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선 '구한말 조선시대 사람들이 빈곤하게 산 나머지 염료를 구매할 돈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흰 옷을 입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간혹 나온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 아니라 잘못된 루머
일각에선 '구한말 조선시대 사람들이 빈곤하게 산 나머지 염료를 구매할 돈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흰 옷을 입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간혹 나온다.[10] 하지만 이는 역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이 아니라 잘못된 루머이며, 위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 이전 고려, 신라, 고구려, 부여에서도 흰 옷을 선호하거나 자주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니[11] 조선이 빈곤하다는 주장은 낭설일 뿐이다. 게다가 상기된 평안감사향연도 등에서도 보이듯 조선 시절에도 흰 옷이 유행했다 뿐이지 다른 색감의 옷들 역시 얼마든지 입고 다녔다.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흰 옷도 엄연히 염색옷이다. 일반적으로 직물을 염색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옷감의 색은 흰색이 아니며, 누런 삼베, 아이보리색이 나온다. 즉 흰색도 따로 염료로 물들이거나 표백 처리하는 과정이 필수로 들어간다. 일반 공장제 종이와 한지의 색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그 남을 심는 밭이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곡식이 나는 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국내 전체를 계산한다면 손실이 매우 많다."고 했을 정도로 흰 옷 염색은 비용이 든다고 호소했다. 규합총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인들은 흰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잿물에 넣어 수 차례 빨아 상아색을 띄는 면직물을 희게 표백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천연형광제를 사용하여야만 섬유 특유의 밀빛(아이보리 컬러)을 뺄 수 있어 다른 염색도 쉬워지므로 옷감 완성 후의 표백이 널리 퍼져있었다.
또 염색어미라 불리는 조선시대 여성 최고의 고소득 직종이 진두지휘하여 옷감을 다루었던 기록이 있으며, 가난한 집안에선 가장 대신 부인이나 딸들이 길쌈에 재능이 있으면 어지간히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을 내 여성공동체 전체가 분업을 하고, 판매할 직물생산가치를 올리는 후처리를 공동노동으로 행하던 것을 생각하면 염색할 재료가 없어 운운은 주장이 빈약하다. 역으로 표백을 거친 다음의 천연 염색의 경우 세탁 처리가 쉽지 않았으므로 표백 후 염색처리를 더 하지 않은 것이 문화적으로나 비용적으로 더 선호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복이 누런 빛이 도는 자연적인 색이 아니라 새하얀 순백색이었다는 건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 사람들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p.393)》에서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顯聖祝日: the Ttansfiguration)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聖)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래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는 점이나,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 앉아 무명으로 만든 옷을 눈부시도록 희게 빨고 있는 모습을 본 《아리랑: Song of Arirang》의 저자 님 웨일스(1907〜1997)는 "이상주의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깨끗한 청결을 위해 그토록 힘든 운동을 감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나쁜 뜻으로 표현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이러한 백의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여성인 비숍은 이러한 빈번한 세탁 및 재표백 작업으로 여성들이 중노동에 시달린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세탁을 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 물, 세탁재료 등을 생각 해 보면 "흰 옷을 하얗게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엄청난 사치다. 현대의 복식에서도 흰 옷의 변색과 오염이 유독 빠르고 유지가 어려운 것은 직접 세탁을 해본 경험이 있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특별한 오염이 없더라도 인체에서 발생하는 땀과 기름, 때 등의 분비물만으로도 며칠만에 누렇게 변하는게 흰 옷이다. 