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의 거짓말 수법: SSCI 논문; 엑시소시트의 신부의 말: "악마는 진실과 거짓을 섞는다"

 




1. 논란[편집]

1.1. 식민지 근대화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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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사실성 여부가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1] 이후 학계에선 허수열 충남대 교수처럼 수탈론도 과장이지만, 식근론도 문제라는 반박이나 아예 근대화의 의미가 뭐냐는 문제제기까지 나오고 있다. # #

경제학자들이 대부분인 저자들에게서 전문성이 담보되는 부분이 수탈론 부분이다. 교과서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수탈이란 용어나 각정 정책설명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10여 년 전 제기되어 다른 학자들과 논의를 거쳐 받아들여질 부분은 받아들여졌다. 반박될 부분은 다 반박된 터라 학계 입장에서는 새로울 게 거의 없다. 쉽게 말해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있는데 그에 반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제기되었던 반박들은 모호하게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책 앞부분에 나오는 토지 조사 사업 비판의 경우, 신용하[2]가 주장하던 '한손에 측량기, 한손에 권총 든 토지수탈' 주장에 반대되는 연구가 국사학계에서 나온지도 30년도 넘은[3] 상황이다. 아울러 김제 벽골제에 관한 조정래 비판과 벽골제를 둘러싼 충남대 허수열 교수와의 논쟁도 2000년대 후반의 일로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에 대해 그동안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계속 반박해온 허수열 교수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대한 이영훈의 비판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라고 이영훈의 주장을 역으로 비판하였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허수열 "이영훈 경제통계 모두 엉터리"

실제로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76화에 나온 허수열 교수는 조정래와 이영훈의 주장 중에서 조정래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수열 교수는 이영훈의 주장도 무슨 사료나 문헌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들이 개간을 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라고 했으며, 이영훈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만드는 잡지인 시대정신에 1921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엉뚱하게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잘못 주장한 바 있으며, 이영훈의 주장처럼 일본인들이 개간을 열심히 해서 조선의 토지 면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존에 있던 토지들을 세금 많이 걷으려 측량하다보니 조선 왕조 시대에 토지 대장에 넣지 않았던 토지들이 통계에 들어간 것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허수열 교수는 자신이 국가기록원에서 맡은 방대한 기록들을 근거로 분석을 하여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거의 평생을 바치고 있는데, 허수열 교수가 자료들을 토대로 이영훈의 이론을 반박하면 이영훈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답을 안 하고 전혀 다른 이론을 가져와서 여기에 대해 반박해 보라고 말하고 그래서 허수열 교수가 그 이론에 대해 자신이 가진 자료들을 토대로 반박하면 이영훈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른 이론을 가져와서 반박해 보라는 식으로 두더지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허수열 교수의 이영훈 이론 반박 내용들

심지어 최근에는 방조제였다는 이영훈의 주장과 달리 벽골제에서 담수 식물의 흔적이 나오거나[4] 이곳이 수리시설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 상황이다. 물론 해당 학설이 정설은 아닌 만큼 학계에서 흔히 보이는 서로 반대되는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여기서 이영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불리한 근거에 대해 적절한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퉁치려 한다는 점이다.

쌀 수탈 프레임 비판의 경우 일제 공권력이 직접적으로 시행하는 수탈이 아니라 수출(또는 이출)이며 외견상 자본주의 제 관계의 성립이라는 것은 한참전에 인정받고 결론났다.[5] 하지만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농촌구조가 완전한 부익부 빈익빈으로 변화, 조선의 자작농이 대거 몰락하여 소작농이 되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산미증식계획은 농업잉여의 증대와 농업잉여의 자본 전화로 인한 공업화 토대 마련 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조선 농업구조의 완전한 변화로 인한 소작농 증가와 고액의 소작료 부담과 강제적 수리조합 가입 및 고액의 조합세 부담에 따른 부익부 빈익빈 심화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농촌의 빈부격차 확대와 자작농의 몰락 현상 자체는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던 영국부터 모든 나라들이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겪었던 일[6]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은 단순히 부농이 토지 소유를 확대했고 정부가 이를 장려/묵인하며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대지주 위주의 총독부 지원을 배경으로 해서 대지주들이 강제로 조합원에 편입시킨 뒤 고액의 이용료를 부담시켜서 촉진된 면도 크다. 또한 당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농업에 종사하였고 그 중 많은 경우가 빈익빈에 해당되었으며[7] 이후 식민지 시기 동안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혜택과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모든 과정에서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 효과가 있었다.'로 축소하고 있다 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산미증식계획 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의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의 글을 참조하길 바람.

그런데 학계의 논의와는 별개로 오랜 기간 일방적인 수탈론만이 국사교과서에 실리면서 상당수 일반인들이 이렇게만 알고 있는 현실[8]에서, 이영훈 교수는 이런 대중들의 무지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학계에서 수십 년도 전에 참으로 결론이 났거나 더는 학계의 주 관심사가 아닌 학설들을 끌고 와서 학계가 아직 반일 프레임에 매몰되어 있으며 자신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반박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이런 내용의 책을 처음 쓴 것도 아니다. 단독 저작만 쳐도 대한민국 이야기(2007)와[9] 대한민국 역사(2013)가 있고 공저작으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이 있는데 밀도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쪽이 훨씬 낫다.

사실 뉴라이트의 대부이자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조차 "식민지기의 지주-소작관계는 법률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였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소작농들에게 농노적 예속을 강요하는 불평등 관계였습니다." (안병직·이영훈, 2007, p.156)라고 이미 주장했음을 생각해보면 강제성의 개입을 애써 부정하려는 일부의 시도는 이장폐천(以掌蔽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의 느낌이 강하다.

1.2. 독도의 역사적 영유권에 대한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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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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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독도가 현재 대한민국의 고유영토임을 부정하지 않으나, 그동안 한국 사회의 통념이던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고,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래로 한민족의 고유영토'라는 통념은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결과이며, 오히려 사료에 나온 '우산도'와 대한제국 칙령의 '석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관음도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이 타당성이 높다고 본다.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확정한 것은 이사부나 대한제국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1952년 평화선 선포를 통한 것으로,[10] 독도 영유 또한 결국 이승만의 업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도 타당성이 있음을 이해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하게 내세울 필요 없이 low key로 실효지배만 하면 되었는데, 노무현 정부 이래로 대통령들이 정치적으로 반일을 이용하면서 독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되고 일본의 반격도 더 거세지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의 노무현 운운하는 주장은 오히려 이영훈이 칭송해 마지않는 이승만에게 해당되는 소리다. 가장 강경하게 정치적으로 반일을 이용하면서 무력까지 동원해서 위태롭던 독도영유권을 확실하게 실효지배한 것이 이승만이고 이에 대한 일본의 반응도 가장 격렬했던게 이승만 정부 시절이다.[11] 그리고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운운도 독도 연구자에겐 그저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국내 역사학자들이나 독도 연구자들도 국제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우산국 정벌 건을 입 밖에 내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독도영유권의 증거로 내세운 서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모두 독도와는 관계없는 비전문가들의 어린이 위인전이나 대중 서적 또는 정부의 국내용 선전 메시지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이는 '논문을 쓰고' 때로는 '학술 논쟁을 벌여야 하는' 독도 '연구자'들이야말로 그런 소리를 국제적으로 했다간 망신만 당할 파탄된 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즉 이영훈의 우산국 정벌 주장은 그들에겐 허수아비 공격일 뿐인 것.

구체적으로는 우산도 명칭 논란, 이승만 라인설 등 일본 우익들의 대표적인 주장만을 실어 놓고,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대한제국 영토임을 공표한 ‘석도’가 독도라는 것을 부정했다. 저자는 오히려 대한제국이 1905년의 시마네현 고시에 반박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행정권은 남아있었지 않느냐며...[12] 하지만 사실 이영훈이 시마네현 고시에 대해 대한제국이 왜 반박하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건 뒷북에 가깝다. 왜냐면 수십년 전 일본 학자들의 주장인데다 이미 논파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에 근거해서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는데 새로운 영토의 획득처럼 중요한 국가적 행정처리를 <관보(官報)>나 <공보(公報)> <현보(縣報)> 어디에도 싣지 않았다. 그러나 신 영토 획득을 어떤 형식으로든 공포하지 않으면 국제법상 문제가 되기에 기껏해야 지방 신문인 <산인(山陰)신문> '잡보(雜報)'에 조그맣게 실어 도망칠 구멍을 파낸 것이다. 그것도, 그 새로운 영토가 '竹島'라고 명기하지도 않았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1876년 미국과 오가사와라 군도의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일었을 때, 일본은 미국, 영국에 철저히 오가사와라 영토를 일본령으로 편입할 것을 공표하고 당연히 관보에도 당당히 실었다. 그런데 왜 독도에 대해선 저런 모순된 행보를 보인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한제국이 이를 알면 분명 항의와 함께 국제분쟁이 될 게 뻔하니까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다. 1년 후 후인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이 이를 알고 항의한 것이야말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 자체를 몰랐다는 증거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능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일본이 철저히 숨긴 것이었다. 즉, 이영훈은 도둑이 아니라 도둑맞은 것도 몰랐던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

