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고부 삼을나 삼성혈 탐라국 창조 신화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 제주 고씨가 탐라국 성주로 기록된 시기는 고려시대 때부터; '을나'라는 표현은 부여, 고구려, 여진족 계통의 언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일 가능성이 높은 제주고씨 유래의 두 가지 가능성 (1) 삼국시대 때 세 씨족 집단이 공동통치하다 신라시대 말기부터 우위를 점한 특정 씨족집단이 있었고, 이들이 고려 초부터 고구려와 자신들의 관계성을 고려하여, 고구려왕의 왕성인 '고'씨를 사용하여 탐라국 성주로 등극했다는 가설; (2) 삼국시대에 편찬된 다른 나라의 문헌상 기록(일본서기, 당회요)과 고려시대에 집필된 삼극사기와는 배치되지만 (이들 서적들에서는 탐라국 성주의 성씨가 고씨가 아닌 전혀 다른 성씨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조 문헌들(고려사,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했을 때는,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양, 고, 부 세 씨족집단의 성씨가 사용되었고, 이 중 통일신라 시기부터 고씨가 우위를 점해 성주가 되었다는 가설

 

2. 명칭[편집]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말기 신라 문무왕 때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원래 복속했던 백제의 멸망 이후 신라에 탐라국을 대표하여 입조할 때, 전라남도 강진군의 옛 지명인 '탐진'의 '탐'과 '라'를 합쳐서 붙여준 것이라고 전한다.ㅡ

그러나 백제가 아직 건재했던 476년 백제 문주왕 때 이미 탐라국에서 조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며, 백제 멸망 이전에 편찬된 《수서》에도 탐모라국에 표류한 사신들이 백제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따라서 위의 설화와 달리 '탐라'라는 국호는 외부에서 붙여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쓰이고 있었던 자생적인 국호로 보인다. 오히려 '탐진'이 '탐라로 건너가는 나루'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 부르고, 《신당서》에는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라는 한문식 지명은 건널 제(濟)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지명인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행정구역인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받으며 제주어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탐라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23], 《양서[24], 〈울진 봉평리 신라비[25]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26], 〈광개토대왕릉비[27], 《삼국사기[28]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구례산(久禮山)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후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29] 용비어천가》에 피〮모로〮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30]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섬이 있다.

한편 과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우리말로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는 언어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조선 후기에 나온 가설이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섬을 뜻하는 당시 고대 한국어는 '세마'에 가깝게 발음된 반면[31] 한자 탐(耽)의 당대 발음은 '톰'이었으므로 큰 차이가 있다.[32]
 
 

2.2. 중세: 중국식 성씨의 수용[편집]

고려 때부터 본격적인 한국 성씨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씨는 그 이전부터 쓰였지만 주로 왕족, 귀족이나 중국계 조상을 둔 사람들이 가졌던 것을 호족이나 신흥 귀족도 가지기 사작했다는 것이다. 본관이 처음으로 도입되고 중국식의 한 글자로 된 단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본관 + 단성'의 형태가 주류가 됐다. 특히 1055년 고려 문종 9년에도 아직 성씨가 없는 귀족층이 많았는데 성씨 사용을 추진하기 위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나서부터 모든 귀족층들은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족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시대였고 그 권위가 과거 합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서 등 옛 서적에 존재하는 중국 성씨와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중국 인물들을 가져다 족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성씨는 가문의 권위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들 조상과 혈연이나 관련이 없는 중국 성씨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족보에 존재하는 중국 인물들이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에서의 공격과 합병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은 거란족과 여진족과는 차별성을 두어야 했고 봉미제도까지 시행이 되니 중국에는 기록이 전혀 없는 가공의 인물을 이용하거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또한 고려 왕조에서 복성을 가진 자들은 거란식 복성 같다며 중국식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고종이 제갈씨가 복성이라며 제씨와 갈씨로 나눈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혈연이 없는 중국 성씨를 조상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인 90%가 가짜 성·가짜 족보?...몰랐던 성씨 이야기 특히 고려시대 때는 거란과의 긴장적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거란과 여진에 편입되지 않을 차별화된 성씨가 필요하게 되었고 한민족 토착 대가세족들은 중국식 성씨를 빌려와 족보를 제작하면서 출신 또한 거란과 여진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러한 기록들이 족보에선 보이나 실제 중국의 기록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출처] 또한 조선 중기부터 양민들이 중국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족보 위조로 양인층에게도 성씨가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위조된 족보를 미화하였다. 1764년 중인이었던 김경희가 거짓 중국 인물들을 족보로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國)·(邑)·(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원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자성씨화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야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1.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왕가 3성(박, 석, 김)과 6부의 성씨(이, 최, 정, 손, 배, 설) 그리고 한씨, 마씨, 전씨 등 기타 유래 성씨처럼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2.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 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 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중국식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남북국 말기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중국식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

