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브랏따 개념을 몰라서 성공한 영국적 인도인, 마하트마 간디

 

5.3. 비판[편집]

인도의 정신적 지주라는 간디도 생전에 실책과 과오를 숱하게 저질렀다. 쇼맨십이 상당히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간디의 이미지 자체를 뒤흔드는 도덕적 추문도 있다.일부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으로 과장하거나 날조한 부분도 있으므로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로는 여성차별, 인종차별주의자 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까지 했다.
  • 이렇듯, 간디의 군 복무 기록과 각종 증언을 토대로 간디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의견이 강하다. 특히 줄루족을 학살한 보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주간지인 《사고 리더 메일과 블로그》(thought leader mail & blog)의 2008년판에도 간디의 인종차별 및 학대에 대한 기사가 작성될 정도로 흑인 사회에서는 간디를 흑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차별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조 문헌)
    일본과 일본의 간디 관련 위인전을 번역해 읽었던 한국에서는 간디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직접 연관이 있는 영국 및 서방의 경우에는 이미 간디의 실체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기록과 그에 대해 분석한 저서가 넘쳐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서로는 G.B싱(G.B. SINGH)이 쓴 《간디: 신의 가면 뒤에는》(Behind the mask of divinity) 등이 대표적이다.저자는 간디 추종자들의 살해 협박을 피하기 위해 필명을 사용했으나 책에는 실제 기록과 자료를 인용했다. 또 2016년에 서아프리카의 가나에서 간디의 동상 철거요구를 하기도 했다. # 결국, 해당 동상은 2018년에 해당 대학생과 교수가 손수 철거했다.
  • 간디는 남아프리카 의회에서
    "식민지에서의 일반적인 믿음은 인도인이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야만족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했다.
    1893년에, 간디는 나탈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썼다 "식민지에서는 인도인들이 조금 더 났습니다라는 일반적인 믿음이 지배적인 것 같다, 만약에 전혀, 야만인이나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In 1893, Gandhi wrote to the Natal parliament saying that a "general belief seems to prevail in the Colony that the Indians are a little better, if at all, than savages or the Natives of Africa". #
  • 간디는 힌두교의 계급제인 카스트 제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소는 인정을 해도 불가촉 천민은 인정하지 않는 신분차별적 발언들이 숱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암베드카르 박사와의 갈등 이후,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며 불가촉천민들에게 멸칭인 '찬달라'(부정타는 자들) 대신 하리잔(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부르자는 운동을 펼쳤으나, 간디를 의심했던 불가촉천민 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리고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감을 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이들을 달리트(억압받는 자)로 부르기로 하고, 불교 개종 운동을 펼쳤다. 이후 간디는 불가촉천민 측에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의 인도하에 불가촉천민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연히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 대우가 하리잔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타 종교로 개종을 시도하는 불가촉천민에게 집단 테러와 린치를 가한 것 또한 간디를 추종하는 힌두교 단체들이었다.
  • 간디는 사실 힌두교를 중시했다. 독립 당시 종교문제는 신생 인도의 가장 큰 현안이었는데, 간디는 인도가 갈라지는 것은 반대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와 힌두교 간의 평등이나 소수 종교 보호 제도에는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그 덕에 모하마드 진나 같은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간디가 충분히 인도 아대륙의 단결에 이바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악화시켰으며, 그의 암살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간디는 사실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 철폐 등 구시대의 악습 철폐에 무관심했고, 서민보다는 부유층과 상위계급에게 호의적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한 명의 인도 독립의 영웅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카스트 제도 철폐와 서민에 대한 정책에 큰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간디는 카스트 철폐 문제에 대해서 '사랑과 온정으로' 천민들을 대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 끝까지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카스트 제도 내에서 천대받는 피압박계급에 대해서 주체보다는 객체로 대한 것이다.
