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손키라쿠'라는 책을 통해 메이지 시대라는 여명을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한 존 만지로;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대정봉환의 사카모토 료마, 탈아론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스승격; 존 만지로에게 호의적이었고, 서구문명에 보다 개항적이었던 사쓰마번의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효손키라쿠'라는 책과 존 만지로라 불리는 사람은 메이지 시대라는 여명을 여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만지로에게 지역 엘리트 자제들에게 외국 경험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다. 미천한 어부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만지로를 다이묘의 가신, 곧 하급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시켰다.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포경술 외에 영어도 가르쳤다. 그는 도사 번의 번교(번이 세운 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독립정신, 세계 바다를 여행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이때 뒷날 도사 번의 참정이 되어 대정봉환에 기여한 고토 쇼지로, 사사키 타카유키, 정한론을 주장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미쓰비시 기업을 창업하는 이와사키 야타로[33], 군인 오토리 케이스케, 법학자 미츠쿠리 린쇼 등 일본 근세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 최초의 영어 교본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일본 영어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또 항해나 조선에 관한 각종 서양 기술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영어 교육, 강연 등을 했다. 당시 만지로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정부의 해군을 현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본이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로 한 것은 대선(大船)을 갖춘 강력한 해군이었다. 1854년 5월, 막부가 주도하여 마스트 3본 형태에 용골(龍骨)을 갖춘 최초의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호를 건조했고, 이어서 증기선 건조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만지로가 조선(造船) 디자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막부 말기에 구입한 선박의 대부분이 4, 5년 만에 그 생명을 끝냈다. 원인은 밑에 나오는 간린마루의 태평양 횡단 당시 일본 선원이 그랬던 것처럼 악천후 시 조선기술의 미숙으로 많은 배가 좌초해 침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항해기술이나 조선기술은 점차 향상되어 러일전쟁 때에는 세계 수준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신속한 기술 향상을 실현할 수 있었냐면, 발전의 기초가 되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존 만지로는 그 시스템 만들기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100년 후인 1960년 미 해군의 존 브루크(John Brooke) 대위의 항해일지가 공개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간린마루에는 브루크 대위를 포함해 11명의 미 해군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의 일지에는 간린마루의 항해가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 선원들은 겨울철 태평양의 거친 파도 폭풍에 대응할 기술이 없었다. 출항 다음날부터 날씨가 험악해져 난항을 겪얶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 태평양 항해인 이 항해는 통역으로 타고 있던 존 만지로가 미국인 선원들과 함께 '간린마루'를 조종했던 것이다. 위에 적힌 내용과 태평양 횡단을 이끈 실적을 보면 그의 선박 및 항해기술 능력은 서양 열강국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의 선장은 가쓰 가이슈였는데, 배멀미로 드러누웠고, 기술도 부족해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만지로는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에도 직접 도움을 주며, 사실상의 함장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전부터 항해 경험이 풍부했던 만지로가 배의 운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브루크 대위는 만지로의 활약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860년 2월 5일 존 만지로와 함께 간린마루를 여행한 브루크 대령의 일기에는 "우리 존 만지로가 일본의 개국에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함장은 설사를 일으키고, 제독은 배에 취해 있다. (중략) 일본 해군에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선원 중 만지로가 유일하다. (중략) 나는 일본해군의 개혁에 힘쓰겠다. 그리고 만지로를 돕는다. (중략) 만지로는 누구든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지만, 또 동시에 뭔가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매우 위험한 지위에 있으므로 매우 조심해서 균열을 피해야 한다. (중략) 만지로는 나와 함께 왔지만, 다른 일본인들은 너무 느리고, 또 관심이 없어서 덱에 나온 것은 한두 명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선실로 돌아왔다. 곧 만지로가 내려와 모두를 갑판으로 모았다고 보고했으므로 나도 갑판으로 올라가 배를 북동미동으로 향했다. (중략) 만지로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너새니얼) 보디치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중략) 그는 모험정신이 풍부한 사나이다. 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을 묻겠다. 그는 대단히 이야기를 좋아했고, 일본의 개국에 대해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공로가 많았다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다.

