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교육받은 4대 문명과 '구석기 (수렵채집)-청동기-신석기 (농경)' 연대기가 세뇌된 관념일 가능성에 대해; 기원전 12,000년경의 터키 인근의 유적지인 괴베클리 테페와 그보다 더 오래된 카라한 테페(Karahan Tepe)는 이미 이 시기부터 인류가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 아직까지 만인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 문명은 기원전 4,500년경부터 시작되는 수메르; 수메르에서 보듯 '문화'와 '문명은 다르다; 봉우 권태훈의 지적처럼, 인류는 6번의 개벽을 거쳐왔는가?

마스터 키튼

풍부한 자료 조사와 현지 취재로 유럽 역사와 정세가 굉장히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읽으면 유럽의 근현대사와 고고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다. 다만, 어디까지나 부정확한 지식이란 점은 참고할 것. 가장 사람들에게 인상깊게 남은 부분이 세계 4대 문명이란 옛날 구석기에나 떠들던 소리고 오늘날은 20개 문명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라는 대목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23개 문명의 리스트를 만들었던 아놀드 토인비 이후로 키튼의 주장이 정설이 맞다. 해당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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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인류 문명의 원류를 중국,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네 갈래로 구분해서 말하는 관습적 표현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 변법자강운동 사상가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이었던 량치차오(梁啓超)가 1900년 자신의 저서 《20세기 태평양가(二十世紀太平洋歌)》에서 언급한 이후 일본의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이 이러한 구분을 사용하면서 동양을 중심으로 확산된 개념이다. 세계 4대 문명 모두 큰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서양에서는 세계 4대 문명이라는 표현보다는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 관습적으로 비옥한 초승달(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메소아메리카, 안데스 이렇게 5~6개[1]를 꼽는다. 다만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이든 4대 문명이든 둘 다 '관습적'인 표현이며,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에서도 구대륙Old World의 가장 이른 문명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네 갈래로 간주한다.[2]

2. 내용 및 사용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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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문명을 주장한 청나라의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이른바 '4대 문명설' 역시 이러한 유행에 따라 량치차오가 중국 개화파 지식인의 관점에 따라 문명의 요람 4개를 꼽은 것이며, 이것이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준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독자적 문명들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류학 및 문화학적 지식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일본 제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동방문화학원(東方文化学院)[3] 소속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4]가 량치차오의 4대 문명론을 수용, 발전시키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이나 저서 등에서 4대 문명을 열거하여 권위를 부여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인 1952년에는 교과서 「재정 세계사(再訂世界史)」를 출간하면서 이러한 분류를 교육에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4대 문명' 개념이 유입된 것도 역시 중국 및 일본의 역사, 고고학계의 영향이다.

물론 후술하듯이, 서양의 '문명의 요람'이란 관용구도 구대륙 4개 문명에 신대륙 2개 문명을 합쳐서 6대 문명을 꼽은 것이니 고대 문명을 "n대 문명"으로 퉁치는 게 딱히 중국 중심주의적이라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문명의 요람' 관용구도 서양 내부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오늘날의 서양 선진국에서는 다양성에 대한 담론이 많이 진행되어 '마이너'하다고 여겨졌던 지역까지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2.1. 4대 문명 목록[편집]

3. 유의어: 문명의 요람[편집]

서양에서 쓰는 '문명의 요람' 개념은 한자문화권의 '4대 문명' 개념에 추가로 안데스와 메소아메리카 연안 2개 지역이 포함힌다. 단, 문명의 요람은 '문명'보다는 지리적 개념을 사용함에 주의.

서구에서 쓰는 관습인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이라는 용어가 이러한 분류법의 원조격으로, 역사학계에서 '문명의 요람'은 특히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대 문명의 발상지들을 일컫는 관용구로 쓰인다. 당초 서양에서 이 말이 유행했을 때는 이집트 문명 하나만을 의미했지만, 오늘날 관습적으론 구대륙과 신대륙을 합하여 6개(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메소아메리카, 안데스) 혹은 5개(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비옥한 초승달로 묶음)을 꼽는다. 당연히 문명의 요람을 5~6개로 퉁친 것 역시도 4대 문명 개념과 똑같이 관습적인 개념에 불과하여, 서구 학계 내부에서도 비판적으로 쓰는 개념이다.