현대에도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아니고서야 매일 흰 옷을 입지 않는데 세탁기도 세제도 없던 옛날에는 더욱 심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세탁이 불가능 할 정도로 음식물이 묻었다면?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의관이 단정치 못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옷 자체를 틀고 다시 만드는 수 밖에 없다. 면포 자체가 화폐로서 기능했던 조선에서 백의를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담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백의를 고집했다는 것은 이것을 그만큼 특별하게 여겨서지 가난해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당장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결혼식에서 관리하기 힘들고 고가인 흰색 드레스를 입은 것을 시작으로 하얀색 옷이 유행하여 웨딩드레스가 되었다는 사례를 보면 흰 옷이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실제론 돈이 많이 드는 사치는 절대 아녔다. 한민족은 잿물로 세탁하는 고유의 풍습이 있었다.[12] 볏짚이나 콩깍지 등을 태운 재를 물에 담가 그 웃물을 뜬 이 물은 우리 선조들만이 터득한 고유의 비법이었고, 이 세탁법은 비록 옷감을 빨리 상하게 할지라도 뻣뻣한 옷감을 하얗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데엔 탁월한 효과가 있고, 뭣보다 만드는데 볏짚이나 콩깍지만 있으면 되므로 만드는 재료비가 매우 싼 세탁법이었다.# 물론 잿물 사용의 역사는 구약성경에도 언급될 정도로 엄청 오래되었다. 욥기 9장 30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란 구절처럼 눈 녹은 물이나 잿물은 고대부터 가장 깨끗한 것 또는 가장 깨끗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일본 역시 잿물을 사용했는데, 우리와 주재료가 달랐다. 우리는 전술한 볏짚이나 콩깍지 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들로 잿물을 만든 반면, 일본은 값비싼 동백나무 재로 잿물을 만들었다. 만드는 방식도 동백나무의 알루미늄 성분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여름에 동백나무의 가지와 잎을 잘라 태우고 백색의 재 상태가 되면 즉시 잿물을 만들어 보관하여 사용하는 까다로운 방식이었다.# 그래서 상류 계층 등 일부 계층들만 사용하였고, 널리 보급화되진 않았다.
종합해 보면 백의(白衣)란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상징이며, 오히려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이 있고 투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는 뜻이지 빈곤의 상징으로 쓰이기엔 넌센스하다. 애초에 현대에도 흰색 셔츠야말로 가장 쉽게 지저분해져서 자주 세탁해야만 하는 의복임을 생각해 보자.[13] 비용과 품이 하도 많이 들다 보니 아예 국가적인 낭비로까지 여겨졌고 한반도 역사에서 여러 번 백의금지령이나 염색 권장이 정부 차원에서 내려졌으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정책적으로 백의를 금지해서 경찰들이 돌아다니다가 백의 입은 사람 보면 옷에 먹물을 뿌리기까지 할 정도로 백의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만큼 가난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문물로, 오히려 유지에 품이 많이 들어 비경제적인 생활습관이었기에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위정자들이 뜯어고치려고 했으나 기어코 안간힘을 쓰며 현대에까지 소나무 같이 이어져내려온 취향이라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흰 옷도 엄연히 염색옷이다. 일반적으로 직물을 염색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옷감의 색은 흰색이 아니며, 누런 삼베, 아이보리색이 나온다. 즉 흰색도 따로 염료로 물들이거나 표백 처리하는 과정이 필수로 들어간다. 일반 공장제 종이와 한지의 색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그 남을 심는 밭이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곡식이 나는 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국내 전체를 계산한다면 손실이 매우 많다."고 했을 정도로 흰 옷 염색은 비용이 든다고 호소했다. 규합총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인들은 흰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잿물에 넣어 수 차례 빨아 상아색을 띄는 면직물을 희게 표백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천연형광제를 사용하여야만 섬유 특유의 밀빛(아이보리 컬러)을 뺄 수 있어 다른 염색도 쉬워지므로 옷감 완성 후의 표백이 널리 퍼져있었다.
