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은행 몬터규 노먼의 단짝이자, 라이히스방크의 총재로 히틀러의 군사자금을 모아줬던 국제투기자본의 얄마르 샤흐트; 그가 도안한 메포-벡셀(Mefo-Wechsel) 채권이 막상 탁상공론으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 만약 히틀러가 이 채권을 통해 모은 자금을 군비 대신 민간 사업에 집중시켰더라면, 아니면 전쟁에서 적당히 승리하고 발을 뺐더라면, 이 채권의 발행인인 독일 군수산업체에 대한 지불을 나치 독일 정부는 할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메포 채권이 단순히 헛발질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샤흐트는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참전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메포 채권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하펜슈타인이 사망(1923년 12월 20일)하면서 공석이 된 국가은행(Reichsbank)의 총재로 취임한 샤흐트는 프랑스가 배상금 배상 문제에 군사력을 사용한 일에 반감을 가진 영국 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Montagu Collet Norman, 1st Baron Norman)과 접근했다. 프랑스는 거듭 루르 지방을 점령했지만 영국은 이에 반발하여 독일의 배상방법에 대한 전문 위원회의 창설을 요구했다. 이 제안을 미국도 찬성하자 프랑스는 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찰스 도스(Charles Dawes)를 위원장으로 하는 도스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샤흐트는 이 위원회와의 협상에 참가했는데 도스 위원회는 1924년 4월에 새로운 배상금 지불안인 도스 안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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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프, 유나이티드 스틸, 이게파르벤 등 중공업계의 나치당 지원은 샤흐트의 추천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32년 11월 29일에 정재계 인물들을 연대하여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결국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로부터 수상에 임명되어 나치당은 정권을 장악했다.
1933년 2월 20일에는 히틀러가 괴링의 집무실에서 샤흐트를 비롯한 실업계 수뇌부 25명을 소집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근절과 재무장을 약속하는 대신 나치당에 대한 헌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담에서 나치당은 300만 마르크의 헌금을 모았다.[9] 1933년 3월 16일에 샤흐트는 다시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취임했다. 그리고 1934년 8월 2일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5월 21일에 전시 경제에 대한 전권위원이 된 샤흐트는 나치 정권 초기에 아무런 제약없이 독일 경제를 주물렀다. 시장경제 신봉자였던 샤흐트는 대기업이 나치당의 지배 및 간섭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경영자단체, 상공회의소를 아우르며 제국 경영자단체 연합의 창설에도 관여했는데 샤흐트는 나치당 최후의 부르주아 대표이기도 했다.
재무장으로 군사비가 늘어나자 국민들의 인플레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비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메포-벡셀(Mefo[10]-Wechsel) 채권을 도입했다. 메포-벡셀 채권이란 독일 국방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은 기업이 채권의 발행인이 되어 정부가 이 채권을 사들이는 의무를 지며 라이히스방크가 채권의 재할인을 보증하는 증서였다.
전간기 당시 나치 독일의 경제를 성장시킨 주역은 샤흐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나고 전 세계의 국가들이 크나큰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을 당시 샤흐트가 경제장관으로 지내고 있었던 독일은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어떠한 국가보다 우선적으로 실시하여 대공황의 늪에서 비교적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의 실업자 수는 수백만에 달했는데, 일련의 경제정책들로 길거리에 넘쳐나던 노숙자들은 사라지고, 민간인들에게 다량의 일자리가 제공되어 국민들의 구매력이 올라갔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만약에 군비에 온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 민간 사업에 예산을 크게 할당했다면 독일의 경제는 현대 독일의 경제처럼 유럽의 경제 맹주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거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포메른 이동 지역 등의 구 동방 영토 지역들의 영유권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전간기 당시 독일의 경제는 표면적으로는 실업률이 줄어들고 시장이 활성화되어 성장하고 있었다고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히틀러의 지나친 군비 투자로 인해서 군수 산업과 민간 산업 간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었다. 늘어난 군수공장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기는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아무 생산성이 없었기에 사실상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즉, 군수 산업을 발전시켜 경제적 발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할 경우 발생하는 인력 손실과 여러 손실을 고려할 경우 군수 산업 성장이 과연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도 나치 독일은 프랑스 침공 이후 프랑스의 경제력을 그대로 흡수하였으나 나치 독일의 경제 상황은 결과적으로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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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전후[편집]
샤흐트에 대해 소련 측 재판관인 이오나 니키첸코 소련 육군 소장은 유죄를 주장했고, 미국 측 판사 프랜시스 비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소련의 대리 판사 알렉산드르 볼치코프를 포함한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에게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요?"라며 핀잔까지 들었다. 결국 재군비의 계획 자체만으로는 범죄가 아니라고 평가되어 무죄로 방면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전범재판 이후 샤흐트는 서독 정부 하의 재판을 받아 슈투트가르트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 후 출옥하였다. 그후 뒤셀도르프 은행에서 브라질, 에티오피아 제국, 인도네시아, 이란 제국,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의 경제발전 참모로 활동하다가 1970년에 뮌헨에서 93세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나치를 빨고 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극도로 분노하여 찢어죽일 놈들이라고 욕하였다고 한다.[14]
전후 문관으로 재직하며 서독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재판 때 몇몇 피고들이 반성과 연합국에 대해 협조적인 샤흐트의 모습을 두고 "나중에 쟤들한테 훈장 받으시겠네."라며 비웃음을 산 게 현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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