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 (흉노, 거란, 여진) 중심으로 재구성한 중국사: 한고제의 백등산 전투 패배, 여후의 선우 묵특과의 굴욕적 일화, 석경당이 요나라에 바친 연운 16주의 엄청난 여파,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의 중국 지배

 

4. 석경당이 쏘아올린 작은 공[편집]

이종가는 석경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서, 이종후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석경당과는 이전부터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석경당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문하였는데, 석경당의 부하들이 석경당에게 만세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의 만세는 황제에게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종가 입장에서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석경당은 석경당대로 이종가를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종가의 주변에 심복을 많이 만들어놓아서 그의 동태를 두루 살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흩어진 재산을 모으고, 군비를 확충하며 만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 좌천의 명령이 떨어지자 심복 유지원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지원은 말했다.
우리에겐 정예부대가 있으니 지형을 점하고 싸우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모사인 상유한(桑維翰)은 의견이 달랐는데[4],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거란과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란 군주를 대왕으로 모시고 구원을 청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이면 지원군이 올 터이니,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경당은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을 넘어서 요태종 야율요골의 아들이 되기를 간청하는 상주문을 거란에 보내는 짓을 벌인다. 그때 석경당은 47세, 요태종은 37세였다.(...) 아들보다 열 살 어린 아버지가 탄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심지어 석경당은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엄청난 선택을 하고 마는데, 만리장성 이남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기로 한 것. 이에 유지원은 어이가 없어 참다 참다 석경당한테 간언을 올려 이를 만류했다.
신하의 예도 모자라서 아들과 아버지의 예를 맺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찌 땅까지 내주시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석경당은 그 간언을 전부 무시했고, 자신의 제안을 그대로 강행했다. 전부터 연운 16주를 노리던 요태종은 석경당의 제안에 신이 나서 가을이 되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가을이 되자 요태종은 약속대로 무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왔다. 당시 석경당은 이종가와의 싸움에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요태종의 요군 5만이 이종가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단숨에 전세를 뒤바꿔버렸다. 특히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종가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모두 황제를 배신하고 석경당에게 투항했을 정도. 결국 패배한 이종가는 가족들과 함께 누각에 불을 질러 분신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5] 후당도 그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5. 치욕의 재위[편집]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즉위식을 거행하여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 요태종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신하들과 함께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손수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 책봉식에서 요태종은 직접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당연히 거란식 의복이었다. 중국의 황제가 다른 나라, 그것도 이민족 황제에게 굽실거리며 거란옷을 입고 책봉되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황제가 책봉 간섭을 받거나 아우 나라 노릇을 한 적은 있으나[6] 이런 전례는 없었다.[7] 황제가 된 석경당은 약속대로 요나라에 세공을 바쳤다.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羅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를 써서 이웃나라를 멸망시키고 자못 강대해졌다. 호승胡僧 말라襪羅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의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정과 함게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출제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됨에 이르러 말라襪囉가 다시 말하였다. 출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경을 어지럽혀 거란의 세력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마침 왕건王建이 죽고 아들인 왕무王武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며 표表를 올려 상喪을 알렸다.

11월 戊戌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 高麗王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通事舍人 郭仁遇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도록 조지詔指로서 깨우쳤다. (거란이 이를 알까 두려워하여 조명詔命의 형태를 띠지 않고 조지詔指로서 이를 깨우쳤을 뿐이다)

곽인우郭仁遇가 그 나라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가 매우 약하여 지난번 말라襪囉의 말이 단지 왕건王建의 과장일 뿐이며 사실은 감히 거란과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곽인우가 돌아가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들어 해명하였다.
자치통감#

사실 거란이 쳐들어오기 전에 왕건발해 멸망 후 거란 견제를 위해서 석경당에게 함께 거란을 양면에서 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석경당이 그냥 무시해버렸다. 물론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왕건의 야심을 고려할 때 그 의도를 경계했을 수도 있지만 석경당의 행보를 볼 때 그냥 거란에 대적할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석경당 본인의 조카 대에 괜히 거란에게 저항하다 망한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고려도 당시 갓 통일된 터라(석경당이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를 마감시켰다.) 내정을 정비해야 했으며 후진도 당시 남쪽에 오월, 남당, 남한 등의 십대 나라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에 거란 견제는 석경당과는 비교도 안되는 후당의 이존욱조차도 그저 거란의 침공을 물리친 정도로 끝냈지 거란을 역으로 침공하는 건 못했다.