그러나 후삼국시대의 인명을 보면 신라나 발해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고려, 후백제 귀족 및 유력 호족층이라도 아예 성씨가 없는 고유명이 훨씬 많았다. 즉 남북국시대까지 성씨는 왕족과 귀족들이나 썼던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백성들과 천민들은 성씨없이 이름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반인들까지 김이박최정 같은 신라계 귀족 출신 성씨를 대부분 사용하는 것은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세 이후에 편입한 것이다.
 
비주류 성씨 가운데 어원이 본디 고유어였을 가능성이 있는 성씨는 앞서 설명한 박씨 말고도 제주 양(梁 ← 良)씨·제주 고(高)씨·제주 부(夫)씨, 그리고 궉(鴌)씨가 있다. 양씨·고씨·부씨는 각각 탐라 건국설화의 삼성혈 전설의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를 시조로 하는데, 乙那는 소리값이나 표기한자를 보아 탐라어를 뜻과 관계없는 한자로 적은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양·고·부도 현재로선 어원이 불확실한 탐라어의 접두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중국에서 부씨는 극히 희귀한 성씨이기 때문에 박씨와 함께 한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성씨이기도 하다. 한편 鴌의 독음은 '봉'이고 뜻은 '봉황'인데 궉이라는 독음은 한국에서만 쓰는데다가 그 뜻이 '꿩'이다. 다시 말해서 '꿩'이라는 고유어가 '궉'이라는 한자음으로 굴절된 것이다. 현재 궉씨는 명나라에서 귀화한 중국인을 일단 족보상으로는 시조로 하고 있지만, 이런 사정을 따져볼 때 이것은 아래에도 나올 실제 혈통과 전혀 관계 없이 조상을 중국인으로 지어낸 대표적 사례로 볼 수도 있겠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이들 글자가 어떤 일반적인 뜻에서 성으로 전이되었는지를 한문(중국어)를 통해 알아야 한다.
 
 

탐라국/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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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탐라국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한 문서.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2. 삼국시대[편집]

  • 476년 4월 문주왕 시기 탐라(躭羅)가 백제에 방물을 바쳤다. 탐라국 사신은 백제로부터 은솔에 임명됐다.[A]
  • 498년 8월 탐라에서 백제에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 동성왕이 직접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죄를 빌었다.[A]
  • 508년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와 통교했다.[C]
  • 589년 수나라의 전투선이 표류해 탐모라국(躭牟羅國)에 닿았다. 전투선은 탐라에서 백제를 거쳐 수나라로 돌아갔다.[4]

3. 삼국통일전쟁[편집]

