다음 날 상수시 궁전에 등장함으로써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양반들은 "님 밥이나 같이 먹자", "ㅇㅇ"이란 말을 이렇게 빙빙 꼬아서 서로 퀴즈를 주고받았다는 얘기이다.
[1] 하술되어있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상어는 프랑스어였으며, 독일 문화를 경멸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그에게 프로이센은 nation(민족 집단)이 아니라 state(정치적 실체)로 의미를 가졌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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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우편연합(UPU, Universal Postal Union)은 세계의 우편 서비스를 표준화하고 개선하기 위해 1874년에 설립된 국제기구입니다. 이 기구에서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1874년에 만국우편연합이 설립될 당시 프랑스어는 유럽 전역에서 국제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대륙 간 국가 중 하나였고, 프랑스어는 유럽 전역에서 왕실과 군사 분야를 비롯한 국제적인 공식 행사에서 사용되는 공용어였습니다.

둘째, 프랑스어는 당시 교육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공용어로 채택됨으로써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의 편의성을 제공했습니다.

UPU는 현재도 프랑스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영어와 스페인어 등 다른 언어들도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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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 강국중 하나로, 20세기 전까지 서양 문화를 주도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프랑스 문화에 심취한 프랑스빠였고, 또 오랜 적국이던 오스트리아에서 혼인 동맹을 위해[1] 프랑스로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부터 프랑스어를 사용했기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수도없이 프랑스와 싸웠던 독일의 전신 프로이센 왕국의 위대한 왕 프리드리히 대왕도 독일어 대신 프랑스어를 쓸 정도로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였으며, 크림 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러시아 제국 또한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쓰며, 이를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짙었다.

또한 프랑스는 최초의 현대적 백과사전인 《라루스 백과사전》이 탄생한 곳이다.[2] 해당 백과사전을 만들게 된 계기는 "세상 사람들이 모든 분야에 대해서 진실을 알게 되면 저절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이는 백과사전파로 철학사(史)에도 이름을 남겼다.

외래문화에도 수용적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로커 데이비드 보위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한 것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폴 매카트니도 받았으며, 국적에 관계없이 프랑스와 관련있는 예술인이 있다면 심의 후 그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한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이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린 이케다 리요코도 그 경우이다.

기득권이나 거대 집단에 대한 투철한 저항의식도 그 문화의 한 특징으로, 비판의 대상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가 존중되는 분위기이다. 샤를리 엡도 같은 주간지도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 이후 프랑스인들이 펜을 들고 추모에 나선 것은 바로 자신들의 그런 문화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파괴된 것에 대한 충격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 프랑스어[편집]
18~19세기 동안 유럽의 문화, 예술, 외교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3]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프랑스어를 직접 프랑스어로 지칭하지 않고 국제어라고 호칭하고 있다
. 이는 당시 프랑스어의 위상을 잘 알려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영국인 에드워드 기번도 원래는 자기의 저서를 프랑스어로 쓰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지금도 UN 공용어이긴 하다.[4] 또한, 프랑스어권 나라들을 중심으로 프랑코포니가 결성되었고 프랑코포니 회원국들 간에 교류가 많은 편이다. 언어학, 사회학 학술 용어로 원래 모어가 다른 문화, 공동체, 사회 간 교류 과정에서 통용되는 공통어[5]를 라틴어로 Lingua franca라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프랑크인의 말', 즉 프랑스어란 뜻이다. 이만큼 근대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국제어가 프랑스어였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5개 국어 능력자인 근세 유럽의 패왕 카를 5세의 명언도 있다. "나는 하느님께 스페인어로, 여자에게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게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에게 독일어로 말한다." 즉 종교적으로 경건한 언어로는 스페인어[6], 사교적으로 작업 걸기 좋은 언어로는 이탈리아어, 남자들 간의 공적이고 사무적인 자리에서는 프랑스어가 대접받았다는 말. 이 말은 카를 5세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는 특히 이러한 경향이 심하여 아예 프랑스어=고급 언어 또는 지식인의 언어라는 생각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퍼져 있었고, # 당연히 이들의 모국어인 러시아어는 귀족들 사이에서 평민이나 쓰는 천박한 언어로 격하되었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을 보면 상류층 인물들끼리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원서를 보면 계속 러시아어가 나오다가 갑자기 그 부분에서만 프랑스어가 갑툭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러시아 황실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게르첸, 투르게네프 같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상류층 출신 지식인들은 아예 어렸을 적부터 집안에서는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모어로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를 말하고 배우며 자라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시대적 배경이 그렇다보니 이 '프랑스어 가정교사'들은 프랑스 혁명으로 쫒겨나온 프랑스 귀족, 망명객들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이런 러시아의 정치적 낙후성과 봉건성을 주로 욕하고 까던 입장이었던 서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어 자체는 어디 프랑스 본토 사람 뺨치게 잘 구사하면서 막상 고향의 농노나 아랫사람 대하는건 아시아적 폭군스런 러시아 귀족" 같은 너무도 19세기스런 일각 진보적이면서도 위선적으로 차별적인 시선은 흔한 스테레오타입이었다.

