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는 화두에 대한 조주 선사의 답은 진리는 불일불이의 양변부정의 형태로 언어로는 형용이 불가하며,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는 절대계에서는 하나; 화엄교학의 사사무애나 원효의 화쟁사상도 같은 이야기

중관학 vs 유식학


하지만 대승불교 유식학의 논리도출 과정이 천부경과 생판 다른데다, 결론 또한 말만 비슷해보일 뿐 실제로는 전혀 다른 내용라는 게 문제다. 굳이 그 내용을 다 설명할 것도 없다. 불교가 절대자나 '신'을 상정하지 않는 무아/무신론적 종교이므로 천부경이 하는 주장은 불교 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란 결코 옥황상제나 신이 아니다. 게다가 대승불교에 유식학의 주장만 있는 것도 아니다. 대승불교의 기저를 형성하는 양대 산맥에는 유식학 외에도 '중관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쪽의 철학은 아예 유식학적 소양을 상당부분 거부한다.[7] 유식학 뒤에 화엄부가 있다면, 중관학 뒤에는 반야부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경전부[8]가 떡하니 버틴다.

[7] 예컨대 중관학에서는 '불일불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도 아니고 서로 다르지도 않다'라는 양변부정의 논리로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라 주장하는 유식학과 완연하게 대조된다. 중관과 유식이 대립해온 기간은 천 년이 넘고, 중관유식의 통합시도(대승기신론소) 이후에도 여전히 사상적 분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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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선사 -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조주 선사의 무()자 화두는 유명하다. 이 화두가 시작된 것은 학승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었더니 조주선사는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학승은 부처님 말씀에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스님이 왜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고 한다. . 어느 날은 다른 스님이 와서 똑 같은 질문을 하자 조주 스님은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왜 조주 선사는 같은 질문에 어느 떄는 있다고 하고 어느 때는 없다고 한 것인가? 이것이 조주선사의 무()자 화두가 된 유래이다.

이것의 의미는 있고 없음의 개념을 떠나라는 것을 말하라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답, 오답의 개념을 넘어서서 있다. 따라서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다. 반대로 있다라고 해도 맞고 없다라고 해도 맞다.

이것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다른 이의 견해가 틀리다.의 견해를 갖고 보면 해답이 없다. 마음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떠나서 보아야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진정한 부처님의 깨달음의 의미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 화두를 드는 참선수행과는 차이가 있다. 화두는 의식으로 사량분별하지 말고 참구해야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어서도 안 되지만 화두의 참구에 있어서도 있다, 없다의 견해를 떠나야 한다. 생각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 화두가 가르치는 의미도 한가지는 있다, 없다의 생각도 떠나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기 전에는 이런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나이가 들게 되니 이런 의미를 차츰 알게 되는 것 같다.

마음도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이제 조금 옅은 미소를 얼굴에 지울 수 있는 것 같다.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이다. 현상계는 서로 교류하여, 1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원효는 자신의 화쟁(和諍) 사상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쟁론(爭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이견(異見)의 논쟁이 생겼을 때, 가령 유견(有見)은 공견(空見)과 다르고 공집(空執)은 유집(有執)과 다를 것이다. 이리하여 논쟁은 더욱 야기된다. 그렇다고 하여 이 동(同)과 이(異)를 같다고 하면 자기 속에서 상쟁(相諍)할 것이며, 다르다고 하면 둘과 더불어 상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도 아니요 동(同)도 아니라고 설(說)한다.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無碍無方)하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8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 이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고 함과 같다."

 

 

和諍

불교의 철학적 개념.

2. 특징[편집]

원효의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이르는 말로 엄밀히 말하면 원효로부터 시작되어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이어내려온 사상이다. 연기론(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한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 않고 비판과 분석을 통해 보다 높은 가치를 이끌어내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다루므로 화쟁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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