  • 660년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 항복했다.[A]
  • 661년
    • 5월 23일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C]
    • 8월 탐라국의 조공 사절이 당나라에 이르렀는데[7], 탐라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8]가 직접 입조해 방물을 바쳤다.[9]
  • 662년
    • 2월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해 탐라국은 신라의 속국이 됐다.[A]
    • 고을나왕의 15대손인 고후(高厚), 고청(高靑) 등 삼형제가 탐진을 거쳐 신라에 입조했다. 문무왕은 고후를 성주, 고청을 왕자, 그리고 막내를 도내라고 불렀다.[11]
  • 663년 8월 13일 주류성 전투에서 패한 백제인들과 인들이 당나라에 항복할 때 탐라국 사신들도 포로로 잡혔다.[D]
  • 665년 8월 탐라 사신이 신라, 백제, 왜의 사신과 함께 유인궤를 따라 태산의 봉선 의식에 참여했다.[A][D] 왜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C]
  • 666년 1월 11일 왕자 고여(姑如)가 왜국에 공물을 바쳤다.[C]
  • 667년
    • 7월 11일 탐라에서 좌평 연마(椽磨) 등을 보내 왜국에 공물을 바쳤다.[C]
    • 11월 11일 탐라 사신이 비단 등을 받았다.[C]
  • 669년
    • 3월 11일 왕자 구마기(久麻伎)가 왜국에 공물을 바쳤다.
    • 3월 18일 탐라 사신이 오곡의 종자를 받고 귀국했다.[C]
  • 674년
    • 윤6월 8일 왕자 구마예(久麻藝), 도라(都羅), 우마(宇麻)가 왜국에 조공했다.[C]
    • 8월 25일 탐라국왕과 구마예 등이 대을상[21]의 작위를 받고 츠쿠시(筑紫, 구마모토현)를 통해 귀국했다.[C]
  • 675년 9월 29일 신라가 매소성 전투에서 당에 승리했다.
  • 676년
    • 8월 1일 왜국에 공물을 바치러 간 왕자 구마기가 츠쿠시에 도착했다.[C]
    • 9월 27일 탐라왕 고여(姑如)가 나니와(難波, 오사카시)에 도착했다.[C]
    •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당군을 격퇴했다.
  • 677년
    • 2월 24일 탐라 사신이 왜국에서 배 한척을 받았다.[C]
    • 7월 8일 탐라 사신이 돌아갔다.[C]

4.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편집]

  • 678년 8월 28일 왕자 도라가 일본에 조공했다.[C]
  • 679년
    • 1월 22일 탐라인이 일본의 수도로 향했다.[C]
    •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했다.[A]
  • 680년 9월 23일 탐라에 왔던 일본 사신이 돌아가 일본 조정에 인사했다.[C]
  • 685년 10월 3일 일본에서 사신을 보냈다.[C]
  • 686년 8월 20일 일본 사신들이 탐라에서 귀국해 본국에 도착했다.[C]
  • 688년
    • 8월 25일 탐라왕이 좌평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C]
    • 9월 23일 츠쿠시관(筑紫館)의 연회에서 물품을 받는다.[C]
  • 778년 11월 10일 탐라도(耽羅嶋) 사람들이 일본 견당사를 노략질하고 억류했다. 녹사 등 40여명이 일본으로 도망쳤다.[E]
  • 779년 2월 일본에서 태재부(太宰府) 관원을 신라에 보내 탐라도에 억류된 견당판관(遣唐判官) 등을 데려가려 했다.[E]
  • 801년 10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A]
  • 918년 6월 15일 왕건 고려를 건국했다.
  • 925년 11월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935년 12월 12일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다.[B]

5. 고려시대[편집]