물론 예외란 건 항상 있는지라 오히려 가끔 사상적으로 극렬 자코뱅같은 사람들이 저 러시아인 귀족 자제들의 가정교사가 돼버린 경우도 있어서[7] 오히려 프랑스어란 다리를 통해 나머지 유럽의 진보적, 계몽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장 게르첸이 이랬고, 러시아 혁명가 전통의 최초의 큰 대대적 봉기였다 평가받는 데카브리스트의 난도 대불 전쟁시 프랑스 혁명과 맞서 싸우면서 오히려 그 영향을 받은 소장파 장교들이 주도했다. 나중에 20세기 초 되면 러시아 지식인 전통에서 이런 러시아인들 스스로가 자국 문화를 부끄럽게 여기고 서구 문화만 추종하는걸 또 부끄럽게 여기는 슬라브주의 지식인 세력이 떠오르면서 오히려 태어나서 평생 일상언어론 프랑스어만 쓰던 귀족, 상류층 인텔리 출신 슬라브주의자 지식인이 집안 하인, 농민들을 통해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만화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독일인인 유리우스 폰 아렌스마이야가 맨 처음 러시아에 가서도 오랫동안 레오니드 유스포프 후작의 집에서 아무 문제 없이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프랑스어에 있다. 러시아에 도착하기 이전에도 기차에서 만난 러시아 자본가와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자, 그 러시아인이 유리우스의 프랑스어 능력을 대단히 칭찬했었다. 나중에 유스포프의 집에서도 처음에는 러시아어를 못 알아들어 당황하자, 유스포프와 그 여동생이 프랑스어로 말을 걸면서 대화가 시작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심지어 프랑스어의 vous(당신)이라는 낱말의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러시아어 вы(당신)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나의 독백도 있다. 그런데 웃긴 건 вы라는 2인칭 복수가 경칭 2인칭을 의미하게 된 것 자체가 프랑스어 영향이다. 이전에는 경칭 비경칭 관계없이 단수 2인칭은 ты, 복수는 вы였다. 소설의 다른 부분을 보면, 러시아의 귀족들은 심지어 러시아어는 서투르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

이런 프랑스어 동경은 러시아가 좀 심하긴 했으나,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했으며, 심지어는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인들까지도 자신들의 언어가 프랑스어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현대 영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 추상적인 고급 어휘들은 대부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오히려 현대 프랑스어에서 사라진 중세 프랑스어의 어휘와 발음을 영어가 더 많이 간직했다고도 한다. 거기에다 19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상류층들도 프랑스어를 배웠고 프랑스어가 당시 이스탄불의 가게에 터키 문자와 프랑스어의 로마자를 같이 사용했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국호도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프랑스어식 표기는 'Corée'였기 때문에 영어식 국호도 Corea로 한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된 것. 그러나 영국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Korea로 바뀌게 되는데, 정작 조선 당국은 고려에서 유래한 국호가 꺼림칙하여 Chosun이나 Empire of Dai Han의 표기를 했지만 통용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을 참조하도록 하자.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항 근무자 말고는 공무원들조차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
지금도 프랑스에서 관광객이 길가다가 영어로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대체 뭐라는 거야 하는 반응이 나온다고.[8] 프랑스어에 어설퍼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는 판이하게 다른 케이스. 심하면 '프랑스 여행 왔으면서 간단한 회화도 안 배워오는 건 무슨 배짱?' 같은 핀잔을 듣기도 한다. 차라리 영어 말고 그냥 손짓 발짓하며 물어보는 게 더 나을 정도.

그러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거짓말이거나 혹은 적어도 크게 뻥튀기한 이야기라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영어를 썼을 때 저렇게 반응하는 건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영어를 못해서라고.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과시욕이 많아서 자기가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못 알아들어도 손짓발짓으로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9]

하지만 2010년대에는 이런 태도가 완화되어, 영어로 물어봐도 대답해주려 노력하는 편이다. 오히려 외국인이 어설프게 프랑스어 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불어로 물어보면 영어로 답해주는 사람도 있다. 흔히들 프랑스는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많아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인에게 영어로 물어봐도 프랑스어로 대답해준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잘못 전해진 얘기로, 오히려 그 자부심 때문에 외국인의 어설픈 프랑스어를 싫어하고 프랑스어로 물어봐도 영어로 대답해준다. 거기다 한국보다 영어 공부 열풍이 더 심한 나라이다. 취업 시에도 토익을 보는 회사가 많다. 2018년 2월 24일에 프랑스 정부는 영어 학습 장려에 나서고 있다. #

2018년 3월 20일에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코포니의 날을 맞이하면서 국외에 있는 프랑스어 학습 기관을 지원해, 프랑스어 교육 기회를 두 배로 확대하기로 발표했다.#

프랑스어에도 영어에서 유래된 어휘들이 늘어나고 있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전인 '프티 로베르'의 2019년 개정판에도 영어에서 유래된 신조어들이 대거 수록되었다고 르파리지앵이 2018년 5월 14일에 보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어가 영어에 짓눌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프랑스어권 학자와 예술가 100명이 프랑스어를 쓰라는 성명서를 내는 일도 있었다. #

프랑스의 신분증에 영어가 병기되자 프랑스내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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