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석유 이야기 2: "전후 1989년까지 미국은 64차례 타국의 정권교체 쿠데타를 실행했다." (Lindsey A. O'Rourke) / 1909년 중동에서 페르시아만 오일 발견된 이후 중동은 국제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된다; 빅터 로스차일드 케임브리지대 친구인 킴 필비의 아버지 존 필비가 BP의 부름으로 이란 석유개발에 몰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윈스턴 처칠의 승인 하에 CFR/BP 이사였던 앨런 덜레스와 월가 로펌 Sullivan & Cromwell 주도로 CIA/MI6는 석유 국유화를 노리던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축출시킨다; 1954년 모사데크 축출 및 원유 컨소시엄은 세계 최대 규모의 원유 강도 사건 - 라자 팔레비는 보상금으로 석유값을 BP에 싸게 공급

https://www.youtube.com/watch?v=XpC6qiZVHcg

 

3. 평가[편집]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 작전이 전략적 이유로 정당화된다고 봤지만, 쿠데타는 명백히 이란 정치발전의 후퇴였다. 미국의 이 개입에 왜 이란인들이 계속해서 분노하는지 알 수 있다.

ー 메를린 울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2000년#


미국은 당시 커밋 루스벨트[5] 주도로 모사데크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도우면서 팔라비 왕조의 철권 통치를 지원한 것으로 두고두고 이란인들에게 원성을 샀고 훗날 1979년 혁명 이후의 단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란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모사데크가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중동 최초로 이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는 회한을 토로하기도 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모사데크를 팔라비 왕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이니는 골수 시아파 이슬람 근본주의자여서 어떤 면에서는 팔레비 왕조보다도 세속주의와 연성 사회민주주의[6]를 추구했던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라며 혐오했다. 특히 이슬람의 종교인들은 무력과 야합한 신정일치 체제를 오랫동안 지켜온 중동의 뿌리깊은 기득권 세력이라, 사유재산의 침해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는데, 호메이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7] 다만 서방 세력으로부터 이란의 국익을 지키려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는지 공적으로는 이란 내에서 추앙받는 인물로, 특히 이란에서 보수적인 통치에 이견을 가진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인물이다. 이란 내에서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개혁파들도 모사데크를 모델로 내세운다. 이란의 세속주의적 성향의 반체제 인사들도 모사데크 전(前) 총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지, 팔라비 왕조를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란의 현 신정 체제가 무너지고 나면 포스트 이란 체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팔라비 구(舊) 황족들은 권력 참여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팔라비 왕조로의 복고를 반대한다. 실제로 팔라비 왕조의 무능한 정치가 이슬람 신정 체제로의 퇴행에 단단히 한몫한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흐름.

2000년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의 미국 국무장관이 과거에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를 도운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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