4. 논쟁[편집]

4.1. 중화 민족주의적 개념이다[편집]

...그러니까 사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보다 중국 문명, 황하 문명이 시대적으로 떨어져요. 되게 많이 떨어져요. 1000년 이상 떨어지니까[8], 그런데 중국인들한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아 우리도 굉장히 오래된 유서 깊은 문명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엮은 거죠.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서 아무래도 뭐 인더스아시아 쪽에 있지만, 사실은 다 서구는 아니에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도. 일반적의 의미의 서구는 아닌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같은 경우는 약간 서구에 영향을 준 문명권으로 인식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이 서구에 대항할 수 있는 동양적인, 아시아적인 정체성을, 이 4대 문명이라 하는 개념을 개발을 한 것 같아요.

그냥 러프하게 이야기하면은 사실 중국에서, 중국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만든어진 개념이다라고도 볼 수가 있죠.

사실 학술적인 개념은 아니고 약간 정치적인 개념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죠.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 소장의 비판 #
4대강 유역에서 문명이 기원했다는 설은 너무 깊이가 없고 시대에 뒤떨어졌다.

대만 역사학자 쑨룽지(孙隆基)의 비판#

세계 4대 문명 개념은 한국에서 중국[9]의 근대 민족주의 역사관과, 일본 제국에서 이러한 요소를 받아들여 황하 문명을 끼워 '4대(四大)'라고 단편적으로 정립시킨 옛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이것이 관습적으로 정착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서방은 문명의 요람이라는 개념을 통해 안데스나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문명까지 두루 포함하여 구대륙 중심적 역사관의 편중을 보다 해소하였다. 문명의 요람에 포함되는지의 여부는 그것이 문화(culture)가 아니라 문명(civilization)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주요 문명의 종속 문명이 아닌 독립적으로 등장한 별개의 문명인지가 영향을 미친다.

황하 문명의 경우, 황하 외 중국 각지에서도 훨씬 오래된 문명의 모습이 포착되어 명칭이 부적절하다. 중국 외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기존의 지역 외에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던 문명 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특히 서아시아는 최초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답게 아예 한술 더 떠서 추정 연대가 매머드가 생존해 있었던 기원전 1만 년에 달하는 발달한 유적이 나오는 흠좀무한 지경이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는 아예 중국 문명(혹은 중화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중. 장강 유역에서 비슷한 수준의 문명이 확인되고 있다는 이유로 황하-장강(혹은 양쯔-황하) 문명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류 학계에서도 이 용어가 정착하고 있는 편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기존에 황하 문명이란 용어가 너무 오랫동안 정착되어 아직 용어가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사세계사 교과에는 '중국 문명'으로 교체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문명들이 세계사적으로 중요도가 높고 많은 영향을 미친 문명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문명 중에서 딱 그 4개만 따로 꼽아서 분류할 만한 특별한 공통점이 없고, 세계 4대라는 자극적인 단어 때문에 이 문명들이 다른 문명들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월하다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공산이 있다.

예를 들어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한 레반트가 4대 문명이라는 용어 때문에 묻혀버리는 감도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육로로 교류하려면 사막바다 사이에 있는 레반트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하므로, 레반트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못지않은 오래된 역사가 있다. 현대로 치자면 이 세 지역은 초승달 모양의 고대판 메갈로폴리스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란(페르시아) 역시 옆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 비해 고고학적 조사가 상대적으로 미진하고, 소위 4대 문명에 꼽히지도 않아 존재감이 낮은 편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곳 역시 상당히 발달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엘람 문서 참조. 다만 엘람인들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4.2. 중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다[편집]

애초에 문명의 요람이든 4대 문명이든 둘 다 엄밀한 학술적 개념이 아니라 '관용구'이며, 두개의 '관용구' 모두에서 구대륙의 고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네 갈래로 '간주'한다. 즉 중국인들의 국뽕이 아니라, 애초에 서구에서도 구대륙 문명을 그렇게 간주하는 것일 뿐이다. 가령 영어 위키피디아(Cradle of civilization)와 프랑스어 위키피디아(Berceau de la civilisation)에서도 구대륙 문명 요람의 분류는 4대 문명과 똑같이 비옥한 초승달(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이 끝이다. 왜 위키피디아 따위를 근거로 쓰냐는 질문이 들 수 있는데, Cradle of Civilization은 "이성적인 서구 학자들의 고매한 학술적 개념" 같은 게 아니라 애초에 4대 문명과 유사한 화법으로 인류 문명 6개를 꼽는 관용구이기 때문이다.[10] 그리고 4대 문명 개념과 똑같이 서구 안에서도 문명의 요람이란 관용구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제기된다.

