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인도교 폭파는 제임스 하우스만의 책임인가?

 

4.4. 폭파 명령의 배후[편집]

폭파명령의 주체자도 마찬가지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다는게 정설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 설이 계속 그동안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위 사건경과 서술처럼 한강교 폭파 문제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아니라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이나 혹은 장경근 국방차관의 명령이라는 설이 더 강하게 힘을 얻고 있다. 신성모와 장경근이 동시에, 혹은 둘 중 하나가 독단으로 저질렀거나 두 사람의 상호 묵인 하에 명령을 내렸다는 의혹으로 작용하는 셈이다.출처 1 ,출처2, 출처3 관련 링크이다. 당시 이 문제 관련해서 최창식 대령의 군사재판 때는 채 총장의 명령을 받아서라고 했다지만 군사재판이나 당시 최 대령은 지프에 타고 있었던 채 총장의 동승자들에 대한 증언을 구하지 못했다. 더욱이 채병덕 총장은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다. 게다가 노골적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 재판을 빨리 종결하라는 압박을 해왔던 전례를 감안해보면 더욱 의심을 가지 않을수 없는 대목인 점이다. 이것은 훗날 국민방위군 사건 때 노골적인 개입을 했던 전례를 봐도 알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인도교 폭파의 직접적 책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승만은 당시 군 통수권자이며 군 작전의 총 책임자로서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봐야한다는 논리도 있지만 이러한 논리라면 모든 군사행동의 공과가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이야기 밖에 안된다. 다만 인도교 폭파로 인한 부정적 내용은 물론 실제하지 않은 민간인 피해까지 더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실책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고 실제로 이승만 검색시 부정적 평가항목에도 본 내용이 링크되어 있다.

미 군사고문단의 기록에서는 오히려 육군본부의 김백일 대령이 당시 장경근 국방차관의 명령으로 폭파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최소한 당시 김백일 대령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국방차관은 자신의 월권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당시 차관이 그런 명령권한이 없다는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즉 한강교 폭파 명령 자체는 총참모장인 채병덕이 내려 놓은 상황이었지만 미 군사고문단이나 지휘부의 합의로 폭파명령은 우선 준비상태였다고 볼수 있다고 할수 있으나 명령의 주체자는 국방부였다는 이야기가 계속 정황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의 통설이었던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하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는 것이 나오고 있기에 명령을 내린 명령권자는 현재 논란 중인 사항이다. 위의 군사고문단 연루설과 관련해 당시 전황 가운데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의 직권으로 발동된 조치라는 증언도 존재한다.
누가 한강교 폭파의 명령을 내렸는가?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폭파 책임을 물어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몰아 사형까지 시켰지만, 최창식 부인 옥정애의 재심청구 요청으로 1964년 10월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강교 폭파의 책임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그 죄가 돌아갔다.
최창식에서 채병덕으로 죄인이 바뀌었지만, 두 경우 모두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은 공통된다.
그럼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퇴역을 맞아 한국을 떠나 있었고, 라이트(Wright)부단장은 일본에 있었다. 또한 책임을 맡아야 할 선임 통신장교인 챨스 스튜리스는 자신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13]

5·16 후 재심판결에서는 채병덕을 한강교 폭파의 명령권자로 밝혔는데, 채병덕의 고문관은 하우스만이었다. 또한 하우스만은 자신은 한강교 폭파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김백일이 폭파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지만,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한강교는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이었기 때문일까?

당시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측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짚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기 직전이었으며,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채병덕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만약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이 채병덕이라면,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이었던 것이다.

김득중, 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1 #2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의 하우스만에 관한 논문에서 크로포드 소령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Maj. Crawford tried to clear poor Col. Choe, but his superior told him to keep his mouth shut and not to meddle in Korean affairs. His superior was none other than Captain James Hausman, an officer junior in rank but with connections with the right people. Maj. Crawford stated that it was "an American officer" who told the ROKA chief of staff, Gen. Chae Byong Duk to blow up the bridge. Maj. Crawford never mentioned the officer by name but he said that it was a captain who was advisor to the ROK Army Chief of Staff - i.e., Captain James Hausman - the Father of the South Korean army."

