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1946), 호사카 유지가 설명하는 일본인과 천황제의 역사; 일본 천황제를 없애려고 했던 인물은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 타이라노 마사카도나 오다 노부나가 등 극소수였다; 그 이유: (1) 야마토~가마쿠라 시대에는 지배가문의 혈통 (소가,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이 덴노가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2) 무로마치 시대까지 쇼군 통치의 정당성을 덴노에게서 찾았기 때문 (8세기에 집필된 일본서기와 고서기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3) 에도시대에는 덴노의 상징성마저 사라져서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덴노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고 덴노는 제사장 역할만 수행했다, (4) 에도시대 후기에 미토번 중심으로 국학의 발달이 일어나 존왕양이 사상이 퍼져나갔고, 결국 그것을 받아들인 사쓰마와 조슈번 중심으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났지만, 19세기 후반에 가서도 일반인들은 덴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천황'의 명칭 단일화는 메이지 유신의 산물로, 그 이전에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 덴노 역사상 4명 정도가 직계혈통은 아니었지만, 방계혈통이었기 때문에 1,500년 정도 단일왕조의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덴노가의 백제계 혈통 암시한 아키히토 일왕과 고사기와 일본사기에 등장하는 한국산의 비밀

 
미군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들[6] 중 열렬한 군국주의자들은 (다들 알다시피) 자기 신념의 원천을 천황에 두었지만, 이는 반전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부류들은 "폐하는 평화를 애호하시며, 항상 자유주의자셨고, 전쟁에 반대하셨지만 단지 군부에게 속으셨다."라거나 "폐하는 만주사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고 병사들의 열악한 실태를 모르신다."라며 군국주의 침략 전쟁과 황실 숭배가 무관함을 단언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를 배신한 장교들과 공직자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전쟁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돌린 독일군 포로들의 진술과는 전혀 달랐다.

천황이 없는 일본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국민 종교 생활의 중심이다. 천황은 초종교적 대상이다.
국민은 천황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패전하더라도 책임은 내각과 군 지휘관이 져야 하며,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
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10명이면 10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

국화와 칼, 일본군 포로들의 천황에 대한 견해

포로들은 거의 모두 천황을 비방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미국에 협력하여 대일본 선전 방송을 맡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7] 그러면서 무능한 간부들과 배신자, 도망자들에게는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포로가 아니라 본토의 일본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 제한에 대한 비판과 내각, 대본영, 상관에 대한 비판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8] 당시 일본인들이 계층 의식에 얽매여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결여돼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군대의 명예와 화족의 권위에 대한 선전·교육도 남부럽지 않게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7] 포로들의 수많은 진술서 중 천황에 비판적인 건은 단 3통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통은 "천황은 의지가 약할 뿐"이라며 사실상 변호했고, 1통은 "지금의 천황이 폐위되고 황태자가 즉위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만약 천황제 자체가 폐지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애매한 답변이었고, 나머지 1통만이 천황제의 폐지를 직접적으로 주장했다.
 
 
 


2.1. 어원[편집]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은 대왕(大王), 대군(大君) 등으로 표기되는 오키미(おおきみ)[15]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야마토 왕권의 오키미가 중국으로부터 '왜왕'이라 불리며 책봉을 받은 일도 있다. 이후 유랴쿠 덴노의 치세인 478년에는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을 하사받기도 했다.[16] 오키미는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라는 명칭으로 변천했는데 바로 이 스메라미코토의 의미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 천황(天皇)이다. 고대에는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지 '덴노'라고 읽지는 않았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화권의 황제인 천자(天子)보다 높이려는 의도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중화권에서의 천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옥황상제를 일컫는다. 니혼쇼키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수나라에 파견했을 때 당시의 서찰의 서두에 "동천황이 서황제께 보냅니다.(東天皇敬白西皇帝)"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는 원래 일본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황이 '천신의 후손'(天神の後孫)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원래부터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해당 구절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당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해가 뜬다 진다가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 중심의 지리관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강한 지지를 얻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7][18]

