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미국 남부에서 흑인노예들을 부려먹던 민주당은 20세기 초~중반 노조와 농민 조직에 의존했다가 1960년대 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의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계기로 여성, 흑인, 대학생, 성소수자에게 어필하는 정당으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한다; 친일 지주계급이 뿌리인 한민당에서 장면, 윤보선의 신파, 구파가 갈라져나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당으로 이어진 한국 민주당의 이미지 세탁의 역사와 실로 흡사하다
조지 맥거번: 노조와 농민 조직에 의존했던 민주당의 특징을 벗어나 대도시의 여성, 흑인, 대학생,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선거운동이 민주당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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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회의장에 있는 모든 상원의원들이 미국 청년 5만 명을 너무 일찍 묻히게 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 본회의장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여기 모든 상원의원들은, 미국의 청년들을 폐인으로 만든 부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월터 리드 군병원과 베데스다 해군병원, 그리고 이 땅 곳곳에서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성기가 없거나, 얼굴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청년들 말입니다."1970년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투표 이전에 한 연설. 결과적으로 투표는 55대 39로 맥거번의 패배였다.
1962년 다시 한번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겨우 597표 차이로 당선된다. 상원 활동 초창기에는 하원 경력과 비슷하게 농민들의 권리를 적극 대변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동료 초선의원이자 대통령의 동생이었던 테드 케네디도 농업 관련 법안에는 적극적으로 맥거번의 조언을 구했다. 한편 핵전쟁 시대의 국방정책을 탐탁지 않게 여겨 지속적으로 국방예산의 감축을 제안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소극적인 반대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1965년 남베트남 순방 도중 생지옥을 목격하고는 상원 전체에서 가장 급진적인 반전(反戰) 의원으로 거듭난다. 꾸준한 반전 연설로 재야 반전 운동권 인사들의 주목을 받아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경선출마 하라는 권유를 받는데, 상원 재선을 준비해야 했던 맥거번은 처음에는 고사하지만 재선 전망이 좋지 않자 뒤늦게 출사표를 던진다. 경선에서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에게 밀려 낙선하지만 상원의원 선거에서 전직 주지사였던 공화당 후보를 생각보다 여유로운 득표 차로 제치며 재선에 성공, 의정활동을 이어나갔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야합에 가까운 후보선출 방식 때문에 폭력사태를 초래하자, 경선과정을 전폭적으로 바꾸는 특별 위원회가 맥거번을 필두로 출범한다. 직접선거인 프라이머리 방식을 확대 추진하고 흑인, 여성 및 청년 할당제를 신설하는 개혁안은 현재도 거대양당이 모두 따르고 있다. 한편 상원에서는 국내 빈곤을 다루는 영양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닉슨 정부와 푸드 스탬프 제도를 놓고 대립각을 세운다.
하지만 대표적은 행보는 여전히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닉슨의 베트남 정책을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비판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평화적인 반전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얼굴을 보였다. 그의 반전 행보는 1970년 국방예산안에 "1년 이내 미군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추가할 것을 건의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으로 절정을 찍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와 지상파 TV 토론 방송 자금을 마련하는 등 맥거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수정안은 미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만, 상원에서는 큰 표차이로 통과하지 못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맥거번의 전쟁 혐오는 극에 달하여 남베트남 정치인들을 비난하거나 호찌민을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는 위험한 발언들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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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드디어 숙원이었던 베트남 전쟁 종전이 이루어졌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종전 후에 민간인을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으니 남베트남 난민들을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 인도주의적인 행동"이라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보트피플들의 베트남 귀환을 적극 권장하는 법안을 제출했다가 좌우막론하고 욕을 얻어먹었다. 잠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했지만,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정치 경력의 대부분을 동남아시아 문제의 군사적 개입에 극렬히 반대해온 그지만, 1978년에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 킬링필드의 참상에는 맥거번도 개입을 찬성했다.
- 생전에는 우파 성향 미국인들로부터 Mad McGovern(미친 맥거번)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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