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샤는 왜 시진핑을 겨누는 칼이 됐나 [남문희의 코리아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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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은 공산당 원로든 누구든 좌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유샤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 호(제926호)에 이어 중국발 천하 대란의 실체를 짚어본다.

지난해 1월2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퇴역 장교들을 위한 만찬에서 춘절 인사를 하고 있다.©Xinhua
지난해 1월2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퇴역 장교들을 위한 만찬에서 춘절 인사를 하고 있다.©Xinhua


장유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은 당초 시진핑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분류됐다. 두 사람은 아버지대부터 친분이 있었다. 장유샤의 부친인 장중쉰 상장은 국공내전 당시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과 서북야전군(제1야전군)에서 함께 싸운 전우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왔다고 한다.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22년 10월 20차 당대회 이후부터라고 한다. 시진핑 주석이 3연임으로 종신 집권의 문을 열었지만 당내 잠재된 불만으로 오히려 리더십 약화 현상을 보이자 이를 다잡으려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시진핑의 권력은 역설적이게도 3연임 첫해인 2023년 4월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해 3월에 연중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인대+정협)가 9일간 열렸는데 시진핑은 참석해야 할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강 이상설에 휩싸였다. 당 안팎에서는 시진핑의 독재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시진핑은 집권 2기 둘째 해인 2018년부터 매년 신년 군사훈련 개시식을 통해 군 통솔력을 과시해왔다. 군권 장악에 자신감이 붙은 2019년부터는 매년 초 ‘중앙군사위 1호 명령’을 통해 전군에 훈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지도력을 선전했다. 그러나 이 훈령은 2022년까지만 계속됐고, 2023년 이후에는 시진핑의 이름을 단 훈령이 공개되지 않았다. 군부가 그를 향해 전하던 충성 메시지도 자취를 감췄다.

흐트러진 권력 기반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군부 재장악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장유샤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두 사람 간에는 이미 나이를 둘러싸고 한 차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지도부에는 칠상팔하(七上八下)의 관례가 있다. 즉 67세면 자리를 맡아도 되지만 68세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장유샤는 1950년 7월생으로 당시 72세였다. 이에 시진핑 주석이 왜 안 물러나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장유샤가 당신은 왜 물러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시진핑 주석은 1953년 6월생으로 당시 69세였다. 시진핑 주석은 또 헌법까지 수정해서 자신의 3연임 길을 열었다. 아무도 그의 독주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장유샤가 대담하게 시진핑을 핑계대며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다.

장유샤는 같은 ‘훙얼다이(혁명 2세, 紅二代)’ 출신인 데다 시진핑이 갖지 못한 군 경력, 그것도 베트남전 참전 경력까지 가지고 있다. 그는 인민해방군 현역 장성 가운데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에 참전한 몇 안 되는 실전 경험자다. 1979년 윈난성 제14집단군 중대장 신분으로 중월전쟁에 참전해 최일선에서 지휘했으며, 1984년에는 베트남과 싸운 라오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중국군 내부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은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은 공산당 원로든 누구든 좌시하지 않았다. 본인도 ‘훙얼다이’ 출신이면서 같은 훙얼다이 출신들을 권력에서 몰아냄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

부친인 시중쉰뿐 아니라 본인도 농촌으로 쫓겨나는 등 문화혁명의 피해자로서, 당시 다른 혁명 2세대들이 군대를 가거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등 피해를 덜 받은 데 비해 자신은 농촌에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칭화대도 추천으로 겨우 입학한 데 따른 피해의식과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문화혁명이 끝난 뒤 덩샤오핑이 시중쉰의 복귀를 허용했으나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대신 광둥성 간부로 발령을 내린 데 대한 원망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버지 세대부터 겪은 수모와 고통은 시진핑이 덩샤오핑 시대의 훙얼다이 전반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는 게 중화권의 중론이다.