무엇보다 대한제국 칙령의 '석도' 비정에 있어서도 그의 문제점이 심각한데, 우산도=독도를 부정할 때 그는 나고야대학 교수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의 연구를 적극 인용하면서 그를 '존경'하며 '우리나라에도 그런 학자가 있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본인의 유튜브 채널 '이승만학당' 및 주간조선에서 이선민 기자에의 반박문에서 했다. 이케우치 교수는 독도 영유권 분쟁에서 한일 양국에서 영향력과 인지도가 큰 학자인데, 그도 처음에는 석도 비정에 대해서는 석도->돌섬->독섬->독도로의 발음변화는 발음의 유사성에 의한 가능성일 뿐이며 문헌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석도=독도 라는 주장은 유론(謬論,그릇된 논리)이라고 주장한 학자이다. 그러나 이케우치도 석도가 관음도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석도에 대해선 '알 수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다 재일교포 출신 독도연구가 박병섭[13]에 의해 그 '문헌적 증거'가 2010년대 이후 조금씩 밝혀지자, '석도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독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라고 기존의 주장을 수정함으로써(2017) 오히려 이영훈의 주장을 부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반일 종족주의의 출판년도는 2019년인데, 이영훈이 이케우치의 견해가 바뀌었음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영훈이 과거 허수열과의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에서 일본 육군이 발행한 <옥구도엽>이라는 지도의 연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릇되게 표시하는가 하면, 1921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엉뚱하게 1917년에 만들어진 지도라고 고의성이 의심스러운 잘못된 주장을 한 전력을 생각하면, 독도 영유권에 대한 그의 주장도 학문적 엄밀성 이전에 정직성부터 의심스럽다.[14]

게다가 서문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의 추구가 지식인의 사명이라 주장한 반면, 정작 독도 문제에 관하여는 태정관 지령이나 SCAPIN 제677호처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불리한 사안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태정관 지령에 대해선 왜 이를 언급안하냐는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의 주장에 '태정관 지령은 한국의 독도고유영토설을 증명하지 못한다.'며 이영훈이 반박했고 이에 이선민 기자가 재반박하였다. 자세한건 태정관 지령 항목 참조.

또한 일본은 한국과 국교를 맺기 직전인 1965년 4월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독도)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라는 문서를 보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도 결코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으며[15], 한일국교정상화 때 한국이 '을'이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으려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이 취소되어도 좋다. 결코 독도에 대해 양보하지 말 것'을 외무부장관 이동원에게 지시, 끝내 막았던 적이 있다. 국내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한일회담을 추진하던 박정희조차 '차라리 때려치워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독도 도발은 심각했다.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고 박정희 정부 집권기인 1977년에 200해리법을 제정하여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일본 속셈 꿰뚫을 독도정책 다시 세워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4글자 단어가 이 후쿠다가 처음 한 소리라는 것. 즉, 일본의 독도 도발은 더 심하면 심했지 이영훈의 주장처럼 노무현 정부 이전이라 해서 결코 일본이 소극적으로 가만히 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이 조용히 있는다고 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조용해 질 것이라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야말로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 오히려 조용히 있을수록 '한국이 일본의 논리에 반박 못하고 있다.', '일본의 다케시마 주권행사에 한국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일본의 영유권 주장 및 국제 여론전에 이용해 먹을 것이 뻔하다. 당장 독도는 한국이 실효지배 하고 있는 이상, 일본이 가만히 있는데 한국이 먼저 독도 영유권을 호소한 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16] 오히려 독도를 빼앗고 싶어 먼저 한국에 싸움을 걸고 국제적으로 동네방네 떠드는 게 일본이고 한국이 그에 방어 또는 반응하는 메카니즘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계속되어 왔을 뿐이다. 이정도면 이영훈은 선후관계도 왜곡한 것이다.

이영훈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영훈은 독도 한국영토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한국영토설의 근거를 한국정부가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는 걸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영훈은 한국 정부의 핵심적 주장인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문헌에서의 우산도=독도, 대한제국 칙령 41호의 석도=독도 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무인도인 독도가 오래 전부터 한국영토였다는 증거를 대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이영훈 자신이 독도 한국 영토론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은 것도 아니다. 이걸 가지고 이영훈이 독도 한국영토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증거는 없지만 독도는 한국영토가 맞다' 라는 게 실증주의자 이영훈의 생각 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게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을까?

이영훈은 과도하게[17] 이승만을 찬양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그러므로 그에겐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부족할수록 이승만의 평화선 공표로 인한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의 공적이 더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 부분에서 심각한 자가당착을 드러내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대로 평화선 이전의 독도에 대해서, 우산도=독도, 석도=독도가 모두 부정될 경우, 게다가 독도는 무인도이므로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론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오로지 실증주의만으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버텨왔다'[18]는 그는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가 아니며, 1904년 대한제국 칙령에서도 독도를 영토로서 선포하지 않았으니[19] 이 '무주지 선점론'으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선포한 시마네현 고시를 인정, 즉 독도가 일본령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일본은 물론 미국의 의견 (러스크 서한)[20]도 씹고 무력으로 점령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즉 남의 나라를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았으니 바로 침략이고, 그 사상적 기반이 이영훈 본인이 한국인의 고질적 국민성이라고 매도한 '반일 종족주의' 이며, 그런 사상으로 남의 나라 영토까지 빼앗을 정도라면 역대 가장 극단적이고 질 나쁜 '반일 종족주의'를 이승만이 저지른 셈이 된다. 즉 이승만이야말로 그의 저서 '반일 종족주의'로 가장 비난해야 할 대상임에도 오히려 평화선 덕분에 한국의 독도 영유를 확정했다고 칭송하고 있다.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가? 실제로 주간조선 이선민 기자도 이영훈과의 논쟁에서 이 모순을 무겁게 지적하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이영훈은 답변은 없는 상태. 이영훈의 ‘독도’에 대한 세 번째 비판

독도에 대한 이영훈의 주장은 위의 이선민 기자의 반박처럼, 연구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추측'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그의 분야는 경제사(Economic History)이지 정치사(Political History) 또는 지역사(Regional History)가 아니다. 지난 50여 년간 축적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연구성과는 그 분야에는 연구경력도 없는 이영훈이 갑자기 나타나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도 않을 뿐더러 일본이 얕볼 수 있는 수준도 아니고 오히려 겐로쿠 각서(2005년에 발견)나 이케우치 교수의 예(2017년)처럼 갈수록 일본에 불리한 학술적 증거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가 학계도 '반일 종족주의'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도 학계를 얕잡아 봤다고 할 수밖에 없다.

1.3. 과거사 청산 관련 논란[편집]

공동저자인 주익종은 '1부 10. 애당초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했으며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이 포괄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치열한 상황이며, 한일 양국의 과거사 갈등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쌍방 과실이지 결코 한국에 일방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과거사 인식과 관련된 자세한 논변은 본문에 서술하기엔 너무 길어지니, 한일기본조약 그 법적 해석, 한일관계 문서의 한국의 입장일본의 입장갈등 원인 단락, 일본의 역사왜곡 등 관련 주제들을 참고하자.

2. 반응[편집]

2.1. 긍정적 반응[편집]

2.1.1. 정치인[편집]

  •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은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
  •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은 "100만권이 팔려서 전 국민이 정말 눈을 뜨고 더 미래지향적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며 말하였다. #

2.1.2. 언론인[편집]

  •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은 "이 책이 백만부 정도 팔리면 대한민국이 바뀌지 않겠는가"라 말하였다. #

2.1.3. 학계[편집]

  • 조셉 이(Joseph Yi)교수는 반일종족주의는 한국 사학자들이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조작’해 내었고 진짜 현실이 아닌 합의된 현실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다‘라며 인용하였다.#

2.2. 부정적 반응[편집]

2.2.1. 학계[편집]