도교에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등 방위구분이 있었으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대신들로부터 모든 황의 가운데에 있는 태황(泰皇)이라는 명칭을 건의받았으나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다. 중국의 도교 신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본래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신의 계율사회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인 옥황상제를 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황과 일본에서의 천황은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천황'이라는 단어의 언급 문제는 중국 측과 일본 측의 자료가 확실하게 엇갈린다. 중국 측에서는 위진남북조 시절에 중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외교서찰이 시초라고 본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일본 측의 자료보다는 중국 측의 자료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혹은 당고종측천무후당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황제를 천황, 자신을 천후(天后)라고 높였던 시대가 있는데[19], 이 때 일본이 당나라와 접촉하여 천황 칭호를 수입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고 하는데, 북극성은 천상의 궁궐인 자미원의 정점에 자리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도 이와 빗대어 군주는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며 궁궐도 북쪽에서 남면하여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낸다. 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를 북극성에 비기는 호칭이 퍼졌다는 것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천황의 의례는 태양과 연계되는 동서축이 종교의례적으로 중요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미카도(帝, 御門)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메라미코토/스베루미코토'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발음대로 읽은 천황보다 더 '정통적인' 호칭인 셈이다. 천황이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황실이 권력 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면서 스메라미코토라는 의미가 잊혀져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흑선 사건 이후 일본의 군주를 부를 때 이슬람권의 술탄, 독일어권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를 부르듯이 일본의 미카도(Mikado of Japan)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그냥 Emperor of Japan이라고 불린다. 미카도 외에도 '슈조(主上)'[20], '오키미(大君)', '다이리(內裏)'[21], '덴치 사마(天子樣)'[22], '오카미(御上)'라고도 불렸다.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십선지주(十善之主)'/'십선지왕(十善之王)[23] 또는 금륜성왕(金輪聖王), 성주(聖主), 성황(聖皇)이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유신 후 천황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천황은 중국식 칭호를 수입했던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현재는 일부에서 천황을 격하하는 비칭이라 몰아가는 '일본(국)왕'이라는 명칭도 만만찮게 쓰였다. 오키미, 슈조, 미카도 등의 다른 명칭들을 제치고 천황이라는 명칭이 낙점된 이유는 바로 '천황'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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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인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이래로 후지와라가 외척으로 권력을 모두 독점하면서 귀족 섭관정치로 변모하며, 국풍이 발달하면서 한국이나 중국과의 교류도 감소한다. 이때부터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일본 특유의 이중적인 권력 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약 1000년 동안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천황은 실제 정치는 셋칸, 간파쿠, 쇼군 등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무사 정권은 천황 자체를 쫓아낸다거나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물론 일본 역사상에도 또라이가 없는 건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교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반도 땅[27]에서 거병해 본인을 신황이라 일컬으며 천황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나,[28]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29]의 군대에 토벌당해서 죽었다.[30]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일본 정부와 천황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고, 2018년(平成30) 7월 6일 오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좀 삐딱하게 말하면 '머리가 깬 사람'에 가까웠다. 일본의 국왕인 덴노는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의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민중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한(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라던가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사상이 유독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가 일본의 국왕, 덴노이다.[31] 이에 대해 혹자는 "일본의 경우는 집안 족보를 따지고 보면 왕실 후손이라서 덴노를 건드려 자기 정통성을 훼손할 필요가 없었다"[32]거나, "중국도 역성혁명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안 혈통을 윤색하고 왕후장상이라는 신분제를 부정하지 않았다"[33] 는 점을 이유로 전근대 신분제 부정의 토대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그 의의는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맹자의 천명설, 혁명론이나 진승의 구호가 물론 '왕후장상'으로 대표되는 '신분 제도'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러한 '신분'이 태생이나 어떤 이유로 해서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정의하려 드는 선민사상적인 인식이나 혹은 그러한 신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특권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동시에 그러한 '신분'간의 유동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34][35]