따라서 그의 집권 후 특히 덩샤오핑 일가나 그 노선을 추종하는 개혁 성향 훙얼다이들은 성부급(省部級·성장 및 장관급) 이상 고위직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후진타오 전 총서기의 아들 후하이펑, 원자바오 전 총리의 아들 원윈쑹,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아들 자오더 등도 권력에서 멀어지거나 탄압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장유샤가 훙얼다이 세력의 대표주자로 신망을 받았고 이 점 역시 시진핑으로서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군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해서는 장유샤란 벽을 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2023년 6월 시작된 로켓군에 대한 대대적 숙청은 도화선이 됐던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넘어 군내 장유샤 라인을 치기 위해 반부패 사건으로 일부러 키운 측면이 있다.

미국 공군대학 산하 중국우주항공연구소가 중국의 20차 당 대회(2022년 10월22일) 이틀 뒤인 10월24일 중국 로켓군 관련 보고서를 낸 게 도화선이 됐다. 보고서는 밖에서 알기 어려운 중국 미사일 부대의 자세한 위치나 미사일 발사 시스템 관련 정보를 담고 있어서 충격을 안겨줬다. 조사 결과 로켓군사령관 리위차오의 아들이 미국 유학 기간에 군사 정보를 미국 측에 제공한 것이 드러났다. 2023년 6월 리위차오 사령관은 사무실에서 끌려갔고, 부사령관 우궈화는 자살했다. 이외에도 소장 이상 장군 10여 명이 체포되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로켓군 숙청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리상푸 국방장관을 거쳐 궁극적으로 장유샤를 겨냥하는 반부패 숙청의 서막이었다.

로켓군 지휘부 날린 뒤에



중국군 장비개발부는 로켓군 지휘부를 날린 2023년 7월 말부터 “2017년 10월 이후 발생한 조달 관련 부패 신고를 받는다”라는 통지를 발표했다.

2017년 10월 이후 중국군의 무기 구매 담당은 장유샤의 후임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장비발전부장이 된 바로 리상푸였다. 그는 장유샤와 같은 파벌인 산시방(陝西幇)이다. 당시 중국 미사일엔 연료 대신 맹물이 채워져 있고 원래의 미사일 연료는 훠궈(중국식 샤부샤부)를 해먹는 데 썼다는 기가 막힌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결국 리 부장이 덫에 걸린 것이다.

결국 2023년 9월 중순부터 리상푸 국방장관 낙마설이 나돌았고 장유샤 부주석도 리 전 부장의 장비발전부 전임자라는 점을 근거로 위태롭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리상푸는 2023년 12월 열린 전인대에서 국방장관에서 잘리고 다음 해인 2024년 5월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당적과 군적이 박탈됐다. 그리고 7월15~18일 열리는 20기 3중전회(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종 추인을 받은 뒤 군 검찰로 이첩될 예정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근 10년 만인 지난해 6월17~19일 산시성 옌안(延安)에서 소집한 ‘중앙군사위원회 정치공작회의’에서 “현재 세상물정, 나라 사정, 당의 상황, 군대 분위기가 모두 복잡하고 심각한 변화가 발생했다”라며 “군에 부패 분자가 숨을 곳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또 “총자루는 시종 당에 충성하고 믿을 수 있는 자가 장악해야 한다”라며 추가 숙청을 예고했다. 그 추가 숙청의 칼끝은 군부를 대표하는 마지막 훙얼다이 장유샤 부주석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끝내 장유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시진핑이 집권 초기에 쉽게 몰아낸 일반인 출신 장성들과 장유샤는 차원이 달랐다. 그를 정리하려 하자 군 내부 훙얼다이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유샤의 부친 장중쉰 밑에서 복무했던 지휘관들이 여전히 해방군 내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아들이 굴욕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반시진핑 기류가 격화됐다. 여기에 시진핑의 독재적 행태에 불만을 품은 군 밖의 훙얼다이들도 집단 반발하며 장유샤를 구심점으로 모여들었다.

장유샤는 한때 자신이 지지한 시진핑으로부터 측근 인사들이 숙청당하자 심리적 충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안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중반 이후 심리적 충격을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시진핑이 옌안에서 장유샤의 목에 겨눈 칼이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을 찌른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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