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도미에: 1833년 2월 석방된 후 도미에는 자신이 경멸했던 정권과 사회를 계속해서 풍자해나갔다. 당시 프랑스를 움직이는 것은 상층 브루주아지들이었다. 동시에 프롤레탈리아의 삶은 점점 힘들어져만 갔다. 도미에는 국민의회의 집단초상화를 통해 의원들의 졸고있거나 소란스러운 모습, 부패를 저지르는 모습을 통해 의원들의 추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1808-1879)
1. 오노레 도미에는 마르세유 출신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마르세유에서 유리장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시인의 꿈을 안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일을 접고 파리로 이사를 가게된다. 이에 도미에는 7세부터 파리에서 생활하게된다. 궁핍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도미에는 12살부터 법률회사의 심부름꾼, 서점 직원 등의 일을 하게된다. 이때의 경험이 정치적 풍자를 하게된 자양분들이 쌓이지 않았을까 싶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도미에였지만 가정형편 상 예술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고고학자 마리 알렉산드르 르누아르(Marie Alexandre Lenoir)의 조각을 옮기는 일을 하는 등 미술적 영향을 받는다. 그러는 와중에 루브르 박물관등을 오가며 독학으로 회화연구를 계속한다.14세에 그는 리소그래피기법(석판에 유성잉크로 찍어내는 판화 양식을 통해 회화와 유사한 양식의 판화를 찍는 실험을 하였다. 1825년 상업인쇄소에서 일하기며 인쇄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1830년, 7월 혁명 이후 검열이 완화되며 삽화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31년 도미에도 새로 창간된 잡지사인 라 카르카 튀르의 만화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의 작업세계는 크게 두가지 챕터로 나눌 수 있는데 1830년부터 1847년까지의 석판화, 만화, 조각등의 작업과 1848부터 1871까지의 인상파 작업이다.
2.도미에는 허풍스러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주로 좌파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는 1831년, 석판화로 제작된 작품 가르강튀아를 공개한다. 가르강튀아는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에등장하는 식탐많은 거인의 이름이다. 이는 부유하고 사치에 열광하며 굶주린 국민의 세금을 끝없이 먹어치우는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Louis-Philippe d'Orléans)을 패러디 한 것이다. 왕의 정부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도미에는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 중 2개월은 국가교도소에서, 4개월은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왕은 자신을 반대하고 희화하는 자는 미친 사람인 자임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3. 이러한 처벌을 내린 루이 필리프는 누구인가? 루이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으로, 프랑스에서 왕 다음가는 권력가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태어난다. 오를레앙 가문은 부르봉왕가의 먼 친척으로 왕족이긴 했으나, 그 핏줄이 끊기지 않는이상 왕이 될 일은 없는 만년 2인자 집안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왕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가문의 한계였는데, 아버지 루이필리프 조제프 오를레앙은 프랑스 혁명의 기류를 읽고 서민의 지지를 얻어 왕 자리를 차지할 아이디어를 낸다. 그래서 자신의 성을 서민들을 위해 개방하고, 공작작위를 버린 후 스스로를 '평등한 필리프'라 부르게 된다. 그에따라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은 '평등한 자의 아들'이라 불리며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육군 중장시절 자신의 사령관이었던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을 핑계삼아 프랑스에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 음모를 눈치챈 혁명정부는 그들을 파리로 복귀시키지만 루이필리프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치게 된다. 그 후 가명을 써가며 수학선생 노릇을 하다 1814년 왕정체제로 돌아가고 나서야 다시금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의 시민들은 7월 혁명으로 당시 왕이었던 샤를 10세를 내쫓고,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상층 브루주아지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 받게 된다. 이후 자신을 지지하는 상층 브루주아지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서민과 하층민을 고려하지 않고 부르주아지들의 권익에만 힘쓰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결국 2월 혁명에 의해 영국으로 망명 후 생을 마감하게 된다.
4. 1833년 2월 석방된 후 도미에는 자신이 경멸했던 정권과 사회를 계속해서 풍자해나갔다. 당시 프랑스를 움직이는 것은 상층 브루주아지들이었다. 동시에 프롤레탈리아의 삶은 점점 힘들어져만 갔다. 도미에는 국민의회의 집단초상화를 통해 의원들의 졸고있거나 소란스러운 모습, 부패를 저지르는 모습을 통해 의원들의 추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위와 대비되게, 아래의 그림은 당시 프롤레탈리아의 비참한 모습을 그렸다. 해당 작품은 1834년 4월 폭동 중에 정부군이 건물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을 때 발생한 사건을 그린 것이다. 당시 직조공들의 봉급이 지나치게 낮았고, 혁명 이후의 삶이 바뀌지 않은 것에 분노한 직조공들은 봉기를 일으킨다. 프의 극명한 대비와 널부러진 4구의 시체가 연출적으로 보여지고 있고 비극을 극대화 시킨다.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이 그림에서는 고요한 침묵만이 맴돈다.
6.1835년 검열이 강화되자 도미에는 정치풍자에서 사회풍자로 관심을 돌린다. 파리 사회의 모든 계층의 특징적인 표정과 태도를 담고자 한 것인데, 도시 중산층의 변덕스러움과 소심함, 투기꾼들의 사기( Robert Macaire ), 변호사들의 허영심, 예술가들의 자기기만, 집주인의 탐욕 등 모든 시민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7. 1851년 12월 2일의 보나파르트 쿠데타로 의회 헌법이 폐지되고 루이 나폴레옹이 독재 대통령으로 즉위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황제로 확정되었다(1852년 12월). 공화국이 몰락하기 전의 투쟁 동안 도미에는 격렬하게 논쟁적인 캐리커처를 그렸고, 쿠데타 직전 파리 유권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라타포일(Ratapoil) (1851)을 만들었다. 거만함이 부각된 묘사와 콧수염등을 보았을때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희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라타포일은 군국주의, 특히 나폴레옹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다.
8. 이후 사회적, 정치적 억압이 심해지며 1860년 그의 작품을 기고하던 르 샤리바리(le charivari)에서 해고되기에 까지 이른다. 이후 도미에는 본격적으로 유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드로잉적 기법으로 일상 생활에서 관찰한 것을 기록했다. 외곽선을 남긴채로 채색된 형상이 오히려 그 시대의 모습을 생명력있게 보여주는 듯 하다. 그의 회화작품에서는 기존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났던 캐리커처와 코믹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일상의 장면이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더 깊이 탐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깊이와 고통을 표현하며 작품세계가 확장되기에 이른다.
9.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프랑스의 혁명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조사를 진행하며 판화 위주의 작품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조각 또한 위트와 풍자가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 다수 존재했고, 말년의 회화작품은 그가 풍자예술가 이상의 입지를 가지게 할 만한 훌륭한 작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공부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의 흐름과 그 시대상을 훑어볼 수 있었는데, 매 시대에 즉각 반응하여 만들다 보니 일생의 작품이 곧 한 나라의 역사가 된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잡지나 신문의 삽화로서 작동하는 것을 넘어서 오늘날 까지 영감을 주는 작품을 다수 남긴 오도레 도미에, 좀 더 많은 연구와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출처] 예술은 어떻게 저항하는가(2)-오노레 도미에|작성자 김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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