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사대부의 대부'지만, 불교에 심취했던 목은(牧?) 이색(李穡)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12]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13]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의 재능)가 없다." 하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듯하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았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승려인 혜근(나옹선사)의 비문과 인각사 무무당기[14]를 써주는 등[15] 불교와 친하게 지내곤 해서 이후 성리학자들에게 내내 까였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16] 조선이 숭유억불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 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였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7]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물론 이름만으로 천 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 일단 사후 628년 동안 이름 남기기는 성공했다.



유교의 종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어서 이 점이 두고두고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거꾸로 불자였던 이성계는 불교를 믿는 것이 유학자들인 신하들에게 공격받을 때마다 어색하게 "유학의 종주인 이색도 불교를 믿었는데 그럼 니가 이색보다 잘났냐?" 같은 꼰대식 반박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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