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재] 사랑받는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운명적으로 사랑을 택하게 되고, 증오받는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은 운명적으로 증오를 택하게 되니, 그 누가 인간의 삐뚫어진 모습들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 두 명의 남자가 있다.


A는 태어날 때부터 미남이었고, 유복한 집안에 3대 독자로 듬뿍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했고, 학창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다. 구태여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왔다. 이성과 연애도 많이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탄탄대로의 삶을 살게 된다.

 

반면, B는 찢어지게 가난한 판자촌에서 태어났고 외모도 기형아처럼 기이하게 못생겼다.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었는지 키도 작았다. 어릴 때부터 수시로 부모로부터 폭행을 당했고, "너같은 건 그냥 죽어버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듣고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것에 익숙했고, 이에 대한 반항심으로 학창 시절에는 불량배들과 함께 어울렸다. 자연스럽게 범죄의 길로 빠져들게 되어 전과 16범이 된다. 구치소 생활도 오래 했다. 몇 차례 복역한 후에는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다 자신을 모욕한 직장 동료와 몸싸움을 벌이다 둔기로 그를 수 십차례 내리찍어 잔인하게 죽이게 된다. 수사기관에 의해 구속이 되었고, 신상 공개가 결정되어, 전국에 얼굴이 팔리게 된다. 네티즌들은 B에게 나가 죽으라는 악플로 그를 인신 공격하며 물어 뜯는다.

 

자, 예서 A와 B의 인생을 비교해보자. A는 평생 사회로부터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살아온만큼 그 사랑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B는 평생 사회로부터 차별을 넘치게 받으며 살아온만큼 그 차별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A와 B는 각각 환경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

 

태어난 환경과 자라온 환경을 인간 각자가 선택할 수는 없으며, 어린시절에 잠재의식에 각인된 (좋은, 또는 안 좋은) 기억들은 평생의 인생 행로를 좌우할 수도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의

첫 문장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아직 어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남의 말에 곧잘 화를 내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는데, 그 후로 나는 그 충고를
마음속으로 항상 되새기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남의 잘잘못을 따질 때는 언제든지 이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실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약 95%는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부조리한 자연 질서와 사회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희생자들이고, 피해자들이다.

 

예수가 성경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고 대중들을 일갈했듯이, 과연 B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만큼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간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까 선악의 문제, 즉 윤리의 문제는 대중들의 생각만큼 그렇게 단순하게 흑백논리에 입각해서 판단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조금 더 신비주의적으로 생각해보면, 외모든 지능이든 재능이든 재력이든 (특히 외모가) 남들보다 우수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예정된 것인 바, 전생에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전생에 지극히 불행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 한을 풀기 위해서 (이를 '해원'이라고 말한다) 이번 생에서는 그런 '축복받은' 조건들을 부여받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외모든 지능이든 재능이든 재력이든 (특히 외모가) 남들보다 열등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더 많이 받게끔 예정된 것인 바, 전생에 많은 사람들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강인한 영혼이기 때문에 일부러 어려운 조건들 속에서 태어나 정신을 수행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주가 그로 하여금 용기백배하여 위대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의도로 일부러 그런 환경에서 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맹자 역시 <고자장>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불교적 신비주의를 적용하여 생각한다 한들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남는다.

 

만약 우주가 각 개체에게 기계주의적인 인과응보를 적용하여 환생시킨다면, 전생에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세상을 증오하게 된 인간은 다음 생에서도 그 업보로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세상을 더욱 더 저주하게 될 것이며, 이 사이클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반대로 전생에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세상을 사랑하게 된 인간은 다음 생에서도 그 업보로 사랑을 받는 환경에서 태어나 세상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이며, 이 사이클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우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의 부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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