    게다가 간디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권 자체를 부정하는 제도를 시도했고, 이밖에도 임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제도에도 찬성했다. 자식이 하위 카스트와 결혼하려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은 하위 카스트가 아닌 이슬람 교도와 결혼하려 했을 때 반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평화와 화합을 바랐던 이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이와 관련해서는 인도의 좌파운동가 남부디리파드가 저술한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을 참고.
    한편으로 간디는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보수적 성향의 상급 카스트들에게도 까이는데, 애초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민들이 사랑과 온정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인도의 근대화 이전에 비해 많이 줄어든 21세기 인도에서조차 상급 카스트계 후손들이 카스트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더 많이 남아있었던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는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되 천민들을 사랑과 온정의 대상으로 여긴 간디의 성향도 (카스트 제도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은 것 치고는) 나름대로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이슬람 왕조들 및 인도 제국조차 인도 내에서 카스트 제도를 완전히 없애는 데 실패했을 정도로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단지 암베드카르가 훨씬 적극적으로 카스트 제도 철폐를 주장했을 뿐 간디 또한 천민들에게 최소한의 사람 취급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 평가의 여지는 남아있다.
    간디가 불가촉천민을 사랑과 온정으로 대한 사례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간디 본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사바르마티 아시람이라는 마을에 불가촉천민이 이주해오는 문제로 싸움이 나자, 스스로 불가촉천민들의 마을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불만을 잠재워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집에 세들어 살던 불가촉천민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한 부인을 크게 나무라고는 천민 전용인 요강을 신분으로 세입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숴버리라고 요구하기도 했을 만큼, 그들에 대한 포용의 의지는 컸다. 간디가 무슬림들을 포용하려다가 힌두교 광신자의 손에 살해당했고, 그의 신분도 고위급 평민 계층인 바이샤였다.
    당시 인도 기준으로는 가장 깨어있는 선진 영국식 교육을 받은 상류층 문명인이었음에도 인도의 독립과정에서 영국 식민지때보다 퇴보한 수꼴적인 정치행보를 보인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통일 인도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국의 사례를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처럼 통합하기에는 인도 내부의 분화된 언어집단,종교집단,인종집단,문화집단이 너무 많이 분절되어있고 그들의 이해가 너무 제각각이라,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어쩔수 없이 인도에서 가장 큰 통합의 구심점인 힌두교를 내세울수 밖에 없고 그것이 힌두교의 근간인 카스트 제도의 긍정등 수많은 구시대적 관습과 사회적 퇴보를 가져옴에도 그렇게 해야 이들을 인도인으로 간신히 묶을 수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단 1명이라도 더 인도인을 늘리기위해 이슬람도 포용하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립후 간디가 암살당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 아내였던 카스투르바이 "카스투르바" 모한다스 간디(Kasturbai "Kasturba" Mohandas Gandhi, 1869~1944)가 폐에 병이 났을 때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거절했으나, 아내가 죽고 난 후 자신의 학질에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장염에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해 일구이언적인 태도라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심각한 왜곡이며, 실제로는 영국인 의사라고 아내의 치료를 거절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간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영국인을 차별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으며 혼을 나눈 영국인 벗도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간디는 젊었을 때 한 영국 유학 시절, 세련되고 품위있는 '영국 신사'를 동경하여 바이올린 연주나 무도회 같은 영국 상류층의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문제는 그가 아내의 치료를 거절할까 고려한 이유는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아내가 낫지 못하고 괴로움만 늘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는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의사가 영국인이어서 그랬던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사실 의사가 영국인이라서라는 이유는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 간디가 아내의 치료를 거절했던 것에 대한 말이 되는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도 아니다.
  • 아들인 하릴랄 간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려고 했으나, 아버지 간디가 그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하릴랄의 결혼에 대해서도 평생 금욕을 강조한 내가 어떻게 네게 성을 즐기라고 할 수 있겠냐면서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완고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릴랄이 1911년에 가족과 절연했다는 말이 있다.