당연히 학술적으로 보면 '문명의 요람'이든 '4대 문명'이든 허술한 개념인 게 분명하다. 하나로 퉁친 중국 문명도 사실은 복수의 독립적 문명들이 병존하였고, 근동의 문명'들'도 '비옥한 초승달' 내지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라는 1~2개 용어로 퉁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동서양의 비슷한 관용구 2개가 지닌 공통의 허술함에서, '4대 문명'만 콕 집어서 '정치적 개념'이라느니 민족 의식 고취라느니 한 곽민수의 비판은 인터넷 방송의 특성상 과격하게(곧, 곽민수 본인도 인정하듯 rough하게) 말하다가 오버한 것일 뿐이다.

곽민수는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보다 중국 문명, 황하 문명이 시대적으로 떨어져"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4대 문명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문명의 요람은 멕시코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기된 개념이란 말인가? 당연히 이는 부당한 결론이다. 애초에 문명의 요람 개념 역시도, 연대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근동 지역이 나머지 문명과 함께 묶여있다는 문제는 당연히 가지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곽민수처럼 멕시코 내셔널리즘이라느니 안데스 내셔널리즘이라느니 하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후발주자인 인도가 근동과 함께 취급되는 것도 정치적 의도가 없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부터 세계 5대 문명이라며 대동강 문명설을 밀고 있는데[11] 당연히 코미디도 못 되는 사이비 역사로 여겨지며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평양단군릉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믿으면 심히 곤란하다. 이만갑에서도 다뤄졌다. #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마스터 키튼에서는 도나우 문명, 메콩 문명, 야마토 문명이라는 다양한 설정이 나오지만 이는 학계에 승인 받지 못한 (작가 본인의 희망도 섞인) 설정일 뿐이다. 본작에서는 도나우 문명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과거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는 한강 문명설을 주장했는데, 고조선은 신석기 시대 후기 한강 주변에서 독자적 문명을 이루고 있던 한(韓)족이 만주예맥족(예+맥)과 연합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활한 고양시, 김포시 습지(김포 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고조선 세력의 경제적 밑바탕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황하 문명도 청동기 시기 이전에는 쌀이 아니라 기장 농사로 먹고 살았고, 장강 문화권에서 쌀농사를 배운 연후에야 쌀농사를 짓게 된다.

아마존 일대에서 피라미드 등 고대 문명의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아마존 문명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거대한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번성한 고대의 문명이란 점에서 여타 4대 문명과의 공통점이 있으나, 여태까지 이어져 오지 않고 끊긴 문명이라는 점에서 판이하다.

[1] 숫자가 달라지는 건, 초승달을 하나로 세느냐, 혹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따로 세느냐의 차이이다.[2] Charles Keith Maisels (193). The Near East: Archaeology in the "Cradle of Civilization. Routledge.[3] 일본 제국이 대동아공영권 등 척식(拓植)을 위한 기초연구로서 동양학, 특히 중국학 학술 및 자문을 위해 설립한 기관. 의화단 운동 이후 중국 내 항일 운동을 불식시키고 중국인의 정서를 분석하고자 1929년 일본 제국 외무성의 동방문화사업에 따라 발족했다.[4] 일본 국내외에서 매우 유명한 고고학자이며, 도쿄대학 명예교수였다. 대표적인 연구업적으로 북방의 기마 민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을 세웠다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제창하여 야요이계 도래인이 진국의 후손이고, 이들이 야마토 왕권을 정복하였으며, 이들의 조상은 부여-고구려 계통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5] 이집트, 레반트와 묶여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린다.[6] 갠지스강(갠지스 문명)을 추가하기도 한다.[7] 멕시코만 지역[8] 당장에 그리스 내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보는 미노아-미노스만 해도 기원전 3000년경 크레타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만큼 황하 문명보다 1000년이 이르고, 이집트아프리카 누비아, 에티오피아 쪽과 교역을 한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이집트와 동 시기에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9] 여기서는 중화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중화민국도 포함한다.[10] 위키피디아 외에도 서구권에서 Early Civilization 6개를 꼽을 땐 관습적으로 4대 문명에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만 추가한다.[11] 심지어 2021년 로동신문 기사에서도 '세계 5대문화' 운운하며 대동강 문화를 언급한 것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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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수메르(Sumer)는 서아시아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최초의 문명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류에게 있어서 이라는 개념과 역사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뜻이다.[7] 이라크 지역에 관련 유적이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다.