탐라국이 국가로서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시점을 언제로 보는가 하는 견해는 938년설부터 1104년설까지 다양하다.
  • 938년 12월 탐라국 태자 말로가 고려에 입조하고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았다.[B]
  • 1011년 9월 15일 탐라에서 고려에 주(州)·군(郡)의 예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주기를 요청했다.[B]
  • 1012년 8월 7일 탐라인이 고려에 큰 배 두척을 바쳤다.[B]
  • 1019년 9월 15일 고려의 중양절(重陽節) 연회에 탐라 사람들이 송나라 사람, 흑수인등과 함께 초대받았다.[B]
  • 1021년 7월 3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2년 2월 9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4년 7월 27일 고려에서 추장 주물(周物)과 그 아들 고몰(高沒)을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했다.[B]
  • 1027년 6월 15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29년 6월 26일 세자 고오노(孤烏弩)가 고려 조정에 입조하고 유격장군의 관직과 관복 한벌을 받았다.[B]
  • 1030년 9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34년
    • 11월 4일 송나라 상인, 여진의 동번, 서번과 더불어 탐라국에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월 14일 고려에서 베푼 팔관회에 (탐라국의 사신이) 참석했다.[B]
  • 1036년 11월 15일 고려에서 팔관회를 열자 방물을 바쳤다.[B]
  • 1043년 12월 27일 탁라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加利)가 고려에 왕자를 새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했다.[B]
  • 1049년 11월 13일 진위교위 부을잉(夫乙仍) 등 77명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52년 3월 27일 고려의 삼사에서 탐라국이 매년 바쳐야 하는 귤의 양을 정해 제도화했다.[B]
  • 1053년 2월 7일 왕자 수운나가 아들을 고려에 보내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았다.[B]
  • 1054년 5월 16일 사신 13명을 고려에 보내 태자의 책봉을 축하했고 사신들은 관직을 받았다.[B]
  • 1055년 2월 20일 한식을 맞아 고려에서 외국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수령 고한(高漢) 등 158인이 조종관(朝宗館)에서 음식을 대접받았다.[B]
  • 1056년 2월 27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57년 가을 고려에서 탐라의 목재를 베어 바다 건너에 을 새로 지었다.[B]
  • 1062년
    • 2월 27일 고협(高叶)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월 6일 성주 고일(高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63년 3월 9일 탐라의 새 성주 두량(豆良)이 고려에 입조해 명위장군의 관직을 받았다.[B]
  • 1068년 3월 성주 유격장군 가야잉(加也仍)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77년 12월 1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86년 2월 7일 선종 사숙태후에게 책문을 올리고 건덕전에서 베푼 잔치에 유격장군 가어내(加於乃)가 가서 축하하고 방물을 바쳤다.[B]
  • 1090년 1월경 성주 유격장군 가양잉(加良仍)이 죽고 배융부위 고복령이 뒤를 이었다. 고려에서는 전례에 따라 부의품을 보냈다.[B]
  • 1092년 2월 26일 성주 의인(懿仁)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고려에서 의인을 정원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관복과 의대를 하사했다.[B]
  • 1094년 6월 19일 탁라에서 고적(高的)등 194인이 헌종의 즉위를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B]
  • 1095년 7월 20일 고물(高勿) 등 80인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096년 9월 12일 탁라 성주가 고려에 사람을 보내 숙종의 즉위를 하례했다.[B]
  • 1100년 11월 16일 송상, 여진과 함께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1년
    • 10월 8일 고려에서 탁라의 새 성주 배융부위 구대(具代)를 유격장군에 임명했다.[B]
    • 11월 14일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B]
  • 1104년 고려가 탁라(乇羅)를 탐라군(耽羅郡)으로 고쳤다.[B] 제주도에 처음으로 한반도 종주국의 군현이 설치됐다.

5.1. 탐라현[편집]

  • 1153년 11월 15일 탐라현의 도상 인용부위 중련(中連), 진직(珍直) 등 12인이 방물을 바쳤다.[B]
  • 1168년 11월 20일 양수(良守)가 반란을 일으켰다.[B]
  • 1186년 7월 9일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거짓 정보가 고려 조정에 퍼졌고, 기존 현령을 파면하는 조서와 함께 탐라안무사와 새 수령이 보내졌다. 반란은 없었지만 명령을 취소할 수 없어 결국 기존 현령은 교체됐다.[B]
  • 1202년
    • 10월 번석(煩石)과 번수(煩守)가 반란을 일으켰다.[B]
    • 12월 5일 탐라안무사가 진압하고 수괴를 처형했다.[B]
  • 1266년
    • 11월 28일 성주가 고려 국왕 원종을 알현했다.[B]
    • 12월 6일 성주는 정연 현석(玄錫)과 함께 원나라에 향했다.[B]
  • 1267년
    • 1월 6일 백제의 신하 양호가 원나라에 입조했고, 수놓은 비단(錦繡)을 차등 있게 받아 돌아왔다.[F]
    • 문행노(文幸奴)가 반란을 일으켜 부사 최탁(崔托)과 성주 양호가 진압했다.[84]
  • 1271년 5월 15일 김통정 삼별초 잔당을 이끌고 탐라로 도망쳐 들어왔다.[B]
  • 1272년 원나라 중서성과 추밀원에서 일본보다 탐라를 먼저 정벌할 것을 제안했다. 그 근거는 탐라국왕에 대한 의리[86]였다.[F]
  • 1273년 4월 28일 홍차구가 김통정의 사위 김영(金永)등 7명을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과 함께 보내왔으나, 김통정과 성주는 김영을 제외한 모든 사신을 죽였다. 흔도는 (항파두리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모두를 죽였다.[88]

