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고부 삼을나 삼성혈 탐라국 창조 신화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 제주 고씨가 탐라국 성주로 기록된 시기는 고려시대 때부터; '을나'라는 표현은 부여, 고구려, 여진족 계통의 언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일 가능성이 높은 제주고씨 유래의 두 가지 가능성 (1) 삼국시대 때 세 씨족 집단이 공동통치하다 신라시대 말기부터 우위를 점한 특정 씨족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고려 초부터 고구려와 자신들의 관계성을 고려하여, 고구려왕의 왕성인 '고'씨를 사용하여 탐라국 성주로 등극했다는 가설; (2) 삼국시대에 편찬된 다른 나라의 문헌상 기록(일본서기, 당회요)과 고려시대에 집필된 삼극사기와는 배치되지만 (이들 서적들에서는 탐라국 성주의 성씨가 고씨가 아닌 전혀 다른 성씨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조 문헌들(고려사,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했을 때는,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양, 고, 부 세 씨족집단의 성씨가 사용되었고, 이 중 통일신라 시기부터 고씨가 우위를 점해 성주가 되었다는 가설
2. 명칭[편집]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말기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하여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라고 전한다.ㅡ
그러나 백제가 아직 건재했던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며, 백제 멸망 이전에 편찬된 《수서》에도 탐모라국에 표류한 사신들이 백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외부에서 붙여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자생적인 국호로 보인다. 오히려 '탐진'이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 부르고, 《신당서》에는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라는 한문식 지명은 건널 제(濟)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어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23], 《양서》[24], 〈울진 봉평리 신라비〉[25]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26], 〈광개토대왕릉비〉[27], 《삼국사기》[28]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 구례산(久禮山)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후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29] 《용비어천가》에 피〮모로〮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30]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섬이 있다.
한편 과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우리말로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는 언어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조선 후기에 나온 가설이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섬을 뜻하는 당시 고대 한국어는 '세마'에 가깝게 발음된 반면[31] 한자 탐(耽)의 당대 발음은 '톰'이었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32]
그러나 백제가 아직 건재했던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며, 백제 멸망 이전에 편찬된 《수서》에도 탐모라국에 표류한 사신들이 백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외부에서 붙여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자생적인 국호로 보인다. 오히려 '탐진'이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 부르고, 《신당서》에는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라는 한문식 지명은 건널 제(濟)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어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23], 《양서》[24], 〈울진 봉평리 신라비〉[25]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26], 〈광개토대왕릉비〉[27], 《삼국사기》[28]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 구례산(久禮山)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후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29] 《용비어천가》에 피〮모로〮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30]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섬이 있다.
한편 과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우리말로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는 언어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조선 후기에 나온 가설이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섬을 뜻하는 당시 고대 한국어는 '세마'에 가깝게 발음된 반면[31] 한자 탐(耽)의 당대 발음은 '톰'이었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32]
2.2. 중세: 중국식 성씨의 수용[편집]
고려 때부터 본격적인 한국 성씨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씨는 그 이전부터 쓰였지만 주로 왕족, 귀족이나 중국계 조상을 둔 사람들이 가졌던 것을 호족이나 신흥 귀족도 가지기 사작했다는 것이다. 본관이 처음으로 도입되고 중국식의 한 글자로 된 단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본관 + 단성'의 형태가 주류가 됐다. 특히 1055년 고려 문종 9년에도 아직 성씨가 없는 귀족층이 많았는데 성씨 사용을 추진하기 위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나서부터 모든 귀족층들은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족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시대였고 그 권위가 과거 합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서 등 옛 서적에 존재하는 중국 성씨와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중국 인물들을 가져다 족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성씨는 가문의 권위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들 조상과 혈연이나 관련이 없는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족보에 존재하는 중국 인물들이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에서의 공격과 합병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은 거란족과 여진족과는 차별성을 두어야 했고 봉미제도까지 시행이 되니 중국에는 기록이 전혀 없는 가공의 인물을 이용하거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또한 고려 왕조에서 복성을 가진 자들은 거란식 복성 같다며 중국식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고종이 제갈씨가 복성이라며 제씨와 갈씨로 나눈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혈연이 없는 중국 성씨를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인 90%가 가짜 성·가짜 족보?...몰랐던 성씨 이야기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과의 긴장적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거란과 여진에 편입되지 않을 차별화된 성씨가 필요하게 되었고 한민족 토착 대가세족들은 중국식 성씨를 빌려와 족보를 제작하면서 출신 또한 거란과 여진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러한 기록들이 족보에선 보이나 실제 중국의 기록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출처] 또한 조선 중기부터 양민들이 중국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족보 위조로 양인층에게도 성씨가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위조된 족보를 미화하였다. 1764년 중인이었던 김경희가 거짓 중국 인물들을 족보로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원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자성씨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야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혈연이 없는 중국 성씨를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인 90%가 가짜 성·가짜 족보?...몰랐던 성씨 이야기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과의 긴장적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거란과 여진에 편입되지 않을 차별화된 성씨가 필요하게 되었고 한민족 토착 대가세족들은 중국식 성씨를 빌려와 족보를 제작하면서 출신 또한 거란과 여진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러한 기록들이 족보에선 보이나 실제 중국의 기록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출처] 또한 조선 중기부터 양민들이 중국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족보 위조로 양인층에게도 성씨가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위조된 족보를 미화하였다. 1764년 중인이었던 김경희가 거짓 중국 인물들을 족보로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원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자성씨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야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왕가 3성(박, 석, 김)과 6부의 성씨(이, 최, 정, 손, 배, 설) 그리고 한씨, 마씨, 전씨 등 기타 유래 성씨처럼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 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 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중국식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남북국 말기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중국식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인명을 보면 신라나 발해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고려, 후백제 귀족 및 유력 호족층이라도 아예 성씨가 없는 고유명이 훨씬 많았다. 즉 남북국시대까지 성씨는 왕족과 귀족들이나 썼던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백성들과 천민들은 성씨없이 이름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반인들까지 김이박최정 같은 신라계 귀족 출신 성씨를 대부분 사용하는 것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세 이후에 편입한 것이다.
비주류 성씨 가운데 어원이 본디 고유어였을 가능성이 있는 성씨는 앞서 설명한 박씨 말고도 제주 양(梁 ← 良)씨·제주 고(高)씨·제주 부(夫)씨, 그리고 궉(鴌)씨가 있다. 양씨·고씨·부씨는 각각 탐라 건국설화의 삼성혈 전설의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를 시조로 하는데, 乙那는 소리값이나 표기한자를 보아 탐라어를 뜻과 관계없는 한자로 적은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양·고·부도 현재로선 어원이 불확실한 탐라어의 접두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중국에서 부씨는 극히 희귀한 성씨이기 때문에 박씨와 함께 한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성씨이기도 하다. 한편 鴌의 독음은 '봉'이고 뜻은 '봉황'인데 궉이라는 독음은 한국에서만 쓰는데다가 그 뜻이 '꿩'이다. 다시 말해서 '꿩'이라는 고유어가 '궉'이라는 한자음으로 굴절된 것이다. 현재 궉씨는 명나라에서 귀화한 중국인을 일단 족보상으로는 시조로 하고 있지만, 이런 사정을 따져볼 때 이것은 아래에도 나올 실제 혈통과 전혀 관계 없이 조상을 중국인으로 지어낸 대표적 사례로 볼 수도 있겠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이들 글자가 어떤 일반적인 뜻에서 성으로 전이되었는지를 한문(중국어)를 통해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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