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 전쟁과 갈등, 협력의 역사 정리
https://n.news.naver.com/article/262/0000018603
● 트럼프 재선 후 캐나다 겨냥 전방위 공격
● 국경분쟁으로 캐나다 ‘국가 정체성’ 공고화
● 1890년 매킨리 관세법, 트럼프 관세정책과 닮은꼴
● 트럼프 “51번째 주” 발언, 캐나다 안보 불안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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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1년 5월 17일 캐나다 의회에서 발언한 연설문 속에 포함된 가슴 뭉클한 메시지다. 케네디의 연설은 지리적 현실의 불변성에서 출발한 양국 간의 우정과 협력이 의도적 선택으로 진화해, 결국 역사상 가장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승화됐음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성서적 신화의 오라(aura)가 더해지면서 단순한 인접국 관계가 동맹국 사이의 신성한 계약으로 변모됐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69년 3월 25일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쥐스탱 트뤼도 전 총리의 부친)는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양국 간의 우정·동맹·유대를 격정적으로 찬미했던 케네디와 달리 한층 ‘썰렁한’ 말투로 다음과 같이 냉랭하게 ‘화답’했다.
“당신 옆에 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코끼리와 함께 자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짐승이 아무리 친절하고 차분하더라도―만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그가 내는 모든 움직임과 소리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연의 저주’로 변질된 ‘자연의 축복’
1969년 트뤼도의 발언은 뼈마디가 시릴 정도로 적확하게 오늘날 캐나다가 당면한 고단한 현실을 예언한, 촌철살인의 명구다. 트럼프 시대에 들어 ‘우호적이고 차분하던’ 코끼리는 ‘주먹을 휘두르고 고함을 내지르는’ 맹수로 돌변했다. 코끼리의 모든 ‘주먹질과 고함’은 터무니없는 안보 위협(캐나다가 미국에 가한다는)에서부터 느닷없는 고율 관세(25%)와 끊임없는 합병 조롱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에는 지리적 인접성이 양국을 천생연분의 동맹으로 맺어준 ‘자연의 축복’이었지만, 지금은 캐나다를 인접 강대국의 예측 불가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시킨 ‘자연의 저주’로 변질된 모양새다.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지구상에서 가장 우호적이고 평온한 국경선을 마주한 국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던 미국·캐나다 관계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급전직하하는 추세다.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를 정조준해 동시다발적·전방위적으로 호전적·공격적 언사를 퍼붓는 데 있다.
첫째, 무역 및 경제 면에서의 호전적 발언이다. 2월 1일, 트럼프는 취임식이 끝난 지 며칠 만에 “마약과 불법 이민에 대한 국가안보 우려”를 이유로 모든 캐나다 수입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3월 들어 캐나다(온타리오 주)가 미국에 공급하는 전기세를 인상한 데 대한 보복으로 캐나다산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50%로 인상했다가 나중에는 25%로 확정했다. 특히 트럼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이 캐나다에 매년 200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24년 기준 미국의 대(對)캐나다 무역적자는 450억 달러 수준이며, 대부분은 미국의 에너지 수요에 따른 것이다. 또한 캐나다가 미국의 무역 파트너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교역 규모가 큰(2024년 기준으로 약 7800억 달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캐나다의 자동차, 에너지, 목재가 필요 없다”고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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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캐나다 국가안보에 대한 비판이다. 트럼프는 직접적 군사 공격을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캐나다의 국방 및 안보 관계에 대해 여러 허위 주장을 펼쳤다. 먼저 그는 캐나다가 국방에 국내총생산(GDP)의 1% 미만을 지출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자료에 따르면 실제 비율은 1.37%다. 사실 그 수치는 NATO 회원국 목표치인 2%에 턱없이 모자라 ‘안보 무임승차국’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다. 또한 지난 1월에는 “미국이 기본적으로 캐나다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하며 캐나다가 국방을 위해 공정한 몫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캐나다를 포함한 NATO 회원국이 현재 2% 목표에서 5%로 방위비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는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만들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대신 “경제적 압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넷째, 국경 수비 및 외교 측면에서의 공격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캐나다가 미국과 맞닿은 국경선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경제적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와 관련 백악관은 “캐나다와의 북부 국경에서 발생한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캐나다가 마약과 불법 이민자의 유입을 방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2월 1일부터 부과된 고율 관세는 국경 수비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마약, 특히 펜타닐과 모든 불법 이민자가 우리나라(미국)에 대한 침공을 중단할 때까지” 관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5월 신임 총리 마크 카니는 백악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캐나다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아니며, 절대로 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카니는 트럼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동산 중에서도 절대로 팔 수 없는 매물이 있다”며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백악관), 그리고 당신도 방문했던 버킹엄궁전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캐나다는 51번째 주’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트럼프에게 에둘러 면박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한사코 “절대란 말을 절대로 하지 말라”며 뒤끝을 남겼다.