5.2. 탐라총관부[편집]

  • 1273년 6월 원나라가 적당들을 토벌하고 몽골인 실리백을 탐라국초토사로 임명했다. 탐라국은 매년 모시포 100필을 원나라에 진상했다.[F]
  • 1275년 6월 29일 손탄(遜攤)이 탐라국 다루가치에 임명됐다.[F]
  • 1276년
    • 4월 9일 탐라 성주가 고려 조정에 입조했다. 성주의 서열이 4품관 아래로 정해졌다.[B]
    • 8월 25일 실리백의 아들 탑랄적이 탐라국 다루가치에 임명됐다.[F]
  • 1281년 5월 18일 원나라가 이 해애 바쳐야 하는 백저포(白紵布)를 면제해줬다.[F]
  • 1284년 1월 21일 원나라에서 탐라국군민안무사를 세웠다.[F]
  • 1287년 11월 7일 원나라에서 온 타자르(塔刺兒)가 탐라 다루가치로 임명됐다.[B]
  • 1293년 9월 13일 탐라 다루가치의 죄상을 밝혀낸 우승 아살(阿撒)이 탐라 다루가치로 임명됐다.[B]
  • 1294년 5월 5일 탐라인 쿠케다이(曲怯大), 뭉구다이(蒙古大), 타스바투(塔思拔都) 등이 원나라에 가서 말 400필을 바쳤다. 고려 충렬왕이 탐라를 고려에 돌려줄 것을 요청했고, 원나라 성종이 허락했다.[B]
  • 1294년 11월 4일 탐라 왕자 문창유(文昌裕)와 성주 고인단(高仁旦)이 충렬왕으로부터 붉은 띠와 상아 홀, 모자, 가리개, 신발을 받았다. 탐라가 고려에 귀속됐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원나라에 대한 조공은 중단되지 않았다.[B]

5.3. 제주목/만호부[편집]