우습게도 그렇게 원하던 황제가 된 석경당은 유지원이 자립하고 토욕혼이 이반한 후에 조덕균, 안중영 등의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그들의 반란을 진압못하는 것을 거란 황제에게 책망을 받게 되자[8] 근심하다 승하하고 만다. 황제가 된 뒤 고작 6년 만이었다. 후계자 아들 석중예는 어리다는 명분으로 형의 아들 출제 석중귀에게 찬탈당하고 이어 석중귀조차 거란에 적대하다 패함으로써 후진은 멸망한다.

석경당의 매우 나쁜 역사적 평가를 입증하듯 그가 사후 묻힌 현릉은 현재까지도 남아있지만, 인근에 쓰레기가 마구 버려져 있는 등 보존상태가 상당히 개판이다.

6. 평가[편집]

대사를 꾀하는 초기에 오랑캐를 불러 원조를 받아, 이때부터 오랑캐의 기세가 강해졌고, 백성들이 이로 인해 재앙에 빠졌다. 후사에게 이르러,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군대를 부려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온 겨레가 사로잡혔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중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무려 두 번이나 배신한 데다 즉위 이후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기병 양성의 요충지인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에 통째로 넘겨 진시황 이래 북방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최전방의 보루인 만리장성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것이 문제. 전통적인 한족 중심 사관에서는 항상 평가가 박했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아예 매국노를 뜻하는 '한간'(漢奸)으로 규정하며 맹비난한다.

다른 오대십국시대의 군주들(특히 개국군주)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면이 한두 개쯤은 있었다.
  • 후당 태조 이극용 또한 황소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고 한때는 주전충보다도 더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다. 그러나 실수와 악재가 겹쳐 유능한 인재를 연달아 셋[9]이나 죽이고 나중에는 유인공의 배신에 화가 나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등 말년에는 실패만 거듭했다.
  • 후당 장종 이존욱은 주전충을 꺾고 야율아보기[10]를 물러나게 하는 등 군사적 능력도 출중했다. 그러나 내정에 실패해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에게도 버림받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후당 명종 이사원의 치세는 내치와 외치에서 준수한 성과를 거두어 오대 국가들 중 드물게 안정적인 시기였다.
  • 후한 고조 유지원은 거란 군대를 몰아내고 중원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 후주 태조 곽위는 치세를 안정시키며 세종(후주)에게 제위를 물려줄 정도의 안목도 있는 사람이었다.[11] 후주 세종 시영은 천하의 반 정도를 제압해놨고 오대를 제외하면 최강국이던 남당도 후주에 패배하며 세력이 꺾였다.
  • 송 태조 조광윤은 찬탈로 시작했지만 찬탈 과정도 다른 왕조들에 비하면 꽤 온건하게 지나갔으며 무엇보다 500년 넘게 지속된 찬탈 후 전 왕조 몰살을 중단시켰으며 오히려 전 왕조에 단서철권을 내려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공신들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배주석병권이라고 조용히 병권만 내려놓게 하고 아무도 안 죽이고 적당히 대접해주는 것으로 끝냈다. 그리고 과거제를 실시하고 사대부를 키우기 시작하는 등 내정에서 큰 업적을 거두었고 외정으로는 북한과 오월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제압해 오대십국시대의 종결을 앞당겼다. 이후 단명하지 않고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 넘게 이어지게 되었다.