이밖에 팔레스타인예리코이집트상고대 유적, 20세기의 고고학적인 발견인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등이 수메르 이전에 등장했을 성읍의 존재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아직 그 규모와 연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문명으로 정의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지도 역시 검증된 바가 없다.[8] 이는 고고학에서 정의하는 문명(Civilization)과 문화(Culture)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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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이름의 지명으로, 튀르키예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석기 시대의 유적을 가리킨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 내려가다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교가 공동 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4]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하였다. T 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튀르키예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언어별 명칭】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Պորտասար (Portasar)
Girê Mirazan
哥贝克力石阵
ギョベクリ・テペ

3. 조성된 시기[편집]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75년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구조물은 약 1만 17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6]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천 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천 년)이 3천 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 도시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 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 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 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기원의 연대에 1만을 더해 홀로세 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 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 지어 약칭 HE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2년은 12022 HE라고 하자는 것이다.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 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에서 T 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는 등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이외에도 주변 지역 각지에서 T 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도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 또한 대량으로 발굴되어 구석기 시대라 여기던 시절에 초기 농업 사회가 탄생했음이 밝혀졌다.

4. 유적지의 건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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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 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 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 부분)에는 손과 인체 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 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 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고고학계의 기존 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 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 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 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 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5. 몰락[편집]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천 년간 신전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에 세웠던 기둥들을 고의로 땅에 묻은 뒤 새로운 기둥을 다시 세우는 등 몇 번 변화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8천 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 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 계급에 맞선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조사로는 인위적으로 묻힌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인위적으로 묻었다면 상대적으로 고르게 묻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 괴베클리 테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위적 몰락'과 '자연적 퇴적'을 결합하여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말 그대로 괴베클리 테페가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방치되고 버려졌다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다시 복구되고 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 괴베클리 테페가 고고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 학설로 예상되던 발전 수준에 비해 놀랍다는 것이지 본격적인 성읍 국가나 문명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리가 쉽게 끊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굳이 전쟁이나 집단적인 분쟁이 아니어도, 단순히 생태 자원 고갈로 인한 서식지 이동나 재해로 인한 피난 등으로도 인적이 끊길 수 있다는 뜻이다. 괴베클리 테페보다 훨씬 규모가 큰 톨텍 문명 등의 문명도 자원 고갈이나 자연재해로 멸망한 사례가 있으니 무리한 추측도 아니다.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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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 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튀르키예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 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이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 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 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 관측 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이 주장은 넷플릭스고대의 아포칼립스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는 유사 역사학으로 악명 높은 그레이엄 핸콕이다.

한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란 추측이 많다.

6. 슈미트 교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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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 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튀르키예인 아내이자 튀르키예 고고학자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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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으뎀 쾩살(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 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튀르키예어로 설명했다.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7. 기타[편집]

