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급 계몽군주 알렉산드르 2세: 폭탄테러를 받은 황제는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난 괜찮다." 라고 말하며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했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제군주국에서 민간인이나 호위병 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전제군주는 눈씻고 찾아봐도 이름 하나 대기가 어렵다.
결국 황제의 행렬은 오후 2시 경에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이어 2시 15분 무렵, 니콜라이 리사코프는 소피야 페롭스카야의 신호를 받고 손수건에 싼 첫 번째 사제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마차 뒤편에서 폭발하고, 황제의 마차를 뒤따르며 호위하던 카자크 기병이 이에 치명상을 입고 그날 사망했다. 폭탄 파편으로 거리를 지나던 애꿎은 14세 소년도 부상을 입었다. 폭발로 주변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에 탑승하고 있었기에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리사코프를 현장에서 체포한 경찰들은 리사코프가 체포 직전에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걸 듣고 암살자들이 또 있음을 직감했다. 이에 신하들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곧장 온전한 마차로 바꿔타고 궁으로 향할 것을 주청했으나, 황제는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난 괜찮다." 라고 말하며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했다.[24]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제군주국에서 민간인이나 호위병 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전제군주는 눈씻고 찾아봐도 이름 하나 대기가 어렵다.
당시 상황을 그린 삽화. 왼 쪽에 쓰러진 사람이 암살자인 흐리니에비에츠키이고 중앙에 쓰러져 수행원 한 명이 잡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이다.
하지만 이는 암살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그 사이에 달려온 흐리니에비에츠키가 황제 앞으로 난입하여 두 번째 폭탄을 발밑에 던졌다. 이번엔 암살범이 워낙 가까운 데서 폭탄을 던져 자살 폭탄테러나 마찬가지였다.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날아가고 배와 얼굴이 찢어지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흐리니에비에츠키도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미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폭발이 일어나 근위병들과 주변 약 20여 명의 구경꾼들까지 부상을 입었다. 이외에 암살조 중 이반 예멜리야노프도 언제든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으나, 알렉산드르 2세가 이미 상태가 심각해 가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떠났다.
치명상을 입은 황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겨우
"짐은 궁전에서 죽고 싶도다..."
라는 말을 했고, 신하들과 근위병들에 의해 급히 겨울 궁전으로 실려 갔으나 9시간 만에 그의 서재에서 사망했다. # 암살범 흐리니에비에츠키도 주변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는 자기 이름도 발설하지 않고 일체 협조를 거부하다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반면 첫 번째 폭탄을 던진 리사코프는 순순히 조사에 응해 다른 단원들의 신원을 자백했다. 이에 경찰은 대대적인 검색을 벌여 '인민의 의지' 단원들을 1881년 3~4월에 걸쳐 연이어 체포했다.
러시아 전제정의 상징인 황제를 쓰러뜨린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전제정을 완전히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설령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본격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민들은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의 참혹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25] 자유주의자들은 입을 다물었으며 차르주의자들은 "정부가 테러리즘에 맞서서 단호하게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암살 이후 1881년 3월 8일에 열린 회의에서, 헌법을 만든 로리스멜리코프는 ‘죽은 황제의 의지는 그 후계자에게 법이 된다’는 전례를 황태자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황제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거부했고 전제 정권을 보존할 것을 선언했다. 자기 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는 권좌에 앉은 후 아버지의 개혁 정책 중 일부를 철회하며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고 자기 아버지를 앗아간 테러리즘을 뿌리뽑으려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자리에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다.
러시아 전제정의 상징인 황제를 쓰러뜨린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전제정을 완전히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설령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본격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민들은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의 참혹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25] 자유주의자들은 입을 다물었으며 차르주의자들은 "정부가 테러리즘에 맞서서 단호하게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암살 이후 1881년 3월 8일에 열린 회의에서, 헌법을 만든 로리스멜리코프는 ‘죽은 황제의 의지는 그 후계자에게 법이 된다’는 전례를 황태자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황제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거부했고 전제 정권을 보존할 것을 선언했다. 자기 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는 권좌에 앉은 후 아버지의 개혁 정책 중 일부를 철회하며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고 자기 아버지를 앗아간 테러리즘을 뿌리뽑으려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자리에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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