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빌리 브란트의 정치 이력: 미국 방첩부대 첩보원 출신, 비서는 동독 스파이, 정계은퇴는 섹스 중독 때문
출생 및 가족사가 워낙 복잡한 관계로 그의 가족사는 그가 정계에 진출한 1949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내용을 대부분 철저히 함구했고, 지인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때문에 적어도 브란트가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족사의 상당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무성한 의문과 의혹을 낳기도 했다. 그는 사망하기 3년전인 1989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의 진실을 처음으로 어느정도 정확하게 밝혔다. 이후 그의 사후 언론에 의해 구체적인 사실이 일부 탐사되기도 했는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달리 미화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특히 1948년 이전 그의 행적 및 가족사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빌리 브란트 본인의 진술 및 저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정계 입문 시절부터 그가 은퇴한 이후까지 남긴 다양한 진술과 증언, 저서들에는 상충되는 내용들도 있다. 그의 충직한 전기 작가들조차도 그가 진술한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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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인 2021년 그가 1948∼1952년 미국 방첩부대(CIC)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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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na.co.kr/view/AKR20211219058000082?section=international/all
1차 오일 쇼크의 충격이 여전하던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20] 빌리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브란트는 이를 철저하게 부인했으며, 브란트가 이에 관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심각하게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만 공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1]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일화인데, 당시 그는 방한중이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와의 면담에서 김대중이 언제 독일이 통일되겠냐고 묻자 "먼 훗날" 이라고 답했는데, 몇시간 후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독일로 귀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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