  • 과거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담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이 책의 저자들과 함께 저술한 이철우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다. 긍정적인 평가라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인터뷰 내용이다. #
  • 전강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당신들이 유포하는 건 '혐한 종족주의'라며 비판하였다. #
  •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책에서 저자는 식민지근대화론자의 학술적 주장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독선적 표현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고 비판하였다. #
  •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평화를 바라는 합리적인 양국 시민들의 소리는 묻히고, 이런 책들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두 극단적 관점의 충돌을 견인하며 커다란 소음을 유도한다고 비판했다. #
  •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저자들이 책에서 반일 종족주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며 "거짓말에 관대한 문화가 반일 종족주의 때문이라는 주장, 물질주의가 반일 종족주의의 원천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
  • 허수열[23][24] 충남대 명예교수는 "이영훈의 경제통계는 모두 엉터리"라면서 이 서적이 학술적으로도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증언을 했다. #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 농경지의 약 5.8%, 임야의 59.1%를 빼앗았다"고 지적하고 "토지조사 분쟁 사례와 저항 행태를 봐도 이 사업의 목적은 약탈이었음이 입증된다"고 전하면서 "이들의 후예들이 펼치는 거짓 주장을 그대로 '주워 먹은' 사람들이 학문·통계·사료의 허위 탈을 쓰고 매국적으로 활동한다면 동포들의 정신건강을 해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영훈과 이러한 주장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
  •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한 '일제 종족주의'를 출판하였다. 뒤이어 황태연을 비롯한 일제 종족주의 저자 6인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을 부왜노로 지칭하면서 그들이 근거 없이 대한민국의 정당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일제종족주의와 동일시해 ‘반일종족주의’로 폄하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기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일제 종족주의 저자들은 그들을 단순히 학술적 논박만 하는 것이 아닌 법적으로 고발을 하였으며 일제 식민통치 옹호 행위 및 일본의 역사부정에 대한 내응 행위 처벌 특별법’을 제정해 이들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
  • 고베대학 기무라 칸 교수는 '반일종족주의' 에서 강한 반일 정치가였던 이승만의 반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으며[26], "그들(저자들)에 의한 '반일비판'은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판하는 사람들(진보세력)을 공격하는 것에 주 목적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
  •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뉴라이트들이 일본 우익을 답습하는 방법으로 한국 사회를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고,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이미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데, <반일 종족주의>를 들고나온 것은 학문적 패배를 정치적으로 만회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를 전면 비판한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 정복>책을 출판하였다. 이영채 교수는 "한국의 역사 전문가라는 집단이 스스로 일본 식민지 시기의 역사 인식을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 동일한 맥락ㆍ입장에서 설명한다”며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식민 지배에 대한 거짓과 과장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은 사실 일본 식민 지배의 실상을 은폐하고 미화해 온 결과”라고 비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저자는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새롭게 나온 주장은 별로 없지만 훨씬 더 선동적, 공세적인 어조로 서술됐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아울러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 시민세력과 연대를 맺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한 <반대를 론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을 출판하였다. 정혜경 위원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해 “역사학 연구자, 그리고 전쟁피해와 인권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불편함을 넘어 고역스러운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 ‘반일 종족주의’ 현상 비판>을 출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이영훈을 비판하였다.## 참고로 강성현 교수는 올해 강의에서 위안부 망언에 대응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강의를 개설한 인물이기도 하다.#
  • 호사카 유지 교수도 <신친일파>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영훈의 확증편향적인 통계자료 활용과 거짓 정보를 활용한 선동, 이중잣대적인 사료 해석 등을 비판했다.
  • 일본 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의 저자인 일본인 학자 도리야마 유타카 박사는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반일종족주의 책을 대략 읽어봤으며 조선인들이 그렇게 가난한 것이 입증되었는데 도리어 일본은 자기들이 그들에게 수탈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모든 돈은 일본에게 흘러갔고 일본이 나빴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관련 인터뷰
2.2.1.1. 학자들의 비판 서적[편집]
위에 서술한 것처럼 여러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 책을 비판하는 책을 저술했다. 다음은 학자들의 《반일 종족주의》 비판 서적이다.
※순서는 출판일순.
  • 도리우미 유타카,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 지식산업사, 2019-09-05.[27]
  • 황태연·김종욱·서창훈·유용화·이영재·홍찬선, 『일제종족주의』, 넥센미디어, 2019-10-15.
  • 정혜경·허광무·조건·이상호, 『반反대를 론論하다』,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2019-12-31.
  • 이영채·한홍구,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창비, 2020-01-15.
  • 김종성,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위즈덤하우스, 2020-02-28.
  • 강성현,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 푸른역사, 2020-02-29.
  • 호사카 유지, 『신친일파』, 봄이아트북스, 2020-03-27.
  • 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 한겨레출판, 2020-07-10.
  • 이철우·박한용·전재호·홍종욱·황상익·강성은·김창록·이송순·정태헌·박찬승·김상규·강성현·변은진·조시현·허영란·김정인·김헌주·서승,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푸른역사, 2020-08-22.

2.2.2. 정치인[편집]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후보자 시절에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28]
  •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우리 국민의 반일 감정을 폄훼하고 일본 식민 지배에 면죄부를 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라며 질타했다. #
  •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두통을 유발한다", "역사에 대한 자해행위"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
  •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비상식적이며 동의할 수 없다", "이건 아니다"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29]
  •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저자인 이영훈, 이우연을 이들은 극우보수라 볼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위안부 망언을 한 마크 램지어를 옹호하는 인사들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관련 기사 이에 저자들이 송영길을 상대로 법적고소를 하는 등 맞대응을 하였다.관련 기사

2.2.3. 언론인[편집]



[1]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인용한 통계의 신뢰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당장 이 책에서 강제동원 파트를 저술한 이우연의 경우 동일 주제에 대하여 데이터를 왜곡해서 강제동원 문제를 왜곡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낙성대 연구소의 논문에 대한 비판 글[2] 이 사람은 이제 학자라고 할 수도 없는 완전히 갈 때까지 간 사람이다. 역사 전공이 아니라 사회학 전공하다 넘어온 사람이라 역사학적 방법론에 충실하다고 보기도 힘든 사람이었는데, 2010년대까지 독립신문 같은 거 가져다 청산리 '대첩'을 밀고, 아예 전공도 아닌 고조선까지 건드려서 고조선이 황하 문명보다 앞선 인류 3번째 문명이라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그냥 환빠와 차이가 없으며 사학과에선 연구사 언급할 때 아니면 논문인용도 안 한다.[3] 이영훈이 최초로 반박했다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배영순, 「韓末·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8 ;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있어서 김해군의 토지신고와 소유권 사정에 대한 실증적 검토」, 『인문연구』 8권2호,1987 등을 본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기 전인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학계 내에서도 신용하와 반대되는 의견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4] 담수 식물이 나온다는 말은 민물이 차있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해수가 밀려오는 방조제로 보기는 어려워진다.[5] 단, '수탈'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장이 아닌 생산관계에서 수탈이 존재했다는 의견들이다. 다음의 한양대 박찬승 교수의 의견들을 참조 바람 # #[6] 당장 세계사 교과서를 펴서 인클로저 운동 파트를 보면 공업화의 토대가 되는 자본 축적과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와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다[7] 앞서 다른 국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발생했다 지적하였으나 조선인은 구분되는 존재로 어디까지나 일본제국 2등신민 처지였다.[8] 즉 역사학계에선 이미 업데이트가 끝났는데, 언론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아직도 문제가 많은 옛날 버전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언론에서 한일역사 문제,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강만길, 신용하 교수 같은 이미 학계에서는 박살난 수탈론자들을 내세워서 자극적인 보도를 계속 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업데이트가 안 된 것이다.[9] 이 책에서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리켜 국제법이 금지한 노예제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가, 2019년에 낸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위안부가 직업적 매춘부였다며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여기에 대해 유투버 헬마우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7년 이영훈의 책인 대한민국 이야기에 실린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내용도 사실 이영훈 본인이 직접 연구한 게 아니라 일본인 연구자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이야기는 풀어쓴 일반인 대상 교양 역사서다. 교수라도 모든 분야를 전공할수 없으니 일반인 대상 교양서나 학부생 레벨 강의에서 전공외 분야를 설명할 때 다른 이의 연구성과를 인용하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00년대까지는 위안부 강제성을 부정하지 않았던 이교수가 2010년대 들어 일본 극우학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문제지 단순히 다른 연구자의 자료를 인용한 자체가 문제라고 하긴 어렵다.[10] 물론 이것이 이승만의 업적이라는 건 좌우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시기 미국은 일본 주장에 동조하면서 이승만에게 러스크 서한을 통해 스스로 독도를 포기하도록 요구할 정도로 한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11] 구체적으로 이 시기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노래를 부른 것은 물론이고 미국으로 하여금 독도에 미군 공군 폭격 훈련을 실시하도록 제안했으며, 미국은 그 제안을 승낙, 그런데 이를 알아챈 이승만이 분노하여 미국에 항의, 끝내 취소시켰다. 그 조그만 바위섬에 폭격 훈련을 실시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일본계인 호사카 유지조차 그의 저서 '대한민국 독도'에서 일본의 이런 수작을 '야비하다'라고 비난하고 있다.[12] 1905년부터 1909년 기유각서를 쓰기까지 대한제국은 외교권, 주한 외국인 관할권, 감옥사무권, 경찰권, 사법권, 군권을 순차적으로 박탈당한다. 1905년에 외교권만 잃은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1910년에 바로 주권을 잃은 게 아니다. 저자의 논조에는 전대미문의 망조가 든 대한제국이 어디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행정력이 기능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다.[13] 박병섭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원래 도쿄교육대학(현 츠쿠바대학) 물리학과 학사 출신의, 30년간 샐러리맨을 하다 은퇴한 인물이었으나 그 후 독도 연구에 매진, 현재 한일 양국에서 독도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이례적인 경력의 학자이다. 이는 그가 재일교포라서 한국어, 일본어, 일본 고어 모두 능통한데다 한국과 일본측 사료를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린 덕분이다.[14] 사실 이케우치가 석도=독도 긍정론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모르고 있었다면, 그가 석도=독도를 부정했던 과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인용했을 텐데 석도 비정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이케우치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15]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29쪽[16] 뭐가 찔리는 게 있어 도둑 제 발 저리듯이 그렇게 괜히 분쟁 지역임을 자인하는 짓을 하겠는가? 단 한가지 예외라면, 이명박의 독도방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 이영훈의 이승만 찬양이 얼마나 과도한지 진중권은 "이영훈은 이승만 빙의했고, 조정래는 아직도 지리산 해방투쟁"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18] 그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해 주간조선에서 박현모와의 논쟁에서 했던 말이다.[19] (이영훈에겐) 영토로 선포한 '석도'가 독도가 아니니까.[20] 물론 러스크 서한은 미국의 잔머리이지 결코 공식의견이 아니다.[21] 다만 도리우미 유타카의 주장은 식민지 시대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실은 전부 일본인에게로 돌아갔다는 논리이기에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분적으로 강화해주는 측면도 있다. 중앙일보는 이런 관점에서 우려된다는 서평을 실었다. 전향적 일본학자의 식민지 조선 수탈사[22] 실제 일본의 혁신 세력들은 대체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일제의 투자로 식민지 조선의 인프라가 대폭 확충되고, 보건의료 수준이 상승하고, 교육이 발전했지만 그 혜택이 식민지조선인에게는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식으로 과거사를 서술한다.[23]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정신적 대부인 안병직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지만, 자료 조사를 하다보니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승이자 동창인 안병직과 이영훈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76회에도 출연해서 이영훈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강연을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허수열 교수의 이영훈 이론 반박 내용들[24] 허수열 교수는 1970년대까지 국사학계의 주류였던 신용하의 수탈론과 1980년대 이후 수탈론의 부실함을 등장한 이영훈의 식민지근대화론 양쪽 모두 근거가 부실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쪽이다.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근대화론, 산미증식계획 항목 참조.[25] 이는 단순히 일제종족주의를 전파하는 학술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학당 유튜브 방송활동, 방송내용의 출판(반일종족주의), 유엔기구를 통한 부왜·반한(反韓)활동, '징용자상' 및 '평화의 소녀상' 건립 반대운동 등 정치활동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26] 이승만의 독도 평화선 선포만 봐도 이승만이 얼마나 반일 성향이 강했는지에 대해 훤히 드러나는데, 정작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저자들이 이승만의 반일 정책과 성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27] 다만 이 책은 《반일 종족주의》 책을 비판하겠다는 목적으로 쓴 책은 아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 출판 이후에 출판됐다는 점,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 이 책으로 《반일 종족주의》 책을 비판했다는 점, 책 내용상으로도 《반일 종족주의》 책 비판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목록에 추가했다.[28] 정작 이 발언에 대해 이영훈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라며 불쾌한 입장을 드러냈다.[29] 이에 윤서인이 댓글로 "명확한 근거와 논리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반문하자, 홍준표는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적었는데 달려드는 것을 보니 좌파들보다 더 하네요."라는 본인이 유지해온 주장에 대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강경한 태도로 반박했다. 참고로 홍준표는 2015년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2017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독일 나치의 유대인 제노사이드(집단학살)에 비견되는 반인륜 범죄.”이며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외교가 아니라 "뒷거래”라고 비판하며 “합의해서도 안 되고 합의의 대상도 아닌 우리가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역사의 아픔” 이라고 했으며 자신의 이 발언에 대해서 비판하자 “일본이 독일처럼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느냐. 전혀 그런 태도가 없는데 왜 합의를 해야하냐?”라고 반박했다. 홍준표는 친박들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강제노역에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경험이 있기에 당연히 이 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입장에 대해 친민주당·좌파 성향 네티즌들은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고장난 시계라며 예찬하고 있다(...).[30] 독일에서는 나치 옹호발언 뿐만 아니라 나치식 경례도 처벌받는다.   