센고쿠 시대에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등장한 유력 다이묘들이 자신은 덴노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덴노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고[36], 진승이 비록 나중에 자신을 왕의 후손으로 윤색하기는 했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진승의 말은 전근대적 신분제가 내세운 신분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명시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국왕은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오직 덴노의 일족만이 될 수 있다"고 못박았던 일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37][38]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느니 "이때 민심이라는 것은 천인감응, 민귀군경 등의 수사적 표현을 통해 명분상으로는 군림하되, 실제적으로는 통치하지 못한다. 웃기게도 어찌 보면 덴노와 비슷한 신세다."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민본주의를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곡해, 왜곡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되었다고 치부해 버릴 '민심'이라는 것이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 치를 돈조차 없어 글씨를 팔고 성금을 받아 연명했던 덴노와 달리 동아시아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분명한 한 축으로 작용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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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천황이 처음부터 이렇게 일본에서 신성불가침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정봉환과 보신전쟁으로 에도 막부 축출과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 제국 지배층이 천황 신격화를 꾸준히 시키면서 이뤄진 것이지 그 이전까지 천황의 권위는 끽해야 교토 상류층이나 공가, 막부같은 지배층에게나 통하는 것이었으며, 국학이 성행하기 전까지 평생 지배층을 볼일이 없던 일반 일본인들은 천황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개창하면서 천황의 상징성과 권위를 부활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이지, 센코쿠 시대에는 쇼군의 오랜 집권으로 아예 상징성조차 없어지고 모든 권위와 상징성마저 쇼군에게 넘어가서 다이묘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신세였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천황만이 중화제국 황제에게 봉해질수 있었던 일본국왕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수여받게 되면서 쇼군의 권위가 천황을 뛰어넘었던 시절도 있었아며, 요시미츠 사후에는 천황가에서 신하인 쇼군에게 태상천황이라는 호칭까지 수여하려고 한 일까지 있었다. 일본 제국 수립 초기에도 일본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천황을 왜 숭배해야 하냐며 의문감을 가졌을 정도이다. 군부가 지배하던 시절엔 천황을 신처럼 숭배하라고 사회적으로 압박하는 분위기나 일본군내 천황 숭배 강요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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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흔히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정통성의 천황, 권력을 위임받은 실권자 쇼군이라는 도식으로 흔히 설명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부터는 이미 그 권력의 정통성도 원래부터 쇼군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천황이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같은 사람은 "중세 일본의 천황은 제사장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63]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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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의 조정이나 막부의 쇼군이라고 그러한 천인상관설을 몰랐거나 혹은 "니네들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한테 갈린다"라는 맹자의 주장을 '웃기고 있네' 정도로 치부한 것은 아니어서 국가 재난 사태에는 전근대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의 왕조 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으레 '덕정(德政)'이라 불리는 국가적 대책들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덴노의 경우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왕의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데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동시에 누구든 국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 누구든 그 국왕의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일본 신토의 최고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이 자신의 손자 니니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며 "지상은 니니기와 그 후손이 영원토록 다스릴 땅이다"라는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에는 니니기와 그 후손에 대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에 대한 '약속'만이 있을 뿐이지, 그 권한을 '리콜'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해도, 무모한 전쟁을 벌여 수천 수백의 목숨이 죽어나갈 망정 일본의 국왕인 덴노의 자리에는 오로지 덴노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덴노의 왕권에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권한을 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마저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42] 이런 점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이색적이고 파천황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43][44]

사실 덴노의 입장에서 천명사상이니 역성혁명론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는 비판이 좀 억울한 게, 덴노로서는 천명 사상이나 역성혁명론 같은 것으로 비판을 받을 정도로 뭔가 국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나라를 다스린 적이 별로 없었다. 뭐 정치를 해야 실정을 하고 천명이니 역성혁명이니 비판을 받을 것 아닌가. 일단 일본이라는 왕국의 유일한 '왕'이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뼈대 깊은 혈통적 정통성을 가진 존재였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른 나라의 국왕과 같은 모습으로 전제 군주로서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등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남북조 시대에는 미노의 슈고 다이묘였던 토키 요리토가 고곤 상황의 가마에 화살을 쏘고, 남조의 잔당 세력이 삼종신기 중 일부를 강탈했다가 현지 주민들에게 피살당하는 '조로쿠의 변'도 있었다.

조정의 권위가 가장 초라하던 무로마치 시대, 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치세에는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전란이 잦아 궁궐까지 불에 탔으며, 지방에서도 혼란이 커지고 영주들이 황실령을 침탈해 황실이 재정난에 빠졌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이 귀족들의 저택에서 기거했음에도 화려한 궁전이 아닌 허름한 집에서 지냈다는[45] 헛소문이 돌은 것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천황과 귀족들의 본거지인 교토가 전란으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황실의 권위는 계속 곤두박질쳤다. 104대 고카시와바라 덴노는 왕실 재정이 없어 아버지 고쓰치미카도 덴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그 유해를 44일이나 방치해야 했었고 당시 키나이의 지배자로 칸레이를 역임하던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형식적이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즉위식을 거부하여[46] 22년 동안이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다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비용을 내주어 겨우 즉위식을 치렀으며 그 후 4년 뒤, 63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 다음인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 또한 즉위식을 치를 돈이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고호조(後北条)와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성금을 받아 즉위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 오기마치 덴노도 모리 모토나리로부터 금을 헌상받을 때까지 즉위식을 올리지 못했다.