요나라에 넘긴 연운 16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요충지를 잃은 중원은 내내 거란에 시달리며 송나라 시기까지도 그중 2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만다. 송나라는 건국 당시부터 요나라라는 강국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 이러한 한족 문명의 열세는 비단 요나라 시기에 끝난 게 아니라 금나라, 원나라까지 이어졌다. 금나라의 발흥 이후 북송의 몰락 및 칭기즈 칸, 원나라의 흥기까지 생각하면 중원의 주도권을 유목민족에 거의 400년 이상[12] 넘겨주었으니,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사를 나쁜 의미로 바꿔놓은 인물이다. # 연운 16주는 이후 명나라가 몽골을 초원으로 내쫓는 과정에서 되찾게 된다. 다만 이후 한족 입장에 한하여 본다면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당하면서 다시 빼앗겼다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하게 되면서 다시 되찾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주(계, 탁 등), 삭주 등의 연운16주가 얼핏 보기에는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면적의 영토가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라 그곳의 지형이다. 원래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험준한 방어 요충지를 성벽으로 이어서 건설하였는데 이게 바로 만리장성이었고, 이후로 이 만리장성을 의지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방어해 왔는데 연운 16주는 그 만리장성 바로 이남에 위치한 곳들이다. 즉, 하북 평야 지대를 방어하는 노른자로 비유될 정도의 중요한 지정학 요충지,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인 말의 집산지로 이곳을 잃음으로써 유목 민족의 대규모 기병 편제에 보병 중심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이 이후로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쳐내려올 수 있었을뿐더러 이 지역에서 나는 물자를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 연맹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이다.

거기에 더해 진시황 이후로 1,000년 넘게 중국 고대사를 관통하며 내려 온 보물 중의 보물인 전국옥새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6] 한나라의 건국자 한고제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흉노의 아우가 된 바 있다.[7] 심지어 이후에도 없었다. 가장 초라할 때가 남송 초기, 남송 황제가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황제 책봉을 받으며 세공을 바치던 때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금나라 황제가 남송 황제에게 여진족 옷을 입히고 책봉식을 치르게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해릉양왕의 개뻘짓과 그 뒤에 남송의 공격 기타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 새로 즉위한 금세종은 군신관계를 숙질관계(숙부-조카관계)로 완화하고 세공을 세폐로 변경(세'공'의 공은 바친다는 의미다.)해 감축하는 등 남송과 화평을 맺었다.[8] 토욕혼은 거란의 지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데 유지원이 그들과 내통한 것을 알게 되어 거란 측이 유지원을 처벌하라고 항의한 것이다. 문제는 석경당이 다른 번진들의 반란을 진압한다고 유지원의 세력까지 제압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4. 대외 관계[편집]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간 여걸이었으나, 당시 한나라의 대외적인 국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변방에서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이 득세하여 계속 세력을 불려나갔다. 매일같이 식량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납치당했으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초한대전의 타격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수가 타고 다닐 이 없어서 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백등산 포위전에서 아예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비참할 정도로 쳐발린 이후로는 매년 굴욕적이지만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무명, 비단, , 곡식 등을 보내주는 등 한나라측에서는 처절할 정도로 흉노 측에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굴욕적인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유방이 죽은 뒤 여후, 문제, 경제가 집권한 시기에도 그 구도가 지속될 정도였다.
문언문(文言文): "孤僨之君,生於沮澤之中,長於平野牛馬之域,數至邊境,願遊中國。陛下獨立,孤僨獨居。兩主不樂,無以自虞,願以所有,易其所無。"

백화문(白話文): "我是孤独寂寞的君主,生在沼泽,长在牧養牛馬的草原,我多次到边境来,希望能到中原游览一番。陛下独立为君,也是孤独寂寞,一个人居住,我们两个寡居的君主都很不快乐,无以自娱,还不如我们兩人互相交換,用自己有的東西,來交換自己沒有的東西."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 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

ㅡ 흉노의 선우 묵특이 여후에게 보낸 편지. 출전 : 《한서》(漢書) 권(卷)094 상(上)

심지어는 흉노선우 묵특으로부터 위와 같은 "우리 둘 다 짝이 없고, 즐길 것도 없는데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면 어떨까"와 같은 편지를 받기도 했다.[34]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성희롱적인 편지를 받고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개시하려고 했고, 이때 번쾌가 노망이 났는지 아니면 처형이(즉 자기 가족이) 성희롱당했다는 모욕감에 눈이 돌아갔는지 자신에게 100,000명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조정을 선동했는데 다른 신하들도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계포만이 혼자 나서서
"번쾌를 참하십시오. 선황제조차 400,000명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라는 발언으로 기를 죽여버렸다. 신하들은 계포의 말이 맞지만 여태후의 총애를 받던 번쾌에게 일갈을 한 계포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태후도 내심 지금 흉노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말려줬다고 판단한 것인지 계포에게는 별 일이 없었다.[35]

