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음모론자 인드라는 일본 근대화를 99% 국제투기자본 작품, 1%를 요코하마 요시와라 유곽 기생들 탓으로 두나, 이는 그의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무지와 편견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 당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더 빨리 받아들인 것도 인정을 해야한다; 난학의 영향을 받은 에도 막부는 이미 1774년에 스기타 겐파쿠의 근대적인 해부학 도서인 '해체신서'를 펴낼 정도였다 - 사람 몸을 해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묘사된 에피소드도 생각해봄직한데, 1853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일본에 쳐들어왔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에 애타게 동행하고 싶어하는 일본인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에 페리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메이지유신 전까지 보수적인 존황양이파도 적지 않았지만, 영국과 미국에 쓴맛을 본 사쓰마, 조슈의 지배자들은 수구보수꼴통이 득세했던 조선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고 태세전환을 해서 서구화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1868년, 1870년 두번에 걸쳐 번역된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과 1866-70년 사이 세번에 걸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당대 일본의 베스트셀러였다 - 그만큼 개화기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중국, 조선에 비해 개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하여 국제투기자본은, 감히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침략을 단행했던 역사를 지닌 그 섬나라를 아시아 대리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더 우수했다면, 파트너 관계는 일본이 아닌 조선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 그러나 당대 조선은 오일장에서 보듯 상업발달이 미비했으며, 일본에 비해 비위생적이어서 한양 곳곳에는 똥무더기가 천지였으며, 서민들의 직업윤리는 나태하고 게을렀으며, 지배층은 흥선대원군과 민비, 안동김씨 가문에서 보듯,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고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갇혀 있었다 -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를 애지중지하던 것이 당대 조선 선비들의 수준이었다; 정한론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조차 조선이었다; 청나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皇이나 명령을 뜻하는 '칙'勅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메이지 정부의 사신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애들이 이런 반응이 나올줄 예상하고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간 것이긴 하지만, 급변하던 당대 정세를 수수방관했던 조선 측 잘못도 분명 있던 것이다.
엉터리 음모론자 인드라는 일본 근대화를 99% 국제투기자본 작품, 1%를 요코하마 요시와라 유곽 기생들 탓으로 두나, 이는 그의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무지와 편견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 당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더 빨리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영국과 프로이센, 프랑스, 미국 등 당대 국제투기자본의 중심 국가들과 파트너쉽을 맺기 쉬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네덜란드 난학의 영향을 받은 에도 막부는 이미 1774년에 스기타 겐파쿠의 근대적인 해부학 도서인 '해체신서'를 펴낼 정도였다 - 사람 몸을 해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묘사된 에피소드도 생각해봄직한데, 1853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일본에 쳐들어왔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에 애타게 동행하고 싶어하는 일본인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에 페리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메이지유신 전까지 보수적인 존황양이파도 적지 않았지만, 영국과 미국에 쓴맛을 본 사쓰마, 조슈의 지배자들은 수구보수꼴통이 득세했던 조선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고 태세전환을 해서 서구화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1868년, 1870년 두번에 걸쳐 번역된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과 1866-70년 사이 세번에 걸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당대 일본의 베스트셀러였다 - 그만큼 개화기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중국, 조선에 비해 개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하여 국제투기자본은, 감히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침략을 단행했던 역사를 지닌 그 섬나라를 아시아 대리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더 우수했다면, 파트너 관계는 일본이 아닌 조선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 그러나 당대 조선은 오일장에서 보듯 상업발달이 미비했으며, 일본에 비해 비위생적이어서 한양 곳곳에는 똥무더기가 천지였으며, 서민들의 직업윤리는 나태하고 게을렀으며, 지배층은 흥선대원군과 민비, 안동김씨 가문에서 보듯,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고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갇혀 있었다 -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를 애지중지하던 것이 당대 조선 선비들의 수준이었다.
정한론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조차 조선이었다; 청나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皇이나 명령을 뜻하는 '칙'勅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메이지 정부의 사신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애들이 이런 반응이 나올줄 예상하고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간 것이긴 하지만, 급변하던 당대 정세를 수수방관했던 조선 측 잘못도 분명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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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관 출신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일본인은 외국 문명에 심취하는 자질 있는 모방자".라고 말함. 견수사, 견당사.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 4월,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 호가 일본 해안으로 표류해 왔다. 당시 집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 선원 요스텐과 영국인 아담스를 우대, 외교관으로 중용. 아담스는 영국식 범선 2척을 실제로 만들어 보이는 등 선박 제조와 대포, 화약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허가 취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정약용: 일본은 원래 백제로부터 서적을 처음으로 얻어서 읽은 몽매한 나라였지만 중국과 직통한 후로는 쓸만한 서적을 모조리 다 구해 읽었다.
- 일본은 어찌할 수 없는 왜소성이라는 숙명을 완벽주의로 극복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 쏟았다. 왜소한 사상이나 제품에 일본적인 혼을 불어넣어 천하 제일이 되는 길을 이상으로 삼았다. 일본에 총이 들어온 것은 1543년 다네가 섬에 표착한 포르투갈인에 의해서였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582년에는 일본의 총은 그 명중도와 우천시으 ㅣ기능에 있어 세계 제일을 자랑하게 되었다. 도쿠가와가 천하를 얻은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서양군 합해서 약 6만정의 총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유럽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던 프랑스 왕의 군대가 소지한 총이 1만여 정밖에 안되었다고 하니 당시 일본의 총생산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하겠다. 일본 도쿄의 인구는 이미 18세기에 세계 최대를 찍었다.