또 궁녀들이 매춘을 한다거나,[47] 동네 아이들이 천황 본인을 무시하며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다는 소문까지 발생했다.



다만 천황과 조정을 이루는 공경[64]들은 당대의 일본 상류사회를 이끄는 셀럽처럼 인식되었고, 아무리 정치적인 실권이 없다고 한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역대 쇼군들은 황녀와 혼인함으로서 황실 전체를 막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래서 에도 막부 때는 애들이 고나라 덴노에게 했듯이 돌을 던졌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 시기 중기 이후 오규 소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통치 이념이 지배층에게 퍼지자 천황이 다시 쇼군의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부활했다. 천황과 쇼군이 주고받는 친서를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천황이 슬슬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윗사람'으로 불러 주는 딱 그 정도 선이었지,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진짜' 주인인 덴노에게 돌려 줘야 한다느니 이런 소리를 하는 인간들은 가차없이 목을 날렸다. 또한 윗사람이라고 해서 뭔가 실권이 있는 게 아니니 재력도 그렇게 변변치 못해, 왕실 보물을 교토 시장에다 내다 팔아서 살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65] 일본 메이지 시대에서 패전 뒤까지 활약했던 수필가 사토 고세키(佐藤垢石)가 쓴 '도미 감시(にらみ鯛)'라는 글에 보면, 만엔 원년 무렵 한여름이라 왕궁에 어선(御膳) 즉 수라상에 올라가는 생선들이 모조리 썩어서 악취가 나고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고메이 천황이 연회를 열었을 때 왕궁 안에는 언제나 술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술에다 물을 타서 마셨고 결국 몇 잔을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거나, 연회에 연어 한 조각이 남은 것을 보고 "버리지 말고 챙겨 두어라. 짐이 두었다 저녁 반주에 먹겠다(これを棄ててはならぬ。朕は晩酌の佳肴とするつもりである)"고 하는, 이게 진짜 한 나라의 국왕이 맞긴 한가 싶은 심히 비참한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66]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 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천황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때에 로마 교황이 유럽을 포용하듯이 천황도 아시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천황제(普遍的天皇制)는 끝내 정계, 학계 등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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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와 일본사기
https://namu.wiki/w/%EC%B2%9C%ED%99%A9#s-7


“이 곳은 한국[韓國]과[2] 마주 보고……, 아침 해가 바로 비치고 저녁 햇볕이 쬐는 지극히 좋은 땅”
타카마가하라


일본신화의 니니가 내려온 산=타카치호초=한국이 보인다 하여, 그 옆에 산을 한국산이라 부른다
타카치호초과 한국산



쇼와 덴노가 공식상에서는 아니지만 황실의 풍습이 조선의 풍습과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109] 전해지고, 아키히토 천황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110]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일본 황실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아키히토 천황이 외교적 수사[111]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고, 일본 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이마저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운 것이, 한 국가의 왕실이 다른 국가의 혈통과 섞이는 것쯤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20세기 초 유럽만 봐도 그렇고. 현재는 군주가 먼 옛날 피 좀 섞였다고 다른 나라를 병합할 수 있는 시대가 이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전혀 의미가 없는 떡밥일뿐.

일단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국내외 외교 용어로써 사용하고 있다. # 한편 북한에서는 일본의 왕조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였던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

[109] 이도학의 <새로 쓰는 백제사>에 실려 있는 일화인데, 기마민족 정복왕조설로 유명한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쇼와 덴노를 만났을 때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 "천황가는 조선(즉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인식은 존재했던 듯하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간무 덴노 때까지 "일본 천황은 삼한과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이 있었는데 간무 덴노가 그 책들을 싹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일본 사람들은 식사할 때 젓가락을 주로 쓰고 숟가락을 안 쓰는데 천황가에서는 숟가락을 쓴다더라# 하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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