사실 이건 둘째 문제고 애당초 당시 한나라는 흉노를 토벌할 만한 군대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방 생전에도 백등산 포위전을 마지막으로 중앙정부 단독으로 10만 단위의 군사를 동원한 적은 없었으며, 반란이 일어나도 언제나 수만 명 규모의 형벌부대만 꾸린 뒤 현장에서 병사를 지원받아 체급을 불리는 식으로 해결했다. 문제는 유씨 제후왕들과 죄다 원수를 진 여후에겐 이런 수법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훗날 남월과의 분쟁 때 빈약한 수준의 원정군만 보냈고, 이 원정군도 눈 뜨고 당하기만 하는 추태를 보이며 이런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36]

하는 수 없이 여후는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했으며 계포의 발언에 대해선 불문에 부쳤다. 여후 본인의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남월의 조타와 시비가 붙었을 때는 한사코 원정군을 고집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혜제가 반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여태후 본기>에서 혜제가 조왕 유여의 독살건으로 미쳐서 칩거했다고 하는 얘기는 다른 일화들과 교차할수록 신빙성이 의심되는데다가, 심이기 에피소드를 보면 혜제가 정말 열받으면 여후도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두 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

ㅡ 여후가 흉노 선우 묵특에게 보낸 답신

결국 흉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탓에 꾹꾹 눌러 참으며 위와 같이 "이 몸은 늙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치욕적인 회신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이에 묵특도 이를 미안하게 여기며 "그냥 떠 본 말이었는데 너무 심하게 들어갔구려. 정말 미안하오."라며 사과했고 이후에도 여후는 흉노 정벌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그전과 같이 계속 흉노의 비위를 맞춰주는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지속하게 된다.[37]

한편, 기존에는 한나라의 제후 왕국 위치에 있었던 남월을 철기 교역 금지로 자극해, 조타가 황제를 자칭하고, 한나라의 남쪽 변경을 맡은 장사국이 남월군의 공격을 받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단 여후도 남월에 반격을 하긴 했지만 베트남을 공격한 자들이 으레 그렇게 되듯이 되레 습기와 전염병에 피해를 보고 물러나서 조타만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2년 후에 한문제가 즉위하고 육가가 파견된 후에야 조타가 황제 칭호를 포기하게 되었다.
 
[34] 이를 흉노의 문화 중 하나인 형사취수로 해설하는 견해도 있다. 흉노가 보기엔 한나라의 족장이 죽고 그 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며, 마침 그들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흉노족은 죽은 형제의 처를 취함으로써 그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흉노도 한나라와 교류가 잦았기 때문에 서로 문화를 아예 모르지는 않았으며, 진지하게 혼인을 고려했다면 더 예를 갖추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35] 사실 이때 한나라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초한전쟁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엉망이 돼서 전후 복구에 집중해야 했는데다가 유방 자신도 흉노에게 대패했다. 신하들 중에 인물이 없지는 않았으나 초한대전을 겪은 개국공신들은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 때였다.[36] 사실 백등산 전투에서도 묵특 선우가 대단하긴 했지만 한나라도 흉노를 상대할 병사를 긁어 보내서 충분히 상대할 만하긴 했다. 결국 유방이 대패하면서 다시 한 번 흉노를 공격하는 건 힘들었는데 이미 초한대전으로 인해 백성들의 수가 워낙 많이 줄고 경제도 피폐해져서 국력 자체가 심히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진나라의 백기~초나라의 항우로 이어지는 무차별적인 대학살로 인해 중원의 인구 수가 심각하게 줄었다는게 문제였다. 인재 자체는 한신, 팽월, 영포가 죽었지만 워낙 유방의 인재풀 자체가 넓다보니 한가닥하던 공신들도 다수 남아 있었고, 유방의 후손들 중에서도 똘똘한 이들도 적지 않아서 인재가 없다고 보긴 힘들었다.[37] 이 여태후의 한을 풀어준 것은 한나라의 제7대 황제인 세종 무황제 유철이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흉노와 이민족 토벌, 대토목 공사를 과도하게 남발한 나머지 문경지치로 회복한 국력을 날려먹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 여파는 전한이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