1. 개요[편집]

1877년 일본 태정관 우대신인 이와쿠라 도모미가 작성한 일본국의 공문서.
"품의한 취지의 다케시마(울릉도)  1도(독도)의 건에 대해서 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1]
정확한 내용은 울릉도 외 1개 섬이며, 독도라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태정관 지령에 일부인 지도에서 외 1개의 섬이 독도임을 명확히 확인할수 있다. 이로 인해 태정관 지령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2. 배경[편집]

1868년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내무성 주도로 근대적 지적 편찬 사업을 진행했고, 그 와중에 울릉도(일본명: 다케시마 竹島)[2] 독도(일본명: 마쓰시마 松島)를 자국 지적에 포함시킬지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에 구두 질의를 했으나 "영토 문제는 국가 중대사이니 서면 질의하라"라는 답변을 듣고 돌아가서 곧장 서면 질의를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작성되고 1877년 3월 29일 태정관 우대신인 이와쿠라 도모미 명의로 내무성에 하달된 공식 문서가 '태정관 지령'이다.

3. 내용[편집]


태정관지령
문서 원본
기죽도약도
태정관지령에 첨부된 기죽도약도.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기죽도약도가 태정관지령의 문서가 아닌 시마네현에서 작성된 지도라고 일본 정부측의 공식적인 지도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1877년 3월 17일 일본 내무성 내무경인 오쿠보 도시미치 태정관 우대신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낸 질품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해  다케시마(울릉도)  1도(독도) 지적편찬에 대한 질품서
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外一島は松島なり)

● 원문(한문): "別紙内務省伺日本海内竹嶋外一嶋地籍編纂之件右ハ元禄五年朝鮮人入嶋以来旧政府該国ト往復之末遂ニ本邦関係無之相聞候段申立候上ハ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此段相伺候也"

● 번역(일어): "竹島の所轄の件について島根県から別紙の伺いが提出されたので調査したところ、この島の件は、元禄5年に朝鮮人が島に来たことを契機として、別紙書類に要約したように、元禄9年正月の第一号「旧政府評議の趣旨」に基づき、二号「訳官へ達書」、三号「該国来柬」、四号「本邦回答及び口上書」などのように、結局、元禄12年までにそれぞれ協議が終了し、本邦とは関係無いものとされているようですが、領土の取捨は重大な案件でありますから別紙書類を添えて念のためにこのとおり伺います。"

● 번역(국어): "다케시마 소속 관할의 건에 대하여 시마네현으로부터 별지의 질품이 와서 조사한 바, 해당 섬의 건은 겐로쿠 5년(1692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별지 서류에 적시한 바와 같이 겐로쿠 9년(1696년) 정월 제1호 구정부의 평의 관련 문서, 제2호 역관에게 준 문서, 제3호 해당국에서 온 서신, 제4호 본방의 회답 및 구상서 등과 같은 바, 즉 겐로쿠 12년(1699년)에 이르러 각각 왕복이 끝났으며, 본방은 관계가 없다고 들었지만,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별지 서류를 첨부하여 이에 품의 하나이다."

1877년 3월 20일에 최종 결정을 한 이와쿠라 도모미는 같은 해 3월 29일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아래와 같은 지령(指令)을 통보한다.
● 원문(한문): "伺之趣竹島外一嶋之義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

● 번역(일어): "伺いの趣旨の竹島外一島の件は本邦と関係無きものと心得るべし"

● 번역(국어): "품의한 취지의 다케시마[3]  1도의 건에 대해서 본방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내무성에 통보된 지령은 같은 해 4월 9일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는 편입하지 말라"라는 지시와 함께 전달되었다.

4. 이후[편집]

일본 조선 병합이 본격화되자 오래 전에 작성된 이 문서는 독도 편입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근대 이전의 측량이 부정확하다'[4]라는 빌미로 1905년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하고 '다케시마(竹島)'로 명명하여 강제 편입했다.

이 문서는 100여 년간 일본 정부의 문서고에 은밀히 보관되다가 1987년 교토대학 교수 호리 가즈오(堀和生)가 발견했다. 기사(시사IN) 호리 교수는 학자적 양심에 따라 1987년 <조선사 연구회 논문집>에 태정관 지령을 담은 ‘1905년 일본의 다케시마 편입’이라는 논문을 냈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뻔했고 또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5]

앞선 이유들로 인해 한국에서는 현재 이 문서를 독도에 대한 조선(과 이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유권을 증명할 중요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의 해당 문서링크는 태정관 지령 내 '외 1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옆에 붙은 죽도(竹島 또는 竹嶼島)라고 단언하고 있으며 기죽도약도에도 기죽도(울릉도) 옆에 섬 하나가 그러져 있다는 점을 근거 삼는다. 그러나 이는 1877년 질품서 전문을 확인하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해내 죽도외1도 지적편찬방사 (아래의 해석문은 pdf의 6~7페이지에 해당)
磯竹島는 일명 竹島라고 칭한다. 隱岐國의 서북쪽 120리에 있다. 둘레가 약 10리이며 산은 험준하고 평지는 적다. 내가 셋 있으며 폭포도 있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에는 나무와 대가 조밀하여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 鮑를 잡는 데는 저녁에 대나무를 바다에 투입하여 아침에 이것을 들어올리면 鮑가 가지에 붙는 것이 많으며 그 맛이 절륜하다고 한다. 또 海鹿 한 마리에서 여러 말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 다음에 一島가 있는데 松島라고 부른다. 둘레의 주위 30町 정도이며, 竹島와 동일선로에 있다. 隱岐와 거리가 80리 정도이다.

또 한편에서는 울릉도 서북쪽에 잘못 그려진 아르고노트라는 허상의 섬을 다줄레라는 불리는 울릉도라는 섬과 동일한 실체인지 인지하지 못했고, 일본정부가 이 아르고노토의 오류를 답습 했기 때문에 울릉도 외 한개의 섬 (外一島)이 함의 하는 뜻은 다줄레(울릉도)=아르고나트(울릉도)이기 때문에 일본측은 오직 한개의 섬 즉 울릉도(다줄레=아르고노트)의 영유권만 주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6] 그러나 태정관 지령의 부속 지도 기죽도약도를 레퍼런스로 삼지 않고 서양인이 만든 잘못된 지도를 보고 정부 방침의 지령을 만들었다는 논리 자체가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태정관 지령은 어디까지나 '다케시마 일본 고유영토설'만 부정하고 있지 그 후에 무주지인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과는 상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이걸 가지고 일본 외무성 관리에게 집요하게 따졌는데 ('태정관 지령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뭐, 계속 조사중이라고? 언제까지 같은 소릴 반복할 건데?' 라고...) 이 외무성 관리가 짜증이 나서 '우리 땅이 아니라고 했지 너희 땅이라고 했냐!' 라고 신경질을 부렸다고 한다. 실제로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주인 없는 땅' 임을 근거로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함을 공표하고 있다.[7]

위의 일본 측 주장은 태정관 지령의 제작 과정을 살피지 않았다는(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17세기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에 있었던 울릉도 쟁계(안용복 사건)의 교섭 결과를 근거로 하여 태정관 지령을 제작하였다. 실제 시마네현과 내무성은 태정관에 올린 문서에 울릉도 쟁계 관련 자료들을 첨부했으며, 내무성이 태정관에 보낸 질품서에서도 안용복이 언급되고 있다. 즉, 메이지 정부는 과거 에도 막부가 울릉도 및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것을 근거로 하여 ‘품의한 취지의 죽도(竹島·울릉도) 외(外) 일도(一島·독도)의 건에 대하여 본방(本邦)은 관계가 없음을 심득(心得)할 것’(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 아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독도를 무주지가 아닌 조선(한국) 영토라고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단지 '태정관 지령에 독도는 조선(한국) 영토라는 명시적 표현이 없으니 독도는 한국 땅이 아니다.'라는 일본 측 주장은 전형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에 해당한다.