또 염색어미라 불리는 조선시대 여성 최고의 고소득 직종이 진두지휘하여 옷감을 다루었던 기록이 있으며, 가난한 집안에선 가장 대신 부인이나 딸들이 길쌈에 재능이 있으면 어지간히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을 내 여성공동체 전체가 분업을 하고, 판매할 직물생산가치를 올리는 후처리를 공동노동으로 행하던 것을 생각하면 염색할 재료가 없어 운운은 주장이 빈약하다. 역으로 표백을 거친 다음의 천연 염색의 경우 세탁 처리가 쉽지 않았으므로 표백 후 염색처리를 더 하지 않은 것이 문화적으로나 비용적으로 더 선호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의복이 누런 빛이 도는 자연적인 색이 아니라 새하얀 순백색이었다는 건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 사람들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p.393)》에서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顯聖祝日: the Ttansfiguration)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聖)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래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는 점이나,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 앉아 무명으로 만든 옷을 눈부시도록 희게 빨고 있는 모습을 본 《아리랑: Song of Arirang》의 저자 님 웨일스(1907〜1997)는 "이상주의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깨끗한 청결을 위해 그토록 힘든 운동을 감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나쁜 뜻으로 표현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이러한 백의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여성인 비숍은 이러한 빈번한 세탁 및 재표백 작업으로 여성들이 중노동에 시달린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세탁을 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 물, 세탁재료 등을 생각 해 보면 "흰 옷을 하얗게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엄청난 사치다. 현대의 복식에서도 흰 옷의 변색과 오염이 유독 빠르고 유지가 어려운 것은 직접 세탁을 해본 경험이 있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특별한 오염이 없더라도 인체에서 발생하는 땀과 기름, 때 등의 분비물만으로도 며칠만에 누렇게 변하는게 흰 옷이다. 현대에도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아니고서야 매일 흰 옷을 입지 않는데 세탁기도 세제도 없던 옛날에는 더욱 심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세탁이 불가능 할 정도로 음식물이 묻었다면?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의관이 단정치 못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옷 자체를 틀고 다시 만드는 수 밖에 없다. 면포 자체가 화폐로서 기능했던 조선에서 백의를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담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백의를 고집했다는 것은 이것을 그만큼 특별하게 여겨서지 가난해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당장 빅토리아 여왕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결혼식에서 관리하기 힘들고 고가인 흰색 드레스를 입은 것을 시작으로 하얀색 옷이 유행하여 웨딩드레스가 되었다는 사례를 보면 흰 옷이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실제론 돈이 많이 드는 사치는 절대 아녔다. 한민족은 잿물로 세탁하는 고유의 풍습이 있었다.[12] 볏짚이나 콩깍지 등을 태운 재를 물에 담가 그 웃물을 뜬 이 물은 우리 선조들만이 터득한 고유의 비법이었고, 이 세탁법은 비록 옷감을 빨리 상하게 할지라도 뻣뻣한 옷감을 하얗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데엔 탁월한 효과가 있고, 뭣보다 만드는데 볏짚이나 콩깍지만 있으면 되므로 만드는 재료비가 매우 싼 세탁법이었다.# 물론 잿물 사용의 역사는 구약성경에도 언급될 정도로 엄청 오래되었다. 욥기 9장 30절: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란 구절처럼 눈 녹은 물이나 잿물은 고대부터 가장 깨끗한 것 또는 가장 깨끗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일본 역시 잿물을 사용했는데, 우리와 주재료가 달랐다. 우리는 전술한 볏짚이나 콩깍지 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들로 잿물을 만든 반면, 일본은 값비싼 동백나무 재로 잿물을 만들었다. 만드는 방식도 동백나무의 알루미늄 성분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여름에 동백나무의 가지와 잎을 잘라 태우고 백색의 재 상태가 되면 즉시 잿물을 만들어 보관하여 사용하는 까다로운 방식이었다.# 그래서 상류 계층 등 일부 계층들만 사용하였고, 널리 보급화되진 않았다.
종합해 보면 백의(白衣)란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상징이며, 오히려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이 있고 투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는 뜻이지 빈곤의 상징으로 쓰이기엔 넌센스하다. 애초에 현대에도 흰색 셔츠야말로 가장 쉽게 지저분해져서 자주 세탁해야만 하는 의복임을 생각해 보자.[13] 비용과 품이 하도 많이 들다 보니 아예 국가적인 낭비로까지 여겨졌고 한반도 역사에서 여러 번 백의금지령이나 염색 권장이 정부 차원에서 내려졌으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정책적으로 백의를 금지해서 경찰들이 돌아다니다가 백의 입은 사람 보면 옷에 먹물을 뿌리기까지 할 정도로 백의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만큼 가난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문물로, 오히려 유지에 품이 많이 들어 비경제적인 생활습관이었기에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위정자들이 뜯어고치려고 했으나 기어코 안간힘을 쓰며 현대에까지 소나무 같이 이어져내려온 취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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