  • 또한 1990년대 이후 간디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짐에 따라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맹세 때문에 평생 금딸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대신 몽정으로 고생했다. 간디 스스로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토로하기도. 부인과 부부관계를 할 때야 괜찮았지만 중년 이후 부부관계도 끊었기 때문에 무려 66세에도 몽정을 했다. 중년 이후에는 거의 끊겼다가 딱 한 번 했다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디가 택한 방법은 여러 아가씨와 함께 잠을 자는 의식이었다. 밤에 오한에 시달리던 간디는 친한 집안 처녀나 색시, 심지어 조카며느리와 증손녀뻘 되는 친척에게도 나체로 함께 잠자리에 들어 체온으로 몸을 덥혀줄 것을 부탁했다. 간디가 소아성애자였다는 이야기가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서양의 회춘법인 슈나미티즘을 신봉했기에 이같은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인도의 전통 요법이라고도 한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로 잠자리에 들었다. 조카가 자기 아내 대신 자기가 잠자리를 덥혀 드리겠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금욕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서 벌컥 화를 냈다고도. 일간에서는 간디의 금욕기준이 삽입 여부라고 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또한 특이한 순결 시험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소년소녀를 함께 목욕시키면서 목욕 중 성적인 대화나 접촉을 하면 벌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것도 현대에서는 두고두고 까이고 있는 중.
    간디가 아내와 이혼한 이유가 남성 보디빌더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출처
  • 간디의 생활비는 부유한 상인귀족 세 사람이 댔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간디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무척 많은 비용이 든다."
    언뜻 보기에 간디의 생활에는 별 비용이 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일단 함께 생활하는 추종자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고, 간디는 고기만 먹지 않았을 뿐이지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으며, 대식가여서 식사를 자주 했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간디의 일상적인 음료는 레몬주스에 탄산소다를 넣어 신맛을 없애고 꿀을 탄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건강을 위해 최고급 유기농 채소만 먹는 경우에 비할 수 있다. 그러니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간혹 간디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사람들이 간디가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현대 민주주의는 1783년의 미국 독립 혁명과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한 것이지, 간디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게다가 간디가 외쳤던 비폭력이 어디에서나 항상 통하는 방법도 아니었고, 오히려 팔레스타인이나 남아공에서 핍박받던 자들이 외친 비폭력이 정부 당국의 강력한 탄압에 부딪쳐 실패한 일들도 있었다'비폭력 투쟁'을 접한 압제자들의 대응.
  • 위에 나온 독립운동 시작 계기도 영국이 인도가 참전을 하면 독립해준다는 말에 끌려서 참전을 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난 후 총리가 바뀌었으니 인도 독립을 무효화 하니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 영국 측에서는 자신들의 관대한 태도 때문에 간디가 이렇게 명성을 높이며 활동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인도가 다른 나라 식민지였다면 간디는 진작에 처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혀서 세상에서 잊혔으리라는 것. 당시 프랑스만 해도 인도차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대우하기로 유명했고, 소련은 식민지도 아닌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숙청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지금 러시아에 있는가?"라는 비판도 있었다.
     
     
     


    간디 아내 단백질 섭취 만류
    https://www.youtube.com/watch?v=eKnZYbN2zeU
     
     
     

     
애초에 정치인에 대한 애정 바램이 아니라 출발점을 개개인의 신념체계에 호소해서 시작했으므로 계속적인 지지와 성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라는 해석 같은데 그걸 인도 문화의 전통에서 찾아낸거라고 하시는걸로 저는 이해가 되네요.
@ExtrasolarP
브랏따 맟나요 !!! , 마하트마 간디가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됐는데 ~ ' 영화 미션 ' 원주민 들의 행진 이라던가 ,,, 몽골의 침략때 팔만대장경 왜 만들었는지 그런 것도 브랐따 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조금은 인도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강의 감사 합니다 ! '
@user-nb3se4ze7z
원래 그분야에대해 잘모르는 사람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총만들어본적 없는 글록선생님..역시 만들어본적없는 알루미늄 가공전문 아말라이트사.. 고정관념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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