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헤라클레이토스가 (강물의 비유를 통해) '변화'를 말하고,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동성애 제자 제논이 제기한 '제논의 역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듯) '정지'를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두 사람 모두 변화와 정지를 동시에 말했다 - 단지 방점을 어느 쪽에 찍느냐가 달랐을 뿐; 이는 음과 양, 기독교와 불교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더 오묘하다

 
그렇다면 사유하거나 탐구하기 위해 가정하는 '있다'란 대체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에서 있어진다(=생성)'거나 '있는 것이 없어진다(=소멸)'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따라서 생성, 소멸하는 운동과 변화는 '논리적'으로 봤을 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즉, '있다'는 말의 의미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고 나갔을 때, 변화나 운동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다(estin)'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하나'라서 나뉘지 않고, 변화하지 않아 흔들림 없는 것." 이렇게 논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를 상정해야, 비로소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했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하나'를 상정해야 된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이후 플라톤이데아론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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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를 얘기할 때 항상 따라 나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파르메니데스는 불변' 이라는 말이 거의 공식처럼 전해지는데, 사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얘기하긴 했지만 '변화 속의 불변'인 '로고스'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고, 파르메니데스는 진리편에서 '있다'의 논리적 불변성을 고찰했지만 의견편에서는 감각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공식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는 볼 수 없다.[5]

[5] 그렇다고 헤라클레이토스=변화, 파르메니데스=불변 의 공식이 완전히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그들의 대표되는 입장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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