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 vs 자유의지론

1.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진짜 핵심적인 일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질문들을 해보자.

 

내가 나의 부모를 선택한 건가?

내가 내 외모나 육체를 선택했나?

내가 의식적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건가?

내가 의식적으로 숨을 쉬는 것인가?

내가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있나?

내가 음식이 없으면 존재할 수 있나?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셋팅되었을 뿐이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불교의 연기법으로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네 인생 전체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연기 법계 전체의 틀 속에서 이루어짐이 분명해진다.

 

무한하고 무량하며,

무시무종(無始無終)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한 하나가 

통으로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굴리는줄 모르고,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2.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 집단무의식, 브라만, 알라, 부처, 참나, 진여, 무아, 연기, 우주, 도... 뭐라고 이름 붙히든,

각각의 개체적 자아를 넘어서는 배후의 실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불가사의한 예지몽과 아주 가끔씩 들어맞는 무속인들의 신점을 설명할 수 있다.


해서,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

또는 '인드라의 망'이라는 표현은 실로 시의적절하다 할만하다.

 


3.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운명'이고 '자유의지'인 걸까.

 

불교적으로 생각한다면

'너'와 '나'의 분별은 망상일 뿐이므로,

자유의지와 운명론이라는 이분법 역시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정해주고,

내가 그것을 꼭두각시처럼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는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된,

시간이 끊어진 자리 속에서 언제나 존재해왔으며,

무수히 많은 '나'의 운명을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실시간으로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정해져 있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I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i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당장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왜 사는가, 왜 죽는가" 같은 햄릿풍의 인생의 중차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놀랍게도 이 둘은 논리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충되지 않는다.

 

선의 종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기 때문이다.

 


4.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한 가장 좋은 비유는 아마 파도와 바다일 것이다.


바다는 파도가 무엇을 하는지 알까, 모를까?

 

물론 바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다는 파도가 자신의 개성을 뽐내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그것이 크게 물결치든, 작게 물결치든, "너 하고 싶은만큼 힘껏 해봐!"하고 그저 내버려둘 뿐이다.


어차피 파도가 뭔 짓을 해도 다시 자기 본성인 바다로 돌아올테니까 말이다.

 

아니, 돌아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파도와 바다는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파도의 입장에서 보면,

파도는 분명 바다라는 배경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더 적절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파도라는 배역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리어왕을 연기하는 셰익스피어 극단의 배우처럼 말이다.



5.

그렇다면 상기한 이야기를 어떻게

'신사고운동'이나 '끌어당김의 법칙'과 조화를 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하나의 난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현실로 끌어당겨진다"는 이야기를

"모든 것은 연기법(전체성)의 인연관계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야기와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운명론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것은 기본적으로 불립문자의 영역에 속하며,

언어의 장난만 벗어나면,

관점에 따라 서로 조화를 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직접 행동하는 양의 관점에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맞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음의 관점에서는 운명론이 맞는 것이다.

 

내가 i의 상태에서 보느냐, 또는 I의 상태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현상이 다르게 비춰질 수 있고,

이 두 가지 다른 관점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다.

 

물론 i보다는 I가 더 근본적인 밑바탕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표현보다는,

없다는 표현이 조금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끌어당김을 해서 현실이 바뀐다면, 그렇게 끌어당김을 해서 현실이 바뀌는 사건이 처음부터 연기법적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적절한 때에 현실을 바꾸고 싶어하는 적절한 감정상태가 내 내면에 들어왔고, 그 힘을 받아 끌어당김을 하여 현실이 바뀐 것이다.

 

현상적으로 봤을 때는 나의 감정상태가 파동과 공명의 형태로 현실을 직접적으로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깊숙히 들어가보면 그것조차 시절인연의 밑바탕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시절인연이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는 우리가 특정한 상에 대한 끌어당김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어떤 거대한 마음 속 장벽이 가로막는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겁에 질려, 또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무기력함에 빠져, 그 시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니까 이 경우, 우리는 우리가 끌어당김을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오직 적절한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야만 특정한 상에 대한 끌어당김을 실천할 수 있는 적절한 내면적 토대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운명론 (연기법)이 우세한 것이고, 현상적으로는 자유의지론 (끌어당김의 법칙)이 맞는 것이지만, 결국은 불이법의 측면에서 보면, 같은 동전의 다른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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