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화, 신사고운동의 철학적 문제점

 
의문점이랄까, 비판점 세 가지.

(1) 이런 '끌어당김'류의 이야기는 전생윤회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반드시 윤리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우리 관념의 소산일 뿐이라면,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주 어린 나이에 잔혹하게 사망한 케이스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불행한 현실을 창조했다고 말할 건가요? 갱단이나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납치당해 잔인하게 고문을 당해 죽은 의인들 역시 그들의 그릇된 관념으로 그런 현실을 창조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피해자들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마찬가지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평소 추락이나 죽음에 대해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쯤은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피해자'들은 '피해'의 관념을 만들어내서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유형의 사건 사고들을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면 불교나 힌두교에서 하는 것처럼 전생의 카르마를 끌고오거나, 아니면 끌어당김과는 정반대로 모든 사건들을 철저한 유물론적 우연의 산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물론 전생의 카르마로 현생의 사건사고들을 설명하는 것에는 또 그것 나름의 위험성과 여러가지 윤리적 문제들이 있죠. 마치 7살이었을 때 한 행위를 59살이 되서 처벌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2) 내면의 심리상태나 '끌어당김'만으로는 현실이 펼쳐지는 원리를 설명하기에는 제약사항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돈에 대한 욕망'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에 대한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부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부자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그렇다면 혹자는 돈에 대한 결핍감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자들도 관념의 스펙트럼은 천차만별입니다. 돈에 대한 결핍감이 전혀 없는 부자들도 있겠지만, 돈에 대한 결핍감이 심한 부자들도 많습니다. 부자들 중 일부는 자신이 일군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누가 훔쳐갈까봐 스쿠루지 영감처럼 계속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또 다른 일부는 돈의 노예가 되어 더더욱 돈에 집착을 하며 살아갑니다. 미국의 부자들이 더 크고 비싼 럭셔리 요트와 승용차 등 명품을 구입하면서 다른 부자들과 과시경쟁을 벌이는 것처럼요. 반대로, 아프리카나 남미, 서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는 물질적으로는 결코 풍요롭지는 않지만, 자신이 정신적으로 부유하다고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음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풍요로운 생각/정신/감정상태가 정말로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냈던가요?

그러니까 '심리상태=현실 창조'라는 간단한 등식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모두 비슷한 심리상태를 공유하고, 빈자들이 모두 비슷한 심리상태를 공유한다면, 끌어당김의 법칙에 실효성이 있겠지만, 현실은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답니다.

차라리 유전자/사주팔자/카르마 등 처음부터 선천적, 운명적 요소를 강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부자가 될 사람, 천재가 될 사람, 장애인이 될 사람, 연예인이 될 사람, 학자가 될 사람, 살인마가 될 사람, 범죄자가 될 사람 등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일정한 퍼센티지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심지어는 끌어당김을 하는 사람들 자체도 일정한 퍼센티지로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끌어당김을 해서 정말 현실이 바뀐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설정'된 '배역'들만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를 할테니까요.


(3) '끌어당김'에 대한 이야기는 자유의지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반대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증거로도 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면, 즉 타인의 행동과 의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님의 무의식적 의도가 친구의 무의식에 연결되어 그 친구로 하여금 숙박과 관련된 무의식적 제안을 하게 만들었다고 님이 암시한 것처럼), 역으로 타인 역시 그들의 행동과 의도로 나의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자유의지와 운명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겉보기에 "나의 생각과 느낌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창조력과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주장같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이 짜놓은 관념 속에서 행동하도록 '강제'되고 있으며, 온전히 자신의 생각과 느낌만으로 현실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 됩니다.

혹자는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처럼, 자유의지론과 운명론을 양립시키려는 시도를 여기서도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가 자유의지를 통해 자신의 소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우주와 타인의 우주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배후의 어떤 존재 또는 힘이 매순간 양자가 서로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이루게끔 예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예컨대 X의 내면에 분노가 가득한 상태라면, 배후의 존재 또는 힘이 똑같이 내면에 분노가 가득한 Y를 연결시켜주어서 두 사람이 충돌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경우, X와 Y는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충돌한 것이 됩니다.

다만, 님이 여행을 가서 좋은 숙소에서 머물고 싶었는데, 때마침 친구가 그런 숙소를 님에게 소개해줬다면, 그것은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는 설명이 어렵겠네요. 님과 친구가 우연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배후의 존재 또는 힘이 연결시켜 준 것(예정조화)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러우니까요. 님의 생각이 친구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낫겠지요. 그렇다면 이 경우, 님의 친구는 님의 관념, 인식, 또는 관찰에 의해 생각이 변화한 것이므로, 일순간이나마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채로 무의식적으로 숙소와 관련된 특정한 관념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p.s. 완전히 미친 해석도 하나 추가해볼 수 있겠네요. 만약 님의 주장처럼, 나의 관찰에 의해 현실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철두철미한 사실이라면... '우리'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존재했던 것은, 또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니까요. 내가 존재하기에 이 세상도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사라지면 이 세상도, 이 세상의 역사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님은 친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님이나 친구나, 또는 이 댓글을 쓰는 나나, 사실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힌두교에서는 이 기묘한 존재의 이원성을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라고 표현하죠. 관찰자는 항상 언.제.나, 1인칭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관찰에 의해 바꿀 수 있을지언정, 타인이 나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계까지 논의하게 되면, 결국 나와 타인, 나와 세상, 사랑와 증오, 자유의지와 운명 같은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 즉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실은 언어 이전의 형상 저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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