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싫어하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일본에서 '정정'의 화두를 던진 아즈마 히로키

 
나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으며, 부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친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해의 정정’뿐이다. ‘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거듭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내 세계관이다.
--- 「3장 친밀한 ‘공공권’ 만들기」 중에서



일본에는 이 변화 = 정정을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 정치인은 사과하지 않는다. 관료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세운 계획은 변경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틀리다(誤る)’와 ‘사과하다(謝る)’는 모두 ‘아야마루’로 발음이 똑같은데, 이 둘은 원래 어원이 같다. 지금 일본인은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정정하는 힘은 역사수정주의와는 다르다. 이 책은 결코 과거를 자기 입맛에 맞게 수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하는 힘은 과거를 기억하는 힘이고, 정정하기 위해 사죄하는 힘이다. 역사수정주의는 과거를 망각하기 때문에 정정도 하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확실하게 의식했으면 한다.

인간은 약한 동물이다.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친다. 증거를 여럿 제시해 이성적으로 토론하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동영상과 SNS의 시대에는 이 경향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탈진실)와 음모론이 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정정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약하다. 오류를 범하는 존재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오류를 정정하는 것뿐이다.

데이터는 넘쳐나지만 의외로 종합적인 체험은 빈곤하다. 콘텐츠의 양은 넘쳐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욕구불만이 쌓여가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도 지금은 인터넷 서점과 전자책에 의존하고 있지만 젊을 때는 열심히 오프라인 서점과 도서관에 들렀었다. 책장 사이를 거닐며 처음 보는 책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독서라는 행위도 실은 이와 같은 체험과 하나였던 것이 아닐까?
--- 「1장 왜 ‘정정하는 힘’이 필요한가」 중에서

역설적이지만, 전진하려면 옛것을 회복해야 한다. ‘사실 …였다’라는 완충제가 없으면 사회 개량은 뿌리내릴 수 없다. 이는 지금까지 특정 게임을 하던 아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게임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새 게임을 도입하려면 아이들을 계속 놀게 하면서 조금씩 규칙을 바꾸어가는 수밖에 없다. 새 게임은 옛 게임을 정정하는 방식으로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자 나리타 유스케가 과거에 “노인들은 집단 자결하는 편이 낫다”고 발언한 것을 누군가 찾아내 사회적인 비판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철면피다, 인간이 아니다 등등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나는 그 발언을 매우 경제학자다운 합리적인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합리성만으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리타의 발언은 비현실적이고 단순하다. 현실의 인간은 과거를 잊지 않는다. 매몰비용도 버리지 않는다.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노인을 소중히 여긴다. 왜 인간은 그러는 것일까? 나는 이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며, 그 답이 정정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 「2장 ‘사실 …였다’의 역동성」 중에서

정정하는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우선 고유명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기서 고유명사가 되라는 것은 결코 유명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주변 사람에게 직업이나 직책 같은 속성으로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을 뛰어넘은 누군가’로 판단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으며, 부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친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해의 정정’뿐이다. ‘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거듭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내 세계관이다.
--- 「3장 친밀한 ‘공공권’ 만들기」 중에서

영원히 옳은 객관적 역사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사(스토리)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도 서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새로운 발견 앞에서 ‘사실 …였다’며 정정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정 행위도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 또한 객관적일 수는 없다. 정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 「4장 ‘소란스러운 나라’ 되찾기」 중에서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우라사와의 “밥 딜런도 정정하는 사람이었어”라는 말에 큰 힘을 얻었다. 밥 딜런과 나, 그리고 우라사와와 나를 비교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오랫동안 일을 해오다 보면 자기 자신을 정정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독자의 얼굴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이 책을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 무언가 하나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나오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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