뉴라이트 이영훈 교수는 태정관 지령 제작 당시 일본이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태정관 지령은 한국의 독도 고유영토설에 아무 근거가 되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 기사 이러한 이영훈 측 주장에 대한 반박 기사들도 나왔으니 참고.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반박정태상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의 반박

[1] 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한국은 '울릉도 독도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라고 보는 반면, 일본은 단지 그 두 섬이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만 했을 뿐, 한국 영토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주지라서 앞으로 일본령으로 한다’는 시마네현 고시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2] 당시까지만 해도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이후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는 데 문제가 생기자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서 '다케시마'를 울릉도가 아닌 독도로 바꿔치기 하고 독도를 무주지라고 주장하며 강제 편입했다.[3] 이것만 본다면 왜 독도가 두번이나 나오냐 의아해할수도 있지만, 그때 당시(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칭해지던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뜻하며, 독도는 마쓰시마라고 칭해졌었다.[4] 한국의 독도는 울릉도에 붙어 있는 작은 섬인 죽도(죽서도)라는 게 당시 일본 주장의 요지.[5] 호리 카즈오 교수는 독도 문제 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서도 활약한 학자인데, 이영훈의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군표의 액수가 일본 화폐 '엔'이 아니라 이미 초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루피'라는 것을 논증한 학자이기도 하다.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의 저자이자, 한때는 이영훈과 동문수학한 전강수에 따르면, 이영훈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반일종족주의에서 위안부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주장을 하다 뒤늦게 호리 교수의 논문을 읽고 당혹했는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어떻게든 이를 얼버무리려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그 논리가 너무 허술하다고 지적하고 있다.[6] 독도/역사 아르고노트 오류를 참고.[7] '비록 우리 땅은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주인이 없었으니 시마네현 고시를 토대로 1905년부터 우리 땅으로 한다'라는 논리라면 1877년 이전에도 조선령이었던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박세당 문집, 안용복 등등.. 이밖에도 근거야 차고 넘치니, 독도 문서를 참고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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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짓말은 한국의 문화" 주장2. 박근혜 탄핵 여성혐오설3. 저자들의 비전공 분야에 대한 미숙함4. 일부 저자의 중립성 결여5. 확증편향적 통계 인용6. 이승만의 반일성향 문제 회피7.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 서술 부재8. 황현필 한국사 강사의 비판

1. "거짓말은 한국의 문화" 주장[편집]

이영훈은 구체적인 수치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은 거짓말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거짓말 문화는 국제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며 "2014년에만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이며 "일본에 비해 172배"이며 "인구수를 감안한 1인당 위증죄는 일본의 430배"이며 "허위 사실에 기초한 고소, 곧 무고 건수는 500배", "1인당으로 치면 일본의 1,250배"이며 "보험사기가 만연해 있"고 "2014년 자동차 보험, 생명보험, 손해보험, 의료보험 등 보험사기의 총액은 4조 5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어느 경제신문은 미국의 100배"[1]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자료에 대한 확대해석, 왜곡된 반응이다.

우선 양국의 사법 문화와 행정 체계가 달라 범죄 통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선 일본은 경찰이 일차적인 수사권을 가지고 있어, 선별작업을 거친 후 고소· 고발을 접수한다.[2] 게다가 일본 검찰은 무죄로 나올시 불이익이 상당해서 유죄가 확실하지 않으면 기소자체를 안한다.[3] 되던 안되던 일단 기소를 들이박고 보는 성향이 강한 한국 검찰과 다른 사법 문화를 가진셈.[4]

이에 대해서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에서 분석한 평가. ##

2. 박근혜 탄핵 여성혐오설[편집]

<반일종족주의>는 거짓말 한국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재차 박근혜 탄핵은 한국인의 여성혐오로 인해 만들어진 거짓말 때문에 일어난 사기극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한국 정치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근혜라고 주장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에 쓰러지고 말았"고 "세월호가 침몰하는 그 시간에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용 수슬을 했느니, 마약을 했으니, 애인과 밀회를 즐겼으니 등등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 온 나라에 가득하였"고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며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 전국은 그야말로 거짓말의 광란"였고, "그 거짓말의 행진"은 "지금"(2019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5]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거짓말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여성 대통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한국인의 집단 심성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다음은 이영훈이 주장하는 여성혐오 사례이다.
얼마 전 광화문에 나갔더니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색 천막이 아직도 쳐 있는 가운데 "왜 안 구했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 몇년입니까. 5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진상은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왜 안 구했나"라니요. 아직도 그 시간에 여성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애인과 밀회를 하거나 마약을 즐겼다는 겁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 거짓말의 천막에 항의하지 않습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

"청와대에서 애인과 밀회했다"는 내용은 세월호 사고 당시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의 보도를 시작으로 떠돌았던 박근혜-정윤회 밀회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영훈의 주장은 사실관계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다.

대통령(박근혜) 탄핵(전원재판부 2016헌나1, 2017. 3. 10.) 현재결정례를 보면 알겠지만 이영훈의 주장과 맞지 않는다. 이영훈이 주장한 여성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하하는 습성 때문에 탄핵된 게 아니다. 그리고 반박하는 명제가 세월호 7시간 검찰 발표#, #와 맞지 않는 비판인데 이영훈은 이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고 있다.

3. 저자들의 비전공 분야에 대한 미숙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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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이 말하는 '종족'이라는 개념은 학술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개념으로, 저자들은 이를 사실상 '부족(tribe)'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한국과 일본 두 집단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모집단'을 상정해야하나 이 책에선 그러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회학적[6], 인류학적으로도 모두 잘못된 개념이다. #, # 이것은 저자들이 경제사 전공으로만 서술하여 벌어진 문제점이다.[7]

또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의 주제에 대해서도 상경계 출신의 경제사 전공자들이 비전공 분야를 무리하게 건드렸다는 관련 단체 및 역사학자들의 지적이 존재한다. # #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275화 피해자를 지우는 '반일종족주의'(feat.타마) 276화 '반일종족주의'-위안부 문제(feat.타마)

4. 일부 저자의 중립성 결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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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역사를 이용한 정치 선동 도서라는 비판도 있다. 2부는 대놓고 북한에 대한 정부의 태도나 친북 종북인사 척결을 언급하는 등 정치적인 주장과 개인 견해가 다수 섞여있다.[8][9] 나중에는 정치적인 문제를 좌파와 한국인들의 "반일" 현상과 엮어 망국론을 이야기 하는 등 중립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 즉 역사와 정치의 인과관계 메커니즘이 매우 부실하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등 또한 이들이 주장하는 소위 "반일" 정책을 폈으나[10], 이 책은 이러한 보수진영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하지 않으며[11], 오히려 일본 문화 개방등의 결단을 내리며 일본에 대해 가장 열린 태도를 보여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의 정책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12]

5. 확증편향적 통계 인용[편집]

첫부분부터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로, 한국인은 '거짓말하는 국민'으로 단정지으며 출발한다. 통계에 입각한 사료비판을 주장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통계적 거짓말을 다수 동원하는 한편, 거기에 민족주의와 한국인의 태도를 매도하기 위한 자극적인 표현이 많아 독자가 주화입마에 빠지기 좋다. 첫장부터 위증과 무고죄가 일본보다 500배 이상 많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성이 반일 민족주의가 막 시작된 1980년[13][14]보다 낮아졌음을 근거로 한국은 특유의 거짓말 문화가 만연한 사회이며 거짓된 반일 또한 이것의 연장선임을 어필하며 시작한다.

"한국은 거짓말의 나라"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위증, 무고죄 500배 운운 부분에는 출처가 나와있지는 않지만 2016년 일본 언론 기사 日언론 "거짓말 만연한 한국, 숨쉬는 것처럼 한다"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이건 악의적인 통계 장난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한국인은 숨 쉬듯 거짓말"…정말 그럴까? 팩트 체크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영훈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데 참고한 한국의 사기, 무고, 위증죄 기소 수와 일본의 사기, 무고, 위증죄 기소 수의 숫자 자체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국가별로 범죄 통계의 집계 기준, 각 죄목이 정하는 범죄 행위의 범위와 구성 요건, 사법 기관 내부의 기소 기준 등등이 다르므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해당 주장 반박 문단에 기소 여부로 한일간 통계가 완전히 갈림을 상술했다.

이는 통계가 지니는 함정을 무시해 버린 채 편의대로 자료를 사용한 것으로 경제학 원로들이 쓴 글이라면서 서문부터 이런 통계 장난으로 시작하고 있으니 그 뒤부터 나오는 통계들도 진위가 의심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6. 이승만의 반일성향 문제 회피[편집]

과거 한국을 현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과거 일본을 현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처럼 불공정한 것이다. 일본을 예로 들면 과거 페리 제독이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본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물질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못했다.[15] 정치적으로 일본은 수많은 분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으나 한국은 중앙정부의 일원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은 이렇다 할 도로나 건물, 위생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일본이 변하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한 뒤부터였다. 한국도 만일 한국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도록 허용했다면 한국은 일본이 이룩한 것을 당연히 이루어냈을 것이다.

