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치안을 자신하고 자위대를 확장하려고 했던 아베 신조가 정작 같은 일본인이자 전직 자위대원 출신에게 암살당했듯이, 전통 힌두주의자 마하트마 간디 역시 같은 힌두교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2.4. 인도의 독립, 분열, 혼란 그리고 암살[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으며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
이라고 칭했다. 결국 인도 아대륙이 분할되어 독립하자 간디는
"나는 125세까지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명분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라며 크게 상심했다. 독립 기념일 연설과 독립에 관한 외신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무시할 정도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로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는 힌두교 집단과 이슬람교 집단 간에 준 내전에 가까운 유혈 충돌이 지속되었다. 특히 국경 지대인 동부의 벵골과 서부의 펀자브에서 가장 심했다. 간디는 벵골 지역의 콜카타에서 두 종교 집단 간의 폭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단식을 했다. 이 단식은 상당히 위독한 지경까지 가서 당시 증오로 가득차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던 무슬림과 힌두교도 당수들이 급히 화해를 했다.

콜카타에서 4주 정도 머문 간디는 펀자브로 가기 위해 델리로 떠났다. 델리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난민들이 이슬람교의 모스크를 파괴하고 무슬림들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델리의 옛 왕성 중 하나인 푸라나 킬라로 피신해 있었다. 간디는 푸라나 킬라를 방문해 공포로 가득차 있었던 무슬림들을 위로했다. 간디는 펀자브에 가려는 생각을 일단 중지하고 델리에서 1개월 동안 난민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했다. 그는 무슬림에 대한 공격 행위가 늘어나자 또 단식을 시작했다. 1948년 1월 13일, 간디는 델리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형제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격 보수파 힌두교 신자들은 간디가 힌두교의 카스트 교리를 부정하며, 무슬림을 인정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적대시했다. 결국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17분, 7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암살을 당하던 날, 두 증손녀의 부축을 받아 그를 환영해주는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당시 5일간에 걸친 단식 끝에 너무 몸이 쇠약해져서 부축을 받았다. 평소에도 두 증손녀가 간디를 부축하곤 했는데, 간디는 이들을 '나의 걸어다니는 지팡이'라고 불렀다. 이 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인사하며 마하트마의 발을 만지려고 했다. 이에 간디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보답해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몸을 일으켜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든 뒤 정면에서 세 발을 쏘았다. 간디가
"아! 라마여"
라고 신의 이름을 부른 뒤 그의 몸이 땅 위로 쓰러졌다.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간디의 증손녀들과 주변의 군중들은 이 암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은 힌두교 극단주의 과격파였던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 1910 ~ 1949)였다. 나투람 고드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사형 판결을 받아 1949년 11월 15일에 암발라 중앙 감옥(Ambala Central Jail)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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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 독립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의 마지막 말
" हे ! राम" (Hē Ram, 아! 라마[7]여)
이었다. 간디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암살 다음날인 1월 31일 야무나 강 남쪽의 라지가트에서 화장되어 여러 개의 유골함에 나눠지고 2008년에 아라비아 해에 뿌려졌다. 화장터에는 간디의 유언이 새겨진 검은색 대리석 대좌가 잔디밭 가운데에 놓여 있다. 당시 인도의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가 참석하여 추모사까지 지어 애도했으며 수많은 인도인들이 간디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날 무려 2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와서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다. 1951년 기준 델리 인구가 174만 명 정도였던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였던 셈이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슬림이 힌두교도인 간디를 죽였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범인이었던 나투람 고드세는 힌두교도로서 반 이슬람 극단주의 힌두교 무장단체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회원이었다. 나투람 고드세는 간디에게 권총 베레타 M1934을 발사한 후에 도망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며 전혀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엄청나게 분노한 민중들에게 붙잡혀 대번 권총을 뺏기고 죽지 않을 만큼 실컷 두들겨 맞았으며,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간디의 암살자를 죽이라는 욕설을 실컷 들었다. 이후에 다음해인 1949년 11월 15일, 공범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간디를 싫어하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간디를 암살한 것은 인간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강력히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이도 독립 문제로 간디와 몇번 만나며 안식이 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훗날 간디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군중이 무슬림의 짓이라고 외치자 무슬림이 죽인 게 아니라고 외쳤고
"만약 무슬림이 간디를 죽였다면 인도에서는 전면적인 내전이 터졌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간디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죽일 이유가 없었다. 간디가 죽기 몇 달 전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싸우던 곳에 간디가 나타나자 며칠 만에 서로 화해하고 축제를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니까.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가 속했던 힌두교 극단주의 단체 라시트리야는 지금은 합법 정당이 되어서 인도에서 잘나가고 있다. 현재 인도의 여당인 인도 인민당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물론 나투람 고드세는 이런 정황을 떠나 좋은 소리를 들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살인 범죄자이다. 또한 라시트리야는 자신들이 시킨 적이 없다고 했기에 무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간디의 영향력을 보면 제아무리 극단주의 단체인 라시트리야라고 해도 정말로 간디를 죽여버리면 분노한 인도 정부에게 당장에 박살날 것이 분명해서 죽일 생각을 못했다. 인도 정부가 직접 안나서도 종교를 떠나 인도의 절대 다수의 민중들에게 지지받는 간디인 만큼 정부에게 박살나기 전에 분노한 민중들에게 먼저 처참하게 박살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투람 고드세는 법정에서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가 간디를 죽인다고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하고, 나는 파멸과 증오만 받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재판에서 그가 남긴 말에 의하면
"간디의 비폭력 투쟁과 불복종 운동은 자신도 존경하던 것이었으나, 간디는 이슬람 편만 들었을 뿐, 힌두교도들이 이슬람에게 박해받는 걸 무시하고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것으로만 해결하려고 들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독립한 인도가 강해지는 것을 막는다"
라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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