- 중국의 중화질서 거부하여, 국왕 대신 '대신'이라는 표현 만들어냄.
- 대마도 초량 왜관에 460명이 체류. 대마도 총인구 3만 중 거의 1.5%에 차지하는 대단한 비율. 자국인의 해외도항이 금지되고 있던 쇄국시대에 한 곳에 이 정도의 성인 남자가 진출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
- 조선의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통신사로 12회나 일본을 방문하여 장기간 여행하였지만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이라고는 고추, 담배, 고구마, 화투 네 가지 뿐.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유학의 개조라는 명성을 얻은 강항은 귀환 후 일본견문록에서 일본 사회에는 기술이나 물건에 반드시 천하 제일인 자가 있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에 대해서는 천금도 아끼지 않는다 기록. 일예일능주의에 주목한 거의 유일한 조선인 사절단원이었음.
- 일본은 1876년 조선을 강제로 개국시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관리, 승려 등 400여 명을 조선에 상주시킴으로써 한일 근대 외교 교섭에 있어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 한국은 초량, 왜관 같은 상주 기관을 설치하기는 커녕 일본과 일본인 연구에 열심을 보이지 않는다.
-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유교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천주교가 외세의 뒷받침을 받아 다른 무엇보다 먼저 유입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종교보다 화승총이 앞서 도입되었던 것이다.
- 1841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조난당했다가 미국 선원에게 구출되어 10년 가까이 미국 교육을 받고 돌아온 나카하마는 막부에 등용되어 외교 문서의 기안, 번역에 종사하면서 일본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 1856년 번역과 양학연구기관의 성격을 띈 <반쇼시라베쇼> -> 1860년대 양학소로 개칭하고 영학 연구에만 전념. 영학에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 독일어, 천문, 지리, 물리, 화학, 긱꽁학. 이 연구소는 후에 개성소로 개칭되어 유신 후에는 동경 제국대학으로 발전. 동경대학은 결국 네덜란드어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치 초기 초빙된 외국인 교사는 200명을 훨씬 상회
- 영어원서 번역에 매달렸던 게이오 대학의 전신 경응의숙. 1862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구미여행 견문록 <서양 사정>은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20만부 이상 팔렸다. 단 한 권의 저서로 그는 일약 문명의 교사로 우뚝 올라섰다. 이후 후쿠자와는 저서, 역서를 100여권이나 간행하여 일반인들을 계몽시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 쏟는다. 그가 간행한 책자는 외교, 정치, 교육, 군사, 역사, 지리, 풍속 등 학문의 전분야를 거의 다 망라한 것이다.
- 근대 일본인의 필독 도서 <만국 공법>, 비스마르크에 근거해 힘의 논리가 우선이라고 주장. 1864년 300부 간행되어 1965년 일본에서 복사판이 나와 외무 당국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경전처럼 널리 읽혔다.
- 사쿠마: 동양의 도덕, 서양의 과학기술. 메이지 일본의 캐치프레이즈가 됨.
- 일본식 조어 - 일본인의 신축성, 강한 지적 호기심, 유연한 사고방식
권리, 의무, 사상, 주의, 철학, 정치, 계급, 사회, 국제법, 올드미스
- 1873년에 일본이 구미 각국에 파견한 유학생은 총 373명에 달했고, 이에 소요된 경비는 문교부 연간 예산의 18%나 되었다. 또한 연간 150만 달러를 지불하면서 300여 명의 외국인 고문을 초청. 외국인 고문에 대한 월급은 최고 800엔이었는데, 1엔은 쌀 40kg의 구매력이 있었으니 800엔의 급료는 엄청난 것.
- 조선의 경우 베베르(목인덕) 이라는 통역에게 외교 고위직을 하사한 고종. 가게 기둥에 입춘격이었던 것. 1882~1908년 조선의 외교, 법률 고문으로 초청받는 자는 7명인데 국적별로는 미국인 5명,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각각 1명이었다.
- 1876년 조선이 개국되어 국권이 상실된 1910년에 이르는 30여 년의 기간 동안 조선인 학자에 의한 서양 국제법 원서의 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1877년 12월 하나부사가 조영하 예조판서에게 기증한 <만국공법>에 대한 해설서 한 권 없었다. 1877년과 1882년 10월 지석영이 <만국공법>, <조선책략> 같은 책들을 한 장소에 집중 보관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연구케 하자고 하였으나 무시당함.
- 1877년 조선은 미국과의 체결 교섭 과정에서 제1조에 있는 필수상조를 지나치게 믿었다. 미국이 반드시 도와주겠다는 확실한 약속으로 믿었다. 그러나 정작 영문판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한국이 호구였는지 알 수 있다.
- 메체니코프 일본인을 '극동의 프랑스인'이라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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