― 존 브루크(John Brooke)의 항해 일지[39]#

 이때 만지로는 후쿠자와와 함께 미국의 서점에서 웹스터 영어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일본에 가져와 번역하였다. 1866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쿄대학의 전신이 되는 가이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카이세이 학교에서 그는 영어를 지도해, 후쿠자와 유키치나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등을 가르치는 등, 교육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살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새 체제에서도 만지로는 여러 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혹은 해상 사업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1870년에는 보불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다. 만지로는 이 당시 유럽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워싱턴 D.C.에서 정식으로 영접을 받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윗필드 선장을 만나기 위해 그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페어헤븐으로 육로를 여행했다. 그리고 은인인 윌리엄 윗필드 선장을 만나게 된다.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고 만지로도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선장의 부인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1년만의 재회였다. 윗필드 선장은 집에 있는 딸과 세 아들을 만지로에게 소개한다. 이 때 만지로는 선장에게 일본도를 선물했다고 한다.[40] 만지로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곧 알려지면서 다음날 아침 선장 집 앞은 발칵 뒤집혔다. 과거 함께 동문한 반 친구를 비롯해 지인들도 몰려왔다고 한다. 윗필드 선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날 현지 신문은 만지로의 방문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에도 막부 말기의 존 만지로의 행적은 미국의 다양한 문물을 소개하고 서양 지식을 흡수하고자 했던 막말의 지사들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표류는 죽음을 의미했다. 살아 돌아올 확률은 1% 미만이었다. 그러나 만지로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았고 미국 본토에 상륙해 미국식 교육까지 받은 뒤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했다. 일본으로 돌아 온 그는 개화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준 조타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해외에 갔다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존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으로 출세하려면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그 분노로 막부 타도를 외친건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 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사카모토 료마[41], 이타가키 다이스케[42], 이와사키 야타로, 고토 쇼지로, 자유주의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43] 등에게도 영향을 줬다.

만지로는 엘리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외교 업무를 돕고, 조선과 해군 창설 등에 직접 간여했다. 또한 그는 봉건체제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일본인들에게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만지로의 지식은 메이지 체제의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1889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존 만지로는 서구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일본의 문호 개방하는 데에 일조했다.# 미일관계에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평민 출신으로 출세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정치인 친구들이 높은 자리를 제안했음에도 거부하고 교육자로서 헌신했다고 전해진다. 그 사이, 나카하마에도 몇차례 귀성해, 어머니(1879년에 86세로 병사)를 문병했다.

이후 낫긴 하지만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해서 비교적 조용히 살다가 1898년 존 만지로의 셋째 아들 케이사부로가 미국으로 갔을 때, 존 만지로는 아들에게 윗필드 선장의 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케이사부로는 미국에 사는 친구를 통해 윗필드 선장의 주소를 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선장은 이미 그의 장남 메르셀라스에게 집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존 하울랜드 호는 1883년 북극해에서 항해 중 실종되었고, 만지로의 또다른 조력자 데이먼 목사는 1885년에 세상을 떠났다. 케이사부로는 이 정보를 일본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러나 존 만지로 자신도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도쿄 교바시구 장남 나카하마 토우이치로의 집에서 뇌출혈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조시가야영원(雑司ヶ谷霊園)에 있다.

이후 이러한 방식으로 윗필드 가문과 만지로 가문 간의 관계가 다시 형성되었다. 이 관계는 존 만지로와 다른 네 명의 도사 어부들이 난파된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의 사후 30주기에 해당하는 1928년 위계 정5위가 수여됐다.

 

 

 

시마즈 나리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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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시마즈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斉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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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무사시국 도지마군 에도 시마즈 저택
(현 도쿄도 미나토구)
사망
1858년 8월 24일 (향년 50세)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재임기간
제28대 시마즈 당주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편집]

사쓰마의 11대 번주. 막말 4현후로 꼽히는 명군 중 하나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등용하고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2. 생애[편집]

분카 6년(1809) 3월 14일, 사츠마번 10대 번주 나리오키(島津斉興)의 장남으로 에도성 사츠마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난벽[1] 성향으로 번의 재정을 말아먹은 증조할아버지 시게히데(島津重豪)의 난벽을 물려 받은건지, 어릴적부터 서양 문물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마침 2년 후 태어난 작은 할아버지 쿠로다 나가히로[2]와 함께 서양의 문물을 즐기며 에도성에서 성장했다.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나리오키는 핵심 가로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와 함께 할아버지가 말아먹은 번의 재정을 복구시키느라 평생을 고생했는데, 장남인 나리아키라가 할아버지처럼 서양 문물에 눈을 번뜩이자 질색팔색을 했다고 한다. 본디 적통 후계자가 성인식을 치르면 선임 번주는 가로직을 물려주고 상왕정치를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10대 번주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가 장성한 뒤에도 당주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시간을 끌었고, 카에이 원년(1848) 경에 와서는 가로 즈쇼와 함께 5남 히사미츠(島津久光)[3]를 후계자로 밀었다. 하지만 나리아키라도 막부 중앙정부의 로쥬(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를 비롯해 친(親)나리아키라 성향의 다이묘 군단[4], 그리고 사츠마번의 소장파(혹은 친나리아키라파) 무사들을 동원하는 등 외교전에 들어갔고, 카에이 4년(1851) 3월 4일 쇼군의 명령을 통해 아버지를 은퇴시키고 11대 사츠마 번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오유라 소동)