이승만 뉴욕타임즈 사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명백히 우수하다', 1919. 5. 18. 출처: 이승만학당[16], 이승만기념관
일인들이 저의 죄를 회개해서 우리와 평화롭게 살자하며 친일하는 한인의 남녀들을 시켜서 다 한국에 충성하는 백성이 되도록 힘쓰게만 한다면 아무리 아프고 쓰린 것도 차차 잊어버리고 양국이 평화로이 지내기를 도모하기로 하고, 이 뜻을 공포해서 일인들도 다 알만치 만들어준 것인데, 그동안 지낸 경과를 보면 일인들은 여전히 한국을 병탄할 목적을 변치 않고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적으로 모든 행동과 선전하는 것을 볼 때 한국을 무시하고 한인들을 모욕하는 것이 전만 못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략)...
여섯째로는 모든 친일분자들을 일본에 모아다 보호해놓고 이 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권 요란을 선동하기를 마치 이전 이조 말년에 들을 모아다놓고 남의 국모 암살하며 침략하던 악습을 행하고 있으니 일인들의 야심을 우리가 더 말할 것 없이 보고 앉은 것이다.

...(중략)...
이런 야심가진 침략자들에게 뒷문을 열어놓고는 우리가 자유를 보존하지 못할 것이오, 나라를 잃어버리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 기왕 사십년 경험으로 다 알고[17] 있으니, 공산당과 친일반역분자는 다 분간해서 후환을 막아야만 될 것이다.

1954년 5월 13일 이승만 담화, 동아일보, 1954. 5. 14. #
지금 우리나라의 걱정은 공산당보다 더 음험한 것이 일본의 야심이다. 그러므로 일인을 걱정하여야 하며 일인이 선전술이 있어서 미국인이 그것을 들어 주고 일본을 부강하게 하고 타국을 거기다 따라가게 하자는 것이 동양의 문제다. 그러므로 어려운 것이고 또 한인 중에도 친일(親日)하는 자가 있어 일본에 의뢰하는 생각을 가진 분자가 적지 않다. 그러니 그러한 자를 잘 분간하여야 한다.

1954년 10월 7일 이승만, 인하공전 개교식에서 #

위의 소개에 적힌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이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을 국민에게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바른 역사서!"라는 반일 종족주의란 책의 주제의식에 근거한다면 사실 한국 대통령 중에서 제일 심각하게 비판받아야만 하는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사실 이승만은 반일을 넘어 거의 혐일 수준으로 일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진영에서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도 반일종족주의와 더 나아가 뉴라이트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폄하하면서 정작 가장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인 이승만을 찬양하는 일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 이승만/평가 문서의 친일몰이 항목에 훨씬 다양한 예시가 있다. 친일몰이 항목도 참고.
  • 평화선 당시 일본어부에 대한 대응: 이때 이승만은 해군을 동원해서 독도 영해를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하고 필요하면 발포하라고까지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약 4천 명의 일본 어민들이 한국 해군에 체포되어 한국 형무소에 감금되었고 그들 중 44명이 죽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일본을 상대로 강경하게 나간 인물은 없었다.
  •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일본이 재일한국인들을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보내버리려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폭파사건을 모의했었다.
  •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18]
  • 대마도 반환 주장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의 한국 입국 거부[19][20]
  •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 발표[21]

강경함과 폭력성의 수준을 따져봐도 이승만은 한국의 대통령 중에서 반일 발언 및 대응이 제일 심하였으며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므로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에 매우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 챕터 이상을 할애하여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기 이루어졌던 행보를 심도있게 다루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의견 표명을 확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승만 찬양만 도배되어 있다.[22]

이에 대해서 이영훈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지나치게 경직된 반일정책을 폈다'며 이승만이 강력한 반일정책을 실행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변론하였는데 미국은 일본이 공산품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은 농·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요구를 했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였다고 한다.[23][24] 또한 독립한지 얼마 안 된 신생국으로써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정책을 펴야 했다고 답했다. #[25]

하지만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후 행적들과 발언들을 보면 국가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반일 정책을 펴야 했다는 것은 이영훈 본인의 변명에 가까운 것이다. 일본 내막기등을 저술하고, 대통령 집권이후 대 일본 정책들을 보면 단순한 집권자로서의 정책이 아니라 이승만 개인 스스로도 상당힌 강경한 반일 성향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미국에서도 이승만에 대해 명확하게 반일 성향이라고 정리했으며[26] 독도 평화선에 대한 대책만봐도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강경한 반일 정책들 일색이다. 이정도의 강경한 반일 정책들을 펼친 정치인에 대해 반일 성향을 정당화 한다면 반일에 대한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한 것 자체가 그의 학문적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고[27] 실제로도 이것 때문에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면 선택적으로 채택해서 써먹고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침묵한다.[28] 그의 사상적 가치의 중심은 이승만 재평가와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민 저변적인 '오독'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기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이자 최고권력자였던 이승만에 의해 반일 정책이 주도적으로 이뤄졌고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아이러니는 자신이 추구하는 두 가지 중요 가치를 한번에 묶어서 헝클어놓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저히 양립할 수가 없는 모순이다.

7.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 서술 부재[편집]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정안기는 '1부 08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파트에서 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들을 단순 친일파로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29] 문제는 해당 파트의 서술 방식이다.

