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통해 생각해보는 고려대의 敎示(교시)는 자유, 정의, 진리가 프랑스 혁명의 표어처럼 매우 위험한 이유

 

 

古文(고문)의 힘

 

 

한문 중에서도 연대가 오랜 古文(고문)은 읽는 맛이 사뭇 다르다. 형용사나 수식어가 적어서 마치 直球(직구)를 던지듯이 말하고 있다.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어논리도 없이 그냥 툭-하고 내뱉고 있다.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고려도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식이다.

 

기원 전 200-300년 경, 장자가 생각을 글로 옮길 적만 해도 종이에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竹簡(죽간)이라 하는 대나무 조각에 칼로 글을 새겨야 했기에 대단히 수고로웠으리라. 이에 당시의 모든 문장은 최대한 압축적이다.

 

나 호호당은 이처럼 압축적인 古文(고문)에 매료된다.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 말이고 글인데, 심지어는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분쟁도 생기고 권력자 앞에선 때론 목숨을 잃기도 했는데 옛 한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냥 스트레이트로 생각을 밖으로 던진다.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향해 던진다는 느낌이다.

 

오늘날 현대문에서 이런 直心(직심)의 문장은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에서나 느껴볼 수 있다. 김훈 선생은 말한다, 우리 시대의 언어는 타락해있다고. 김훈 선생은 또 말하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고. 그 분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세속에선 위험한 말들

 

 

나 호호당은 고려대학을 나왔다, 고려대의 敎示(교시)는 자유, 정의, 진리이다. 먼 옛날 입학 당시 참으로 멋진 교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선 그것들이 참으로 위험한 말들이라 여긴다.

 

자유, 정의, 진리, 그것이 무엇인지는 ‘절대자’의 영역이라 여긴다. 저 말들이 인간 사회로 들어오면 위험해진다. 인간 세상에선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다르고 너의 진리가 나의 진리가 다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인 까닭이다. 정의라든가 진리와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끝도 없이 싸우게 만든다.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면서 상대를 제거한다.

 

 

버려야만 편할 것 같은데...

 

 

이에 장자는 말하고 있다, 아니 말했다 무려 2천년하고도 3백년 전에. 세상의 모든 가치, 소중한 것은 큰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권력과 명예 따윈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라고. 진리와 정의란 것 역시 차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이니 세속의 모든 것들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터럭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투쟁과 게임을 비웃고 있다. 그 까이 꺼 별 거 없어! 하면서 코웃음 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그 가을에 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머리가 띵-했다. 이게 뭔 소리야? 했다. 하지만 당장 대학엔 가고 볼 일 같았고 긴 인생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니 일단 不問(불문)에 붙였던 莊子(장자).

 

그 이후 긴 세월 사이에 간간히 다시 접해왔고 그럴 때마다 받는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밤늦은 이 시각 다시 읽어도 여전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그저 별 게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길 때만이 대자연과 더불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마구마구 직구를 날려 오고 있는 莊子(장자)이다.

 

장자의 저 말들은 따르기가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그 무엇을 버리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유란 결국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omething, 그런 면이 있다. 물론 우리 모두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유로울 수가 없다. 먹고 산다는 것은 싸운다는 것이고 누군가를 젖히고 올라서야 하는 일이며 때론 누군가를 제거해야 하는 끔찍한 일도 견뎌야 한다. 먹고 살려면 독해야 하고 독해져야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저 유명한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란 말씀 또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길 때만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말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 넌 그냥 가난하게 살다가 가라 해도 군말 없이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 쉬운 얘기가 아니다.

 

 

이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릴 때도 있으니 내가 돌았나? 

 

 

그러니 문득문득 죽음이야말로 安息(안식)처럼 다가올 때도 많다. 죽으면 자유고 나발이고 진리고 정의고 그런 따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오래 살아서 본전은 다 챙겼고 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946 [희희락락호호당: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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