번주로 즉위한 직후 카에이 4년 7월, 토사번 출신의 표류민 존 만지로가 미국에서 사츠마로 흘러들어오자 사츠마 번사들을 동원해 미국식 (선진) 조선법을 캐내기도 하고, 사츠마번에 용광로, 조선소, 공업단지 등을 건설하고 면포 방직 사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서양식 군함(昇平丸)을 건조해 에도 막부에 헌상하며 일장기를 걸 것을 제안하기도 했고, 쿠로후네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이전부터 일본 최초의 자국산 증기선(雲行丸) 생산에 착수하는 등 서구문물의 수입과 자국[5] 공업화, 그리고 해군양성에 집중된 번정을 펼친다.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나리아키라는 토자마 다이묘로서 소외된 시마즈 가문이 에도 막부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오유라 소동 당시 동맹으로 나서준 친나리아키라 파벌의 다이묘 모임과 어울리며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다녔는데, 이 모임의 또다른 대표 슬로건이 존황양이(尊皇攘夷)였기 때문에, 난벽 다이묘로 명성이 자자한 나리아키라답지 않게 양이론의 기치 아래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시마즈 분가에서 텐쇼인을 양녀로 받아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부인으로 보내기도 하고,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할 때도 한마디 얹는 등 토자마 다이묘답지 않은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세이 5년(1858) 7월 5일, 히토츠바시파는 결국 반대파[6]의 당수 이이 나오스케에게 패배해 난키파(南紀派)가 밀던 고산케 키슈번주 이에모치가 차기 쇼군에 올랐고, 히토츠바시파는 정란을 맞아 대숙청을 당하게 된다. (안세이 대옥)[7]

한편, 이 시기 나리아키라는 에도성을 나와 영지인 사츠마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지난 5일, 다이로 나오스케가 지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무력으로 항의하기 위해 카고시마에서 군을 일으켜 교토로 출진할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거병을 준비하던 7월 8일 갑자기 쓰러지고 7월 16일 그대로 급사한다. 나리아키라는 이복동생 히사미츠의 아들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12대 사츠마 번주의 가독을 물려주고, 선대 가주이자 친아버지였던 나리오키에게 후견인 역할을 맡긴 뒤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안세이 4년(1857) 9월 17일, 가신이었던 이치키 시로(市来四郎)를 시켜, 일본 최초의 사진을 찍은 것[8]으로 알려져있다. 사진의 피사체는 나리아키라 본인의 초상.

정치적 동지였던 마츠다이라 슌가쿠로부터는 슌가쿠 자신은 물론 야마우치 요도나 나베시마 나오마사를 능가하는 당대 제일의 다이묘라는 극찬을 받았다. 나리아키라로부터 발탁되어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로부터도 존경받았으며, 나리아키라와는 다른 세력에 속했던 가쓰 가이슈 이토 히로부미 또한 나리아키라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1] 오란다(네덜란드=서양) 문물 덕후 기질[2] 증조할아버지 시게히데의 13남. 훗날 쿠로다 가문으로 입양을 들어가 성씨를 바꾸게 된다. 마찬가지로 난벽 다이묘로 유명세를 떨쳤다.[3] 나리오키의 첩실이였던 오유라(お由羅)가 낳은 아들. 성인식 때 받은 이름은 타다유키(島津忠教)지만 본 문서에서는 역사상의 이름으로 남게 된 히사미츠로 통일해 서술.[4] 훗날 이이 나오스케와 충돌하며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밀었던 히토츠바시 파벌의 원년 멤버들이다. 우와지마(宇和島) 번주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후쿠이(福井)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등이 목록에 들어간다.[5] 사츠마번을 의미[6] 공무합체에 반대해 막부 중앙권력의 강화를 주장하고, 존황양이에 반대해 개국론을 주장했다. 차기 쇼군으로 밀던 이에모치가 고산케 키슈번주였기 때문에 키슈번의 별명에서 따와 난키파(南紀派)라고도 불렀다.[7] 안세이 5년, 에도 막부의 정국은 1) 차기 쇼군을 둘러싼 당파싸움, 2) 공무합체 문제, 3) 존황양이론 및 개국론 문제, (존황양이와 연결되어) 4) 계속 압박을 가해오는 미국과의 조약비준 문제 등이 한꺼번에 얽혀있는 시기였다. 자세한 사항은 안세이 대옥 문서를 참조할 것.[8] 다게레오타이프(Daguerréotype): 은판사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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