미국·캐나다 전면전쟁과 그 후유증
캐나다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적 공세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5월 9일자 ‘포린폴리시(FP)’는 “미국·캐나다 간 전쟁계획의 오랜 역사”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핵심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양국 간의) 분쟁이 종종 워게임 시나리오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캐나다가 지금은 가까운 동맹국이지만, 오랜 역사에 걸쳐 양국 간의 전쟁계획이 빈번히 언급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국경을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극 지역까지 ‘확장’하고,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병합’하고, 파나마운하를 ‘탈환’하겠다는 트럼프 발언을 계기로 미국·캐나다 사이에 때 아닌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례로 트럼프의 호전적 발언이 나온 이후 “캐나다 침공” 관련 구글 검색량이 급증하고, 캐나다 언론이 양국 간 전쟁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실제로 양국은 1812년 6월부터 1815년 2월 사이에 나폴레옹 전쟁의 일환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양국 간에 발생한 유일한 전면 전쟁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미국·캐나다 간 전쟁은 상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평화 무드가 깨지고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초반 약 3년 동안 치렀던 미국·캐나다 전쟁의 배경, 원인, 결과 및 그 이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캐나다 전쟁이 더 넓게는 미국·영국 전쟁의 맥락에서 벌어졌으므로, 지금부터는 ‘1812년 미국·영국전쟁, 또는 1812년 미·영전쟁’으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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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812년 미·영전쟁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의 일부로 간주하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나폴레옹 전쟁과 별개로 벌어진 전쟁으로 본다. 프랑스 제1제국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영국은 프랑스의 대외무역을 막기 위한 해상봉쇄를 감행했다. 미국은 이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반발했지만, 영국은 해상봉쇄를 강행했다. 당시 영국은 미국인 정착지를 공격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인디언)을 지원해 아메리카 대륙의 확장(서부개척 등)을 추진하던 미국 정부의 분노를 초래했다. 1812년 6월 18일,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은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812년 전쟁은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에 묶여 있고, 미국은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와 재정난에 시달리는 등 양측 모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됐다. 전쟁 초기에 미국의 캐나다 침공 시도는 디트로이트와 퀸스턴 하이츠에서의 패배로 좌절됐다. 영국 해군은 미국 해안을 봉쇄하고 워싱턴 DC를 불태우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미국도 이리호 전투 승리로 서부 지역에 대한 인디언의 위협을 제거하는 등 부분적 전쟁 목표를 달성했다. 일방적 승리가 불가능함을 인식한 양국은 1814년 헨트 조약 합의로 전쟁을 종결했다. 캐나다에 이 전쟁은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중대한 승리”인 동시에, “독립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으로 평가된다.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 새로운 정체성 의식에 힘입은 캐나다의 저항은 캐나다 민족주의의 강력한 촉매제로 작용해 캐나다가 독립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다음으로 1812년 미·영 전쟁 이후의 긴장과 국경지대 불안(1830~70년대)의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12년 전쟁 이후에는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경지대에서 불안과 소규모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내내 미국·캐나다 국경에서 긴장 상태가 지속됐다. 먼저 아루스툭 전쟁(Aroostook War·1838~1839)이다. 이는 메인주(미국)-뉴브런즈윅주(캐나다) 사이의 모호한 국경선을 두고 벌어진 무혈 충돌로, 평화조약에 경계선 설정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이 벌목꾼과 정착민들을 서로 체포하며 긴장이 고조되고, 미국·영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1842년 웹스터-애슈버튼 조약(Webster-Ashburton Treaty)으로 국경선이 확정됐다. 다음으로 오레곤 국경 분쟁이다. 광대한 태평양 북서부를 둘러싸고 미국·영국의 경쟁적 주장이 충돌했다. 