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헛됨을 강조하는 전도서; 흑사병과 종교전쟁의 교훈: 죽음을 직시하라!;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의 바니타스 사조는 전도서의 메세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림들;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인간생활의 허영' - 빛과 어둠의 절묘한 대조, 대각선으로 나누어진 화면 분할, 꺼져가는 황금빛 향로, 크로노미터와 생명의 한계, 술을 가득 담았던 놋쇠 항아리, 엎어져있는 오보에와 파리, 부와 풍요를 상징하는 일본도와 조가비, 그리고 탁자 위의 비단, 마지막으로 정 중앙에서 선명한 빛의 세례를 받는 죽음의 영원한 상징, 해골 (이 해골은 턱조차 빠져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메세지; 새뮤얼 존슨의 명시, 인간 소망의 허영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원래 신분이 푸줏간 백정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으나 현재 연구에선 중산층 집안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여튼 전통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탁월한 재주로 요크 대주교가 되었고, 헨리 8세가 즉위하자 요크 대주교였던 토머스 울지는 왕에게 재주를 드러내며 빠르게 신임을 얻었고, 왕이 원하는대로 들어주면서 왕의 환심을 샀고, 그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로드 챈슬러(Lord Chancellor) 직위에 오른다. 흔히 역사상 잉글랜드의 로드 챈슬러를 대법관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대한민국 대법관은 대법원장 포함 13명이나 되지만 영국의 로드 챈슬러는 현재에도 영국 사법부의 최고재판소장보다 상급자이며, 명목상으로는 영국 수상보다도 상급자이다.
헨리 8세의 절대왕정 시절 로드 챈슬러는 재상역할을 하는데 공식적으론 왕의 최고 고문이며, 상원의장이며 귀족회의의 주재자이고 최고재판소장의 상관이며 왕의 권력을 위임받아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고 처형 감금같은 모든 행위 즉 지금으로치면 원님재판을 할수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왕조 시대는 왕이 모든것을 결정할 초법적인 권한이 있지만 현대 관료나 정치인들 처럼 시험보고 뽑거나 경력과 자질을 보아 선출 되는것이 아니라 각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재상을 두었고 토머스 울지는 절대왕정 시대에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최대 권력자였다. 당연히 이러한 권력은 국왕의 신임이 무너지자 사라졌고, 후임자 토머스 크롬웰도 비슷한 말로를 겪게 된다.
울지 추기경은 또한 헨리 8세의 지속적인 청원과 외교적 압력 덕분에 교황청에 의해 교황의 사절, 사실상 잉글랜드에서의 교황의 대리인이 되면서 교회 내부에서도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며 수입이 좋은 알짜배기 교구를 여러 개 차지했다. 이런 그도 영국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는 차지하지 못하고 요크 대주교에 머물렀는데, 이는 권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William Warham)이 82세까지 장수하며 30년 가량 직책에 머무는 바람에 자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 하여튼 이렇게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며 왕이 40대가 될 때까지 승승장구하였으나, 왕과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무효[2] 협상을 실패한 탓에 신임을 잃고 관직과 재산을 박탈당했다. 울지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울지 밑에서 일하던 토머스 크롬웰이 대신 왕의 신임을 받아 출세하게 된다. 추기경은 원래 임지인 요크(York)로 물러났으나, 왕은 노섬벌랜드 백작의 고발을 이유로 울지 추기경에게 반역 혐의를 물어 런던으로 소환했다. 울지는 런던으로 가던 중 병사했다.
헨리 8세의 절대왕정 시절 로드 챈슬러는 재상역할을 하는데 공식적으론 왕의 최고 고문이며, 상원의장이며 귀족회의의 주재자이고 최고재판소장의 상관이며 왕의 권력을 위임받아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고 처형 감금같은 모든 행위 즉 지금으로치면 원님재판을 할수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왕조 시대는 왕이 모든것을 결정할 초법적인 권한이 있지만 현대 관료나 정치인들 처럼 시험보고 뽑거나 경력과 자질을 보아 선출 되는것이 아니라 각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재상을 두었고 토머스 울지는 절대왕정 시대에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최대 권력자였다. 당연히 이러한 권력은 국왕의 신임이 무너지자 사라졌고, 후임자 토머스 크롬웰도 비슷한 말로를 겪게 된다.
울지 추기경은 또한 헨리 8세의 지속적인 청원과 외교적 압력 덕분에 교황청에 의해 교황의 사절, 사실상 잉글랜드에서의 교황의 대리인이 되면서 교회 내부에서도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며 수입이 좋은 알짜배기 교구를 여러 개 차지했다. 이런 그도 영국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는 차지하지 못하고 요크 대주교에 머물렀는데, 이는 권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William Warham)이 82세까지 장수하며 30년 가량 직책에 머무는 바람에 자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1] 하여튼 이렇게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며 왕이 40대가 될 때까지 승승장구하였으나, 왕과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무효[2] 협상을 실패한 탓에 신임을 잃고 관직과 재산을 박탈당했다. 울지가 빠르게 몰락하면서 울지 밑에서 일하던 토머스 크롬웰이 대신 왕의 신임을 받아 출세하게 된다. 추기경은 원래 임지인 요크(York)로 물러났으나, 왕은 노섬벌랜드 백작의 고발을 이유로 울지 추기경에게 반역 혐의를 물어 런던으로 소환했다. 울지는 런던으로 가던 중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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