처음에는 지원병 모집을 강제 동원과 호구 지책에 의한 지원으로 설명한 기존 한국사의 서술 방식을 단순하고 왜곡된 것이라 비판한다. 이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실시한 배경을 설명 -> 일제가 높은 지원율에 '자기도취'되었다는 서술과 함께 누적 약 80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가 적혀있는 표를 제시 -> 자발적 지원자들의 지원 동기 및 수차례 지원이나 혈서까지 쓰는 열정적 지원 사례 제시 -> 특별지원자들의 참전 경험과 이를 통한 변화 -> 해방 이후 이들이 국군의 장교가 되는 등 대한민국에 기여한 점 서술 -> 지원자들을 단순 친일파로 보는 것의 부당함 역설이라는 순서로 내용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연히 존재했던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은 전혀 서술되지 않는다. 자발적 지원자의 수가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17,000여명은 대부분 자발적 지원자들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선지원병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누적 지원자가 80만 명에 달한다는 일제의 통계는 과장된 것이며,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의 할당량 및 실적 채우기를 위해 수많은 당시 청년들이 강제적으로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 아닌 지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30] 제79회 제국의회 설명자료에 의하면 정안기가 본 책에서 제시한 표의 41년도 지원자 약 145,000여명 중 자발적 지원자는 약 5만 명이며 그보다 많은 8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는 '관청 종용'에 의한 것이다. 이외에도 모집 과정에서 일선 관청과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당대'의 일제 기관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정안기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한 내용이니 굳이 비자발적 지원자들에 대해 서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해당 파트의 구성 방식을 다시 살펴보자.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 이를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강제동원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고 자발적 지원자의 사례만을 언급한 해당 내용을 읽으면 '80만 명이나 되는 조선 청년들 대다수가 열정적으로 일본군이 되려 했으며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은 전혀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정안기가 '육군특별지원병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당 서적에 대한 친일 및 일제 정당화 논란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강제성에 대한 서술 부재와 독자들의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8. 황현필 한국사 강사의 비판[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황현필 문서
 4.1.1.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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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훈 외,『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0~11쪽[2] 이에 대해서 일본 현지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변호사가 직접 칼럼 기고를 통해 언급했다. ##[3] 이때문에 일본 사회에선 검찰 기소=유죄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어서 오히려 재판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다. 엔자이라는 말도 안되는 일본의 사법문화는 이렇게 태동한 것이다. 다시 언급하자면 일본의 사법제도는 사실상 규문주의에 해당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4] 한국 검찰도 99% 이상의 유죄율이라서 기소=유죄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무죄로 나올 시 불이익은 적다.[5]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미래사, 2019, 13쪽[6] 웃기게도 이 책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회학자 류석춘은 이런 틀린 개념을 지적도 안한다.[7] 다만 이것이 저자들이 민족이나 종족의 개념을 몰라서가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 그 자체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다 보니 아예 한국의 민족주의는 민족주의라고 인정하지도 않아서 종족주의라고 폄하한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이영훈 본인은 반일종족주의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며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했다. # 그러나 서양의 민족주의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식민지 정당성 주장과 인종차별,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으로 이어져 결국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불러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게 만들었으며 현대까지 그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가 이보다 나쁘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8] 참고로 뉴라이트 인사들의 대부분은 과거 1970~80년대 활동했던 NL을 비롯한 좌파 운동권 출신(뉴라이트의 대부인 안병직은 마오쩌둥 이념에 심취했으며, 이영훈은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에 몰두하며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죽자 가장 먼저 그의 빈소로 달려간 이력이 있었다.)으로 방향만 친중 또는 친북에서 친일, 친미로 바뀐 것일 뿐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것의 논리구조는 거의 유사하다.[9] 애초에 이들이 진짜 과거에도 탈민족주의 좌파였는지는 의문인 게 이들이 찬양하던 마오쩌둥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 주사파였는데 이들은 북한에 대해 같은 민족이라고 나름 친근하고 옹호하고 동조하던 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이 정말로 탈민족주의자라면 한국의 민족주의 못지 않게 일본의 민족주의와 혐한에 대해서도 반발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동조하는 현상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그저 숭배 대상을 바꾼 걸로밖에 보이지가 않는다.[10] 그들이 얘기하는 식으로 따지면 현대 한국 역사상 반일이 가장 강경했던 시대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이었으나 정작 이 책의 저자들은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11] 다만 김영삼 정부는 비판을 하기는 한다. 쇠말뚝 관련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건으로 말이다.[12] 심지어 김대중 집권기의 일본 총리인 오부치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통해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痛切)한 반성과 사죄", "대북 햇볕정책 지지"를 밝혔고, 그 덕분에 김대중 집권기 한일 관계는 역대 가장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한일 우호 분위기는 양국이 공동개최한 2002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링크[13] 그러나 정작 이승만 집권기인 1952년에 이미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유권 다툼이 벌어졌던 평화선 사건이나, 이승만 집권기에 강경한 반일 성향이 한국 사회에 가득했던 일을 감안한다면 반일 민족주의가 1980년에 막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다분히 근거가 없으며, 이는 뉴라이트 관련 인사들이 존경하는 이승만에게 반일 성향의 책임을 지우지 않기 위한 교묘한 거짓말이다. 한 예로 1954년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과 축구 경기를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가리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14] 아울러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의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시위를 벌이자,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강제로 진압했을 만큼 반일감정이 강렬했던 6.3 항쟁의 사례에 비춰봐도 반일 민족주의가 1980년에 시작되었다는 <반일 종족주의>의 지문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15] 참고로 이영훈은 한국인들이 최악의 국가인 조선을 미화하며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한국 교과서나 드라마에서도 조선의 내부모순이나 실책, 문제점은 다 나타나 있다. 오히려 본인이 존경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을 현 한국인들보다도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승만도 조선에 대한 비판 또한 여러 번 했다.[16] 이승만학당은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중 한 명인 이영훈이 세웠다. 이승만학당의 홈페이지에서는 지금도 친일타령을 그만하자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설령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맞다고 가정해도, 그 내용은 위에 언급된 이승만학당에서 언급된 이승만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17] 1960년대부터 반일 종족주의가 성숙하여, 1980년대에 폭발하였다는 책의 주장과 모순된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언급이 1954년에 있기 때문이다.[18] 이승만 정권은 임기내내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나갔다. 대표적인게 평화선 선포와 해군까지 동원하여 그 선을 넘은 일본 어선에 대해 나포하는 등 일본의 압력에도 독도를 사수해냈다. 심지어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이승만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라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에는 일본과 결코 상종하지 않겠다."라고 끝까지 거부하자 빡친 아이젠하워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국이 일본군의 참전을 얘기하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적도 있다.[19] 이승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 축구 대표팀은 한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원래 서울과 도쿄 두 곳에서 열리기로 한 예선전은 어쩔 수 없이 도쿄에서 두 번 모두 치러져야 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20] 그리하여 1954년 3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과 축구 경기를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가리켜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으라!"는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168쪽[21]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22] 이영훈은 이승만 팬사이트 '이승만학당'의 주필이다.[23] 다만 그런 식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한 예로 박정희 집권기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의 회고록에서도 박정희 시절,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기술했다. 그런데 이승만 시절에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면 나쁘고, 박정희 시절에 종속되면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 출처: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 5권/ 김경재 저/ 인물과사상사/ 2009년 7월[24] 이런 식의 이승만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반일 정책을 펼친 것이라고 변론하는 것은 또다른 어폐가 있다. 이영훈은 이승만의 사례와 달리 현재 한일 무역분쟁에 대해 맹목적인 반일에 의한 결과물로만 판단하고 있지만 한일 무역분쟁의 근본적인 문제점중 하나는 한국의 차세대 산업중 하나인 반도체, 메모리 산업에 대한 아주 치명적인 정책을 실행했기 때문이고 이는 한국에게 있어 일본의 경제종속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이에 한국이 당연히 일본에게 반감을 품을 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인도 일본이 제공했는데 지금까지 한일간에 이루어져오던 산업간의 국제분업을 일본 정치권에서 정치적 사안을 이유로 개입해서 인위적인 제재 정책으로 헝클어놓은 것이다.[25] 그러나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신익희 등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힘쓴 사례들도 있기 때문에 전혀 핑계가 될 수가 없다.[26] 아예 미국내에서 일부 관료는 한일 관계 개선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라고 평할 정도였다.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27] 다만 이영훈 본인은 2004년 9월 5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구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여성을 강제 동원하고 감금하여 병사들에게 성적 위안을 강제한 행위는 국제사회가 협약으로 금하고 있는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라고 해명했다가(https://news.joins.com/article/385601), 15년 후인 2019년에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고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고 자발적인 자영업자였다며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했던 주장을 정반대로 뒤집었고, 이에 대해 MBC 스트레이트 기자가 해명을 요구하자, "당신은 15년 전과 같으냐?"라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다. 이영훈이 이승만의 반일정책에 대해 인정을 했다고 해도 나중에 가서 위안부 문제처럼 그건 사실 반일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을 바꾸거나 할 가능성도 있다.[28] 뉴라이트 전체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팔아가며 자신들의 편향된 일본 미화를 시도하는 강성 이승만 지지자들 때문에 도리어 대중들에게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성향이 상당히 왜곡된 상태로, 아예 이승만 본인이 친일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지경이 되었다.[29] 정안기가 미디어 워치에 기고한 글로 본 책의 내용과 유사하므로 참고할 것.[30] 일본 경찰들이 청년들의 집을 찾아와서 일본군에 자원하라고 마구 닦달을 했으며, 거부하면 구타 같은 폭력도 서슴치 않았다. 한 예로 1943년 2월 26일 일본 내무성은 "응모자는 진심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경찰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지원하였다."라고 인정하였다. 또한 말이 지원병일 뿐,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되어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출처: 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468
     

1. 개요2. 내용3. 평가4. 한국어판5. 기타


1. 개요[편집]

이승만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인 1941년, 미국에서 출간한 국제정치 분석서. 총 203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문은 영어로 저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이 직접한 소개에 의하면 1939년 겨울부터 집필이 시작되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중일전쟁 개전 2년 뒤이며,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직후에 집필이 시작됐고 진주만 공습 직전에 출판된 것이다. 원문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자. Japan Inside Out

2. 내용[편집]

이 책에서 이승만은 일본 제국군사적 야망한국을 포함한 그 이웃나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으며, 일본 제국과 미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마지막에 결론을 냈다. 하지만 동시에 책 전반부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전략적으로 너무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충돌을 회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서문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승만의 몇몇 친구들이 자신에게 "너는 일본하고 미국이 싸우길 원하지?"라고 묻더라는데 이승만 왈,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를 바라지만 미국이 계속 극동의 일에 무관심하다보니까 저 멀리서 발화한 산불이 계속 번져와서 이젠 미국의 이익까지 침해하고 있다. 그런데 왜 미국은 아직도 남일보듯이 무관심하냐"고 대답한다.

또, 이 책의 2015년 출간된 번역본인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를 통해서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전략적 요충지로 상하이, 인도차이나, 홍콩, 버마,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필리핀, 괌, 하와이, 알래스카, 호주,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복 행진을 두개 방향 중 어느 쪽으로든 개시할 것이다. 시베리아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병력을 통합한 후 남태평양 지역으로 진격하거나, 아니면 시베리아로 쳐들어가서 우랄산맥 이동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전략을 비교해보면, 남방 진격이 훨씬 더 구미가 당길 것인데, 그 이유는 영,불,화란의 식민지들은 일본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전략적 물자들을 더 많이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향은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할 위험부담이 있다. 북방 정벌은 비교적 쉬울 것이고, (중략) 일인들은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알래스카로부터의 미군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공군기지를 그곳에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류광현 옮김, p.296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일본이 남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해서 전선을 형성한 뒤, 기존 서양 열강의 식민지를 후방에서 통치하거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로 진출하여 미미한 저항을 꺾고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두 전략을 구상할 것이라 예상했다.[1] 그러므로 하와이와 알래스카에 일본이 진출할 것이라 한것인데, 문맥을 살펴보면 미국과의 전쟁 없이 진출하는 방향을 노릴 것이라고 하였다.

책의 초반부는 일본의 국가신토와 팽창주의간의 연관에 대해서 설명하고 중일전쟁도 다룬다. 국가신토를 설명하기위해 일본 역사를 짧게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이자나기이자나미 등의 단어가 나와서 묘하게도 일본에 익숙한 사람이 보기에 왠지 친근하다. 그리고 일제의 팽창이 서구의 이익과 충돌하는 예시들을 거론한다. 이승만은 일제가 미국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어처구니 없는 일이며, 미국에 가하는 군사/외교적 위협은 블러핑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책의 중반부는 미국 내의 자칭 "평화주의자"에 대한 설득과 강력한 비판이 공존한다. 고국이 침공받으면 나라를 위해 직접 싸우러가겠냐는 질문에 이승만이 그렇다고 하자 그럼 당신은 군국주의자라고 어떤 평화주의자가 말하더라는 개인적 일화를 포함한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평화주의자들은 미국의 손발을 묶어놓으면서 미국에 해를 끼치는 이들이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의도 자체는 선하니까 나치 등의 군국주의세력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책의 후반부에 오면 이승만은 미국이 필리핀을 먹기 위해 야합하면서 한국에 대한 수호의무[2]를 다하지 못했다면서 이것이 위대한 미국 역사의 오점이라고 비판하고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친일성향도 거론한다. 하지만 그런 시어도어 루즈벨트마저도 일본을 키워준 결과 군국주의 야욕만 강화시키고 있다는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일본 연안에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했다는 일화도 소개한다. 미국이 필리핀을 포함한 스페인의 구식민지들을 차지한 것은 민주주의를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나타낸다. 그리고 말미에는 전체주의 진영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행동을 요구한다.