  • 1295년 윤4월 9일 고려에서 탐라라는 명칭을 제주(濟州)로 고치고 최서(崔瑞)를 제주목사로 임명했다.[B]
  • 1298년 5월 24일 탐라국에서 원나라에 방물을 바쳤다.[F]
  • 1301년 5월 12일 고려가 원나라에 탐라총관부 폐지와 탐라만호부 설치를 요청했다. 원나라 황제가 정동행성 산하 탐라만호부의 설치를 승인했다.[B]
  • 1318년
    • 2월 제주 백성 사용(使用)과 김성(金成)이 반란을 일으키고 성주와 왕자를 쫓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목이 잘렸고, 반군 무리는 고려에서 온 안무사 송영(宋英)에게 항복했다. 송영이 제주목사로 임명됐다.[B]
    • 4월 9일 원나라 인종이 정동행성에 칙서를 내려 도적질을 하는 탐라포렵호(耽羅捕獵戶) 성금(成金)을 잡게 했다.[F]
    • 4월 18일 탐라 반란의 원인 제공자인 대호군 장공윤(張公允)과 제주부사 장윤화(張允和)가 고려 순군부에 수감됐다.[B]
    • 6월 제주의 반적들이 모두 평정됐다.[B]
  • 1323년
    • 1월 12일 제주만호 임숙이 임지를 멋대로 이탈해 (정동)행성에 수감됐다.[B]
    • 1월 17일 제주만호 임숙이 파직되고 박순인(朴純仁)이 대신 임명됐다.[B]
  • 1333년 12월 13일 탑랄적의 아들 노열니타(奴列你他)가 아버지를 대신해 탐라국군민안무사사 다루가치로 임명됐다.[F]
  • 1336년 초적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을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진압했다.[B]
  • 1357년 7월 29일 제주 성주가 고려에 말을 바쳤다. 고려 공민왕이 성주에게 붉은 가죽 허리띠와 쌀 30석을 하사했다.[B]
  • 1362년
    • 8월 24일 목호 고독불화(古禿不花)와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성주 고복수(高福壽)가 고려에 반란을 일으켰다.[B]
    • 10월 22일 제주에서 원나라에 예속될 것을 청했다. 원나라에서 세운 탐라만호 문아단부카가 제주만호 박도손을 살해했다.[B]
  • 1363년 6월 11일 탐라만호 문아단부카가 동생 문인부(文仁富)를 고려에 보내 양과 말을 바쳤다.[B]
  • 1367년 4월 고려에서 전교령 임박을 제주선무사로 임명해 보냈다. 제주만호와 성주, 왕자를 비롯한 군민 모두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임박은 다른 지방관과 달리 백성에게서 털끝만큼도 취한 것이 없었기에 도민들이 기뻐했다.[B]
  • 1369년 9월 제주가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에서 박윤청(朴允靑)을 제주목사로 임명했다.[B]
  • 1372년
    • 4월 2일 탐라 목호들이 제주목사 겸 만호 이용장(李用藏), 권만호 안방언(安邦彦) 등을 모두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B]
    • 7월 25일 고려 공민왕은 탐라국이 조공[117]을 바치지 않고, 탐라국에 몽골인이 많이 사는데 이들을 옮겨야 하며, 난수산(蘭秀山)에서 도망친 도적들이 무리를 이뤘다는 이유를 들어 탐라국을 토벌해줄 것을 명나라에 요청했다.[G]
  • 1374년 7월 12일 카치(哈赤, 목호)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등이 명나라에 말을 조공하기를 거부했다.[B]
  • 1375년
    • 4월 탐라에서 고려에 금 허리띠(金帶) 2개와 은그릇(銀器)을 바쳤다.[B]
    • 11월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아를 불태우고 안무사, 목사, 마축사(馬畜使)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제주에서 문신보(文臣輔), 성주 고실개, 진무 임언(林彦), 천호 고덕우(高德羽) 등이 병사를 일으켜 모두 죽였다.[B]
  • 1376년 5월 제주만호 김중광(金仲光)이 역적 카치 강바얀(姜伯顔) 등 13명을 죽이고 처자를 광주와 나주에 유배보냈다.[B]
  • 1384년 8월 제주만호 김중광이 고려에 말 40필을 바쳤다.[B]
  • 1386년 7월 고려에서 전의부정 이행, 대호군 진여의를 파견해 성주 고신걸과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데려갔다.[B][125]
  • 1387년 탐라국에서 명나라에 말을 조공했다. 명나라에서는 앞서 말을 조공한 고려의 경우와 같은 값을 줬다.[G]

6. 조선시대[편집]