이 문제는 1846년 오레곤 조약을 통해 외교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됐다.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에 트렌트 사건(Trent Affair)이 발생했다. 1861년 당시 북군이 영국 우편선 ‘RMS 트렌트호’에서 남군 외교관들을 체포한 사건으로 미국·영국 간 외교적 위기가 촉발됐다. 영국·캐나다가 병력·물자를 신속히 캐나다 국경에 배치하며 긴장이 고조됐고, 캐나다 민병대는 즉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결국에는 외교적 협상으로 위기가 진정됐으나, 이 사건은 미국 내전이 국제분쟁으로 확산될 위험성을 보여주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페니언 습격(Fenian raids)은 오늘날의 캐나다를 탄생시킨 결정적 사건이다. ‘페니언’이란 용어는 1860년대 아일랜드 급진주의자 집단, 특히 ‘페니언 형제단’의 미국 지부를 지칭한다. 이들의 목표는 캐나다를 인질로 삼아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영국을 상대로 싸우는 페니언 형제단(준군사집단)을 묵시적으로 도왔다. 1866년 6월 나이아가라 국경에 대한 대규모 공격(특히 리지웨이 전투)과 퀘벡·매니토바에 대한 소규모 침공 등을 감행했지만 군사적 열세, 대중적 지지 부족, 캐나다 민병대와 영국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모두 좌절됐다. 이들의 습격은 실패했지만 의도치 않게 캐나다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결과적으로 페니언 습격을 계기로 캐나다의 각 주가 외부 위협에 공동으로 대항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1867년 ‘캐나다 연방’이 탄생하는 데 기여했다. 이 위기를 계기로 캐나다는 최초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방군 창설, 나아가 연례 민병대 훈련 군사개혁에 착수하는 등 오늘날 캐나다 군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요약하면 19세기 내내 지속됐던 국경분쟁, 소규모 충돌 등은 캐나다의 ‘국가 정체성’ 공고화와 독특한 ‘안보 정체성’ 형성에 강력한 촉매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캐나다와 미국의 공식적 전쟁 계획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19세기 미국이 북미 대륙 전체를 몽땅 차지하는 것이 신의 뜻이자 미국의 운명이라고 믿었던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당시 미국은 이러한 영토 정복 지향적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캐나다 전역의 병합을 노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인구밀도가 낮은 서부 캐나다 지역에만 관심을 보이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동부 캐나다에는 무관심했다. 역설적으로 퀘벡의 프랑스계 인구(구교·가톨릭)가 대거 유입되면 미국의 정체성(신교·기독교)이 훼손될 것이라는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적 우려가 캐나다의 완전한 점령을 막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당시에도 미국은 영토 병합의 핵심 수단으로 경제적 강압을 구사했다.1890년 매킨리 관세법(McKinley Tariff Act)은 미국의 수입관세율을 38%에서 49.5%로 인상했다. 이는 당시 미국 시장에 의존하던 캐나다 경제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캐나다는 이를 ‘경제전쟁’으로 간주해 저항했고, 결과적으로 영토 점령을 노린 미국의 경제적 압박은 실패로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6월 4일 미국은 캐나다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해 50%의 고율 관세(기존 25%의 두 배) 부과를 선언했다. 1890년의 매킨리 관세법과 2025년의 트럼프 관세정책은 닮은꼴이다. 모두 캐나다 제품에 대한 높은 관세를 통해 경제적 압박을 가하려는 시도다. 1890년에는 캐나다의 강력한 반발과 독립적 경제 전략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말 세계가 글로벌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캐나다 사이의 비공식적 긴장과 단발성 갈등은 공식적 군사전략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캐나다의 전쟁계획이다. 1921년 제임스 브라운 중령은 상부 명령에 따라 ‘방위 계획 1호(Defence Scheme No. 1)’를 수립했다. 이는 미국과 무력충돌이 벌어지면 ‘선제적’으로 미국을 침공해 철도망·통신망을 파괴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고, 전 세계에 분산된 영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캐나다를 방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계획은 태평양 지역의 시애틀·포틀랜드, 중서부의 파고·미니애폴리스, 동부의 올버니·메인주 등 5개 축선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상정했다. 그러나 영국과 사전 협의가 없었던 탓에 비현실적·자살적 계획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 계획은 미국·영국 간 평화를 중시한 캐나다 군사 지도부의 결정으로 1928년 폐기됐다. 캐나다는 이를 계기로 자국의 안보를 대영제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 자국이 글로벌 분쟁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선제적’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 등을 절감했다.