3. 평가[편집]

Asia Magazine 19...

소설 《대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Pearl Buck) 여사가 이 책에 대해 쓴 서평이 월간지 《아시아(Asia)》 1941년 9월호에 실렸다.

아래는 번역된 펄 벅 여사의 서평 전문.[3]
한국의 우국지사인 이승만 박사가 대담하게 한국인의 관점에서 일본에 관한 책을 썼는데 'JAPAN INSIDE OUT'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너무나 진실한 것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

사실 일본에 정복당한 국가의 한 국민으로서의 이 박사는 전체적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그는 그곳의 참상(慘狀)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곳에서 일어났던 현상(現狀)들을 말하고 또 그것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극동에서 일본이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질서”에 관하여 권위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곧 한국 사람일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국제정치에 대해서는 천진난만하고 무지했던 한국인들이 요구했던 것은 단지 자신들을 내버려둬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그들은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을 겁내 왔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가 일본이 중국으로 쳐들어가려고 할 때 발판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나라들과 서양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자마자 한국은 서양의 강대국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적의 침략을 받게 되었을 때 서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한 조약이 미국과는 1882년에 체결되어 조인되었다.

나는 이 박사가 미국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 즉 미국이 1905년에 이 조약(조미수호조약)을 수치스럽게도 파기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도록 허용했다고 말해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박사는 “이것이 큰 재앙을 가져오게 한 불씨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두렵지만 그 말은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그것은 무자비한 영토 쟁탈전을 시작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역사상 우리 세대를 인류에 대해 불명예를 저지른 세대로 낙인찍게 만들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마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기를 바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외교에서의 사악함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실들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지만 이 박사는 그것들을 한국인으로서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종교적으로 신봉하고 있고 인류에 대한 신(神)의 사명을 믿고 있는 일본인들의 위험천만한 정신세계를 그는 명쾌하게 밝히고 또 강조하고 있다.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를 설명하고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진실하고 뜨거운 마음으로부터의 경고를 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일본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憎惡)는 없으나 다만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상태가 전 인류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우리들이 나치즘(Nazism)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했던 속임수와 거짓 핑계와 망상 등은 히틀러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일본의 정책이었음을 이 박사는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인들이 읽어야만 할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미국인들을 위해 저술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읽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이 전부 정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상을 이승만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일본을 잠재적 적국으로 내정하고 일본의 기습공격을 포함하여 일본과의 전쟁상황을 대비한 오렌지 계획을 준비해왔다.[4] 미 해군 제독 어니스트 킹 또한 전간기에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했었고 실제로 거의 그대로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에 대한 너무 과도한 찬사는 마치 당대 미국의 대일 인식은 환상에 젖어있었으나 동양에서 온 이승만이 예언자적 경고를 하고 미국은 이 말을 무시하다가 진주만 습격을 당하고 뒤늦게 이승만을 인정한다는 식의 서술인데 이런 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 내막기에 있지도 않은 내용들이 주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미국 사회가 일본에 대해 환상만을 품고 현실을 외면했다거나 막연하게 낙관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일본 내막기가 진주만 공습을 예언했다'는 말도 약간의 과장 섞인 발언이다.

1차대전 직후인 1920년대에 미일간 건함경쟁의 과열로 인해 양국간 전쟁 위기가 고조된 바 있으며 1920~1921년 사이에는 양국간의 전함 총량이 균형에 도달하는 1923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측을 담은 저서가 여럿 출판될 지경이었다.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이러한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1930년대로 접어들어서 런던 군축조약이 일본의 탈퇴로 유명무실 해지자마자 양국은 각각 아이오와급야마토급을 경쟁적으로 건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중일전쟁파나이 호 사건이 발생하며 미국의 대일 여론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참고로 일본 내막기는 이 두 사건 이후에 집필이 시작됐고 책 내용에도 비중있게 거론된다.

또한 이승만의 저서는 2차대전 전후에 출판된 영어권의 주요 일본 관련 서적들을 분석, 인용하는 방식으로 집필된 루스 베네딕트국화와 칼에 언급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일본 내막기를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관련 분야의 영미권 논문이나 서적 자체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일본 내막기가 정말 미국의 대일인식을 획기적으로 뒤바꾼 예언서였으며 돌풍을 일으켰다면 태평양전쟁과 전후 미군정이라는 시기상 다른 일본 관련 유명 서적들처럼 많이 인용되었을 것이다.[5]

따라서 담백한 역사적 사실은 이승만이 1941년 중순 일본 내막기를 발간했고, 그해 겨울 진주만 공습이 터지면서 일정기간 상당히 팔렸다는 것이다.[6] 그렇지만 오히려 이 책을 높게 평가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승만이 최종적으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하고 팽창적 야욕을 펼치는 일본 제국을 막고 동아시아에서의 영구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결론을 위해 아주 집요하게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한미동맹을 통해 중국과 일본 모두 미군으로 인한 억제력으로 2차 대전 이후 지난 70여년간 열전 없이 기나긴 평화가 지속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것을 볼 때, 또한 앞으로도 이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굉장히 놀라운 지정학적 통찰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일본과 미국이 전쟁 전야로 치닫던 1941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에 대해 조예가 깊은 이들이 꾸준히 우려의 목소리를 내오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지만 과연 저 당시 조선인 중에 이 정도 식견을 가지고 책을 내며 한국인들의 독립의 의지와 당위성을 당당하게 세계 여론에 설파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승만 말고 있었냐는 차원에서 대한민국 국민에겐 아주 가치있는 저서라고 볼 수 있겠다.

4. 한국어판[편집]

국내에 처음 번역된 것은 광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4년으로 이때 '일본 내막기'라는 제목이 붙었다. 번역자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국민들에게 알려질 기회도 없이 묻혀버리고 만 것.

1987년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었고 2007년에 '일본, 그 가면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대한언론인협회에서, 2015년엔 비봉출판사에서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 천황전체주의의 기원과 실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5. 기타[편집]

  • 이승만이 미국의 선교사 인맥을 발판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는 일면이, 일본 내막기를 발행한 레벨(Fleming H. Revell Company)출판사는 기독교 복음서를 전문으로 내놓던 곳이다.
  • 미국 내에서만 2차 대전이 끝날때까지 약 12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정확한 수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워싱턴서 본격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할 집을 살 정도였다고 하니 인세로 많은 돈을 번 것은 확실해 보인다.
  • 2017년 광창미디어에서 원문을 재출판하였다. 2005년부터 무려 12년 간 세계 각국의 문서보관소들을 돌면서 원문의 사소한 오류를 교정하는 작업을 벌였다는 듯.
  • 이 책의 타이피스트는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하루종일 원고를 쓰고 고치고 교정하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어깨 통증에 시달렸는데 통증이 너무 심한 날이면,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포토맥 강변 벤치에 앉아,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아리랑 노래를 불러줬다고 한다.[7]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시름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오다 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잊겠네[8]

[1] 이쪽이 더 전략적으로 우위에 있을 것이라 서술했다.[2]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가리킨다.[3] 《Asia》, THE ASIA BOOK-SHELF with Reviews by Pearl S. Buck p. 521-524[4] 미국은 블루, 가상적국 일본은 오렌지로 지칭하였기에 오렌지 계획이다.[5] 한가지 예로 1934년에 중국에 체류하던 AP통신 기자이자 워싱턴 대학교 교수였던 조셉 워싱턴 홀이라는 사람이 '업턴 클로즈'라는 필명으로 출간한Challenge: behind the face of Japan은 미국의 판매고 1위를 기록하는 잡지였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그 내용이 연재되었을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까지 올랐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에 이 책은 <Behind the face of Japan>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 된다.) 여기에서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팽창주의에 대한 분석 및 비판을 하면서 말미에 '일본과의 충돌은 이대로면 불가피하다'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고립주의자라 개입을 주장하지는 않지만이승만하고는 상극 '미국과 일본은 전쟁으로 얻을게 없으니 최대한 충돌을 피해야 하나 결국 전쟁은 빠르던 늦던 터지고야 말 것'이라고 비관적인 결론을 낸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 팽창주의, 서양의 지배에 대한 도전, 광신적으로 변한 천황제, 인종주의 등을 거론한다. 국화와 칼에서 인용된 이 책과 일본 내막기의 영어 원제와 부제는 아주 유사하지만 이승만 또한 2년 전부터 집필을 시작한터라 서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 시절 저런 주장이 한 쪽에서 계속 논의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쨎든 결론적으로 일본과의 충돌을 예측했던 사람은 이승만 뿐은 아니었다.[6] 책이 꽤 팔렸던지 부인 프란체스카의 일기를 보면 이 때 처음으로 가난한 독립운동가인 남편이 자신에게 코트를 사주었고 남은 돈으로 워싱턴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칠, 헤드쿼터로 사용할 집을 마련했다고 나온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선물받은 해당 코트는 현재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가 물려받아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다.[7] 리 푸랜세스카, 《대통령의 건강》, 보건신문사, 1988, p. 130-133[8] 마지막 줄은 이승만이 직접 지은 가사.
    
 
이승만학당을 운영하는 이영훈의 주장과 정반대의 이승만 전대통령이네요.

토지개혁을 통한 지주들의 토지를 보상금 주고 농민에게 돌려준 이승만 대통령
당시 지주들 중에서 거대 지주들은 호남에 집중 호남의 지주들은 보상금에 뺏긴 토지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을 증오하기 시작함. 오히려 소작농들이 자신의 농지를 정부로 받고 소작농을 면하게 된게 이승만 대통령 때문인데
 
민주당이 호남을 가스라이팅을 하게된 이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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