  • 1394년
    • 3월 27일 조선에서 제주에 교수관(敎授官)을 설치해 토관 자제에게 유학을 교육하도록 했다. 그 중에서 육지에서 과거 시험을 보고 벼슬살이하는 이들이 천호와 백호가 될 수 있도록 했다.[H]
    • 4월 17일 황군서(黃君瑞)가 도안무사(都安撫使)에 임명돼 와서 제주민을 선위(宣慰)했다.[H]
    • 7월 7일 고봉례가 조선에 말 100필을 바치고 쌀 100섬을 받았다.[H]
  • 1395년
    • 7월 1일 도안무사 황군서의 건의에 따라, 조선이 제주에서 매년 건마육(乾馬肉)을 바치는 풍속[130]을 금지했다.
    • 7월 13일 왕자 문충보(文忠甫)가 좋은 말 7필을 바쳤다.[H]
  • 1397년 7월 25일 전 제주목사 이침(李忱)이 토관의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아서 직첩이 회수됐다.[H]
  • 1398년
    • 3월 17일 조선에서 제주에 말 100필과 소 100두(頭)를 매년 바치도록(歲貢) 명했다.[H]
  • 1401년 5월 2일 건마육을 진상하지 말라는 어명이 다시 내려졌다.[I]
  • 1402년 성주 고봉례와 왕자 문충세 등이 성주 왕자의 호를 고치기를 청했다.[135]
  • 1403년 윤11월 19일 조선 사간원에서 제시한 행정구역 명칭 변경안에 제주를 '탐라대도호부'로 삼는 내용이 포함됐으나 태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I]
  • 1404년 4월 21일 제주 동·서도 천호소의 명칭이 동·서도 정해진(靜海鎭)으로 바뀌고 도천호(都千戶)·상천호(上千戶)·부천호(副千戶)는 각각 도사수(都司守)·상사수(上司守)·부사수(副司守)로 바뀌었다. 그리고 도주관(都州官)을 세워 성주를 도주관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도주관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삼았다.[I][138]
  • 1408년 9월 12일 처음으로 제주에 조선의 세제(稅制)가 적용됐다. 제주에서는 공부(貢賦)로 각 호(戶)에서 차등으로 말을 바치게 됐다.[I]
  • 1416년 5월 6일 제주인이 사적으로 말을 바치는 것이 금지됐다.[I]
[A] 1.1 1.2 1.3 1.4 1.5 1.6 1.7 삼국사기』.[C] 3.1 3.2 3.3 3.4 3.5 3.6 3.7 3.8 3.9 3.10 3.11 3.12 3.13 3.14 3.15 3.16 3.17 3.18 3.19 3.20 일본서기』.[4] 북사』. 『수서』에서는 탐모라(𨈭牟羅)라고 한다.[7] 『당회요』.[8] '유리'가 성이고, '도라'가 이름이다. (『당회요』)[9] 『책부원구』.[11] 이원진(李元鎭), 『탐라지』.[D] 12.1 12.2 구당서』 유인궤전.[21] 본 사료에서는 그 나라 좌평에 해당한다(當其國之佐平位)고 서술했는데, 사실 대을상은 19관등 중 15위로 낮은 편이다.[E] 35.1 35.2 속일본기』.[B] 38.1 38.2 38.3 38.4 38.5 38.6 38.7 38.8 38.9 38.10 38.11 38.12 38.13 38.14 38.15 38.16 38.17 38.18 38.19 38.20 38.21 38.22 38.23 38.24 38.25 38.26 38.27 38.28 38.29 38.30 38.31 38.32 38.33 38.34 38.35 38.36 38.37 38.38 38.39 38.40 38.41 38.42 38.43 38.44 38.45 38.46 38.47 38.48 38.49 38.50 38.51 38.52 38.53 38.54 38.55 38.56 38.57 38.58 38.59 38.60 38.61 38.62 38.63 38.64 38.65 38.66 38.67 38.68 38.69 38.70 38.71 38.72 고려사』.[F] 83.1 83.2 83.3 83.4 83.5 83.6 83.7 83.8 83.9 83.10 원사』.[84] 신증동국여지승람』.[86] 탐라국왕이 원나라에 입조해 황제를 뵌 적이 있는데, 반적이 군주를 내쫓고 성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탐라국왕이란 앞서 원나라에 입조했던 탐라 성주 양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88] 『원고려기사』.[117] 고려에서 명나라로 보내야 하는 말.[G] 118.1 118.2 『명실록』.[125] 고려사 이행 열전에서는 "탐라가 (고려에) 귀순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耽羅歸順始此) 라고 밝히고 있다.[H] 127.1 127.2 127.3 127.4 127.5 127.6 태조실록』.[130] 매년 섣달에 암말을 잡아 포를 떠서 본국에 조공하는 풍습이 있었다.[I] 134.1 134.2 134.3 134.4 134.5 태종실록[135] 세종실록』 「지리지」.[138] 도지관 외에도 여러 토관이 있었으나 세종 때 도지관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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