다음은 미국의 전쟁 계획이다. 캐나다의 ‘방위 계획 1호’에 대응하는 성격으로 1920~30년대에 걸쳐 미국은 영국과의 가상 전쟁 시나리오에 대비한 ‘워 플랜 레드(War Plan Red)’를 수립했다. 이 계획에서 미국은 ‘블루(BLUE)’, 영국은 ‘레드(RED)’, 그리고 대영제국의 일부인 캐나다는 ‘크림슨(CRIMSON)’으로 코드화됐다. 미국은 영국과 벌인 전면전에서 신속한 승리를 확보하려면 캐나다 영토를 우선 점령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이 계획은 전략적 요충지인 퀘벡-토론토 사이 지역을 신속히 장악해 캐나다를 동·서로 양분하고, 캐나다 최대의 항구인 핼리팩스를 점령해 영국 증원군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또한 미국의 전쟁 계획은 전략적 병참기지로서 파나마운하가 가진 잠재적 취약성을 예민하게 인식했다. 미군이 파나마운하를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할 경우, 운하가 영국군의 공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손상되거나 파괴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대서양-태평양 간의 미군 병력과 보급물자 이동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이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철저한 군사적·병참적 준비를 수반했다. 1935년에는 캐나다 국경 인근에 비밀 공군기지를 구축해 개전 초부터 신속히 캐나다 영공을 제압하려 구상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공개되는 사고가 발생해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질책을 받았다. 또한 이 계획은 워게임과 병력 배치 시뮬레이션을 거쳐 갱신됐고, 캐나다 영토 점령 후에 이를 미국의 새로운 주(state)나 준주(territory)로 편입하는 후속 전략까지 포함했다. 이 계획은 1974년까지 비밀로 유지됐고, 공식 승인을 받거나 실행 단계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 플랜 레드’는 양국 간 평화와 협력이 유지되던 시기에도 상호 신뢰보다는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전쟁계획, 심층적 안보 통합으로 진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도래는 미국·캐나다 관계를 잠재적 적대관계에서 명시적 동맹관계로 전환시켰다. 일례로 1940년 오그덴스버그 협정(Ogdensburg Agreement)을 통해 양국은 ‘서반구 북부방위’에 대한 공동 책임을 명시한 상설합동방위위원회(Permanent Joint Board on Defense)를 설립했다. 이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AD)와 NATO 같은 전후 동맹의 토대가 돼 양국의 군사·방산·경제·외교 분야를 ‘전면적·의도적·심층적’으로 통합시켰다. 냉전 기간에 캐나다는 NATO 참여를 통해 미국에 대한 ‘취약성 감소’, 나아가 일방적 의존이 아닌 상호의존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또한 북극 국가로서 갖는 지위와 ‘유능한 해결사(the helpful fixer)’라는 국제적 이미지를 활용해 NATO 내에서 소프트파워를 확대하고 미국의 일방적 영향력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수십 년간에 걸친 긴밀한 안보 통합에도 불구하고 북극 지역은 미국·캐나다 간 근본적 불일치가 지속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캐나다는 북부 군도 내 수역을 배타적·주권적 영해로 주장하는 반면, 미국은 이를 국제해협으로 간주한다. 1985년 미국 쇄빙선 폴라 시(Polar Sea)호가 캐나다에 사전 통보 없이 북서 항로를 통과한 사건은 이러한 긴장을 극명히 드러냈다. 최근 들어 기후변화로 북극 항로의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급등하면서 잠복해 있던 양국 간 국제법적·영토적 분쟁이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와 그린란드의 영토 ‘병합’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긴장 및 오늘날의 전략적 이익과 맞물리며 향후 미국·캐나다 관계의 새로운 긴장 요인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캐나다 ‘51번째 주 편입’ 발언과 ‘경제적 강압’을 앞세운 영토 병합 위협에 대해 캐나다 국민의 90%가 미국 편입에 반대하며, 54%가 트럼프의 의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토론토대학의 아이샤 아마드(Aisha Ahmad) 교수는 미국이 캐나다를 침공하면 “수십 년간의 게릴라전”이 불가피하며 캐나다인 중에서 1%만 참여하더라도 미국은 탈레반의 10배 규모인 40만 명의 반란군을 상대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미국이 캐나다를 적대국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폭력을 자제할 것이며, 만일 실제로 미국·캐나다 전쟁이 벌어지면 보급품 부족과 국경의 다공성(多孔性·porosity)으로 장기 저항이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또한 혹자는 이런 시나리오 자체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과거 미국의 캐나다 침공이 실패했던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트럼프의 “허풍과 구두 위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트럼프의 신중치 못한 무분별·무개념·몰상식 발언은 NATO 동맹을 약화시키고, 러시아나 중국 같은 적대국에 영토적 야욕을 정당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미국을 “경쟁국에는 한없이 유약하고, 동맹국에는 맹렬히 적대적인” 국가로 보이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는 미국이 광범위한 전략적 비용을 쓸데없이 치러야 함을 의미한다.
상기의 ‘이상한’ 시나리오는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라 미국·캐나다 관계를 지속적으로 형성해 온 복잡다단한 지정학적·경제적·정치적 요인의 산물이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캐나다 간에 우정과 협력이 지속되지만, 표면 아래서는 비대칭적 세력 불균형과 경쟁적 이해관계, 그리고 역사적 긴장·갈등·불신으로 형성된 상이한 국가 정체성이 드러난다. 결국 케네디가 칭송했던 “자연적 유대”는 트뤼도가 경고한 “코끼리와의 불편한 동거”로 귀결됐다. 이는 지리적 근접성이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지닌다는 냉혹한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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