  • 1997년에 발견되어 2019년경부터 발굴이 시작된 인근의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의 경우 괴베클리 테페보다도 더 이전의 유물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하나하나씩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이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전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흘러흘러 현재의 영국까지 넘어간 것으로 DNA 검사 결과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괴베클리 테페와 직접 관련이 있지야 않지만 아나톨리아 출신이고 비슷한 돌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모였다.
  • 이 지역이 시리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발굴에 애로 사항이 생길 우려도 있었다. 2014년 8월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 그래도 튀르키예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한다. T 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중무장한 군을 배치하여 학자들을 경호한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 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튀르키예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 관람을 허락받았다.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일부만 봤는데도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 2020년 기준으로 유적 위에 돔형 지붕을 설치해 놓고, 관광 안내소와 각종 편의 시설까지 설치해 놓은 것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홍보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영어 안내도 잘 갖추어 놓은 것과는 별개로, 관리 직원들에게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한 번에 5명밖에 관람을 하지 못한다. 2022년 기준으로는 규제가 완화되어, 티켓만 구매하면 인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괴베클리 테페 터키1
    괴베클리 테페 터키2
  • 2017년 9월 28일, 튀르키예 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이다. 튀르키예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 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다.

7.1. 아르메니아의 반발[편집]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이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ayk)를 민족의 시조로 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진 아라라트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다. 그러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튀르키예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튀르키예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반면 지금의 튀르키예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으로,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주장을 다 논외로 하더라도, 이 지역 원주민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건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고, 튀르키예인들은 이주민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튀르키예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그래서 포르타사르라는 이름으로 구글에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백과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할 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논리[7] 때문만이 아니라,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인데, 이 지역은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고 문명 간 교류도 많이 오고 갔던지라 진짜 토착 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현재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착 시기는 1만 2천 년 전쯤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인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기원전 4천 년 전 즈음으로 추정되고 다수 민족이 된 것은 이슬람 발흥 이후인 7세기 즈음부터다.[8] 그리고 설령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이전부터 여기 살았다 하더라도, 1만 2천 년 전 선조들을 민족으로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정도 시간이면 혈통이 전부 뒤섞였거나 이 지역 근방 토착 민족 모두의 공통 조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현재의 민족 분류를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지역으로 막 쳐들어왔던 10세기 시절의 황인종 튀르크족은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고대인들의 후손으로 보기 어렵겠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며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에 유전적으로 흡수되었다. 현대 튀르키예인의 일반적인 유전적 특성은 고대 이래 아나톨리아에 살아온 원주민의 유전자 풀을 주류로 하여, 10세기 튀르크족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곳으로 들어온 다양한 외래인들의 유전자가 소소하게 양념처럼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민족의 유전적 특성은 국경에 따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으로 변화한다.주변국과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선대에 인접국 주민과 혼혈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인접국 주민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 게다가 아나톨리아와 주변 일대 민족들은 애초부터 유전적 차이가 크지 않았던 터라, 현대 튀르키예인은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등과 유전적으로 거의 유사하다. 결국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8년부터 관광객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이후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로 이직했다가 2014년 작고했다.[5]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6] 어디까지나 이 정도 대규모 유적으로 한정했을 경우다. 소규모 유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덜 들어간 유적들 중에는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테오페트라 동굴(Theopetra Cave) 같은 것들이 있다.[7] 오히려, 아르메니아는 프랑스나 서구권에서 더 정치적으로 지지해오고 있다. 물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땐 물질적으로 도울 수도 없었던 현실이다. 당시 전쟁때, 러시아나 조지아,이란을 통해서만 지원품을 보낼 수 있는데 러시아와 이란은 미국이 경제제재를 하고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 편들어서 아르메니아로 가서 지원품을 항구에서 막아버린다고 했다.[8] 이 지역이 동로마와 이슬람의 분쟁 지대가 된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 계열 아람-아시리아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위협을 피해 동로마 쪽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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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현재로부터 12,000년전 유적
이 유적으로 인해 4대문명 기원에 관한 설이 뒤죽박죽이 됨
스톤 헨지보다 7000년 앞서서 건설된 신전
인류가 마지막 빙하기(B.C 10,000년)를 끝내고 수렵채집을 할 무렵
여기서 발견된 밀 dna를 확인 수렵과 농경을 병행
발굴면적만 90,000sqm 축구장 12개보다 큼
총 16개의 신전에 T자형 기둥이 200개 이상

마지막 빙하기 이후 녹아내린 빙하와 끝없이 내린 비, 대홍수로
현재 해수면까지 약 100m 높아진 것으로 파악
유라시아 대륙 거대 산맥에서 살아남아 동서로 흩어졌을 가능성을 추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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