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일상의 언어에서 가능성을 제한하는 표현들을 제한해야 한다 - 프랑스 68혁명의 구호였던 Il est interdit d'interdire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처럼
어떤 사람이 어떤 블로그에서 Grok이 뭔지 묻고,
"GROK가 뭔지 몰라 찾아봤네요. 쉽게 말해서 인공지능이군요..
저는 현대 문물의 비약적 발전을 따라잡지 못해요."
라고 댓글을 단 것에서 순간 퍼뜩 영감이 떠올랐다.
저렇게 말하면 곤란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두번이라서 괜찮은 게 아니라, 한두번이라도 주의해서 표현해야 하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비트켄슈타인이라는 놈이 멋드러지게 말했듯,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 문물의 비약적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중장년'이라는 관념망이 형성되면,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어디까지나 그런 인식, 그런 사람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는 자기 스스로 가능성이라는 파도에 돌을 던지고 파문을 일으켜야 한다.
이를테면 이렇게 '전환적 사고'를 해보는 것이다.
"나는 현대 문물의 비약적 발전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이 활용할 수 있게될거야. 과거의 50대 60대들은 뒷방 늙은이들이었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전 덕택에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나이는 관계없어. 참 좋은 시대지."
이렇게 생각하면 무의식의 회로가 재정립되고, (만약 신사고운동이 맞다면) 현실 역시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빨려들어오지 않을까 싶다.
자기 스스로의 한계에서 벗어나 세계관을 무한히 확장하는데 가장 쓸모있는 언어유형은 아무래도 부정어보다는 긍정어일 것이다.
1970년대 중동에 파견된 평범한 건설직 노동자라면 그 비도 안오고, 무덥고, 말도 안통하는 이국만리의 나라에서 중노동을 한다는 상황에 오만상을 찌푸렸겠지만, 정주영 같은 사람은 비범했기에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를 바라봤다.
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펼쳐진다.
정주영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다음의 사례처럼.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1년 12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물은 기름을 우리나라로 싣고 와서 비우고 갈때 유조선에 물채워 감)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 대통령은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를 가지고 일해 왔다.
안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는다.
기업은 행동이요 실천이다.
-정주영-
해서, 가능하면 생각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좋고,
행동은 섬세하면 섬세하루록 좋다.
G. M. Trevelyan의 말처럼,
"젊은이에게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절대 말하지 마라. 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를 수세기 동안 기다려 왔을 수도 있으니까."
남들이 비웃더라도, 무모해보이더라도,
결국은 미치광이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자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1000조의 재산을 벌 수 있다고 믿고,
절세의 미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인류의 생활습관,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언젠가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말해줄 수 없는 문제다.
당연히 현실적인 확률로 생각하면 가능보다는 불가능한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당연해보이는 '현실'이 발목을 잡아서 세계관의 확장을 막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세계관의 제한은 곧 인식의 제한, 현실의 제한으로 실체화된다.
하여, 도스토예프스키나 다치바나 다카시는 리얼리즘의 극한에 달하면 초현실주의가 펼쳐진다고 했던 것이다.
마치 극미시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을 깊이 연구해보니, 물질의 궁극에는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현실적 세계가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다.
오, 과연,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현실이 부조리해보이더라도,
형이상학의 굳건한 토대는 영원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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