김득중의 논문에서는 출처 링크를 제시하였으나, 현재 해당 링크 게시물은 사라져 있는데, 한국과 북한에 대한 뉴스가 있는 사이트다. 웨이백 머신 아카이브로# 확인 가능하다.

폭파 시점에 하우스만은 차량으로 이미 수원에서 이동 중이라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 폭파를 지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는데 정작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쪽에서는 하우스만이 27일 지프차로 한강 인도교를 건널 당시 교량폭파가 준비 중이었고 하우스만이 차를 세운 뒤 한국군에게 절대 폭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수원에 가려고 28일 새벽 한강 다리를 지날 때 폭파를 해서 자신도 죽을 뻔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진짜로 폭파 당시에 하우스만이 차량으로 수원 지역에서 이동하고 있었다는 미군 자료가 있다면 그 미군 자료와 하우스만의 증언이 모순되는 상황이므로 어딘가에 조작이 가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게 있다는 이야기이며 오히려 하우스만을 더욱 의심스럽게 만들 뿐이다.
한강 다리를 되돌아오면서 다리 양옆으로 자갈 무더기만큼 크게 쌓아놓은 화약 더미를 보고 세드베리 소령으로 하여금 차를 세우게 한 뒤 한국군 장교에게 이것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이제 미군이 들어오는데 다리를 폭파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말을 경비장교가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약 뭉치 하나를 다릿발에서 떼어 밖으로 끌어내 보였다. 물론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한강 다리는 그날 밤 끊겨 현장에 있던 5백~8백 명의 인명 희생은 물론, 아직도 철수를 기다리고 있던 1사단 병력, 2 · 3사단 병력, 그리고 서울의 피복 창고 보급품, 병기 등 모든 군수품을 고스란히 적에게 바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날 밤(28일 새벽) 동경 맥아더 사령부의 처치 장군이 일단의 사령부 장교를 이끌고 수원비행장으로 오게 돼 있어 나는 보병학교 고문 보브 헤이즈레트 중령, 李수영 중위, 운전병 신영선 하사와 함께 급히 한강 대교를 건너게 됐다.
다리를 막 건넜을 무렵, 거대한 폭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그 폭음과 이 얼마나 강했던지 지프 전체가 불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기 전 우리 옆집에 살던 킹 중령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나보다 속도가 늦어 다리 폭발 지점 직전에 있다가 참변을 목격하고는 내가 틀림없이 폭음에 휩쓸려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킹 중령은 곧 일본에 건너갔는데 거기서 내 애기를 아내 버트에게 해 한동안 내가 죽은 줄 알고 온 식구가 슬픔에 싸였었다.
다리 폭파에 관해서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이 문제에 관해 재판을 받고 사형이 집행됐으며, 그 뒤 박정희 정부 때 재심을 청구해 사후 무죄가 결정되기도 했지만 나는 관련이 없었다.
뒤에 안 애기지만 본부에 남아 있던 참모차장 김백일이 다리 폭발을 중지시키려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정래혁 중령을 급히 현장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탄 지프가 피란민에 밀려 겨우 다리 난간에 들어섰을 때 폭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이들도 날아갈 뻔했던 것이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3~204p

미 군사고문단은 폭파를 저지하려고 하고 있었다면서 영관급들이 폭파를 저지하려고 하는데 대위가 독단적으로 폭파를 지시할 수 없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하우스만은 한국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로버츠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의 신임을 얻었고 미군 모두가 한국에서 자신의 조언을 구했는데 자신이 대령들에게 조언을 통해 사실상 명령하여 지휘하기도 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게다가 당시 하우스만의 상급자들이 자리를 비우거나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황이었다. 스털링 라이트 대령(William Henry Sterling Wright)은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일본에서 막 귀국한 참이었다. 그리고 하우스만은 명목상의 대외적인 신분대로 일개 고문관 대위 따위가 아니라 G-2 정보 장교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우스만의 증언 내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사실이 보인다는 점이다. 전쟁 전날 밤 낙성대 파티에서 한국군 장교들이 술파티를 벌이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채병덕이 피곤해보였다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파티에 나가지 않고 일찍 잠잤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쟁 전날의 낙성대 파티에 관해서도 뭔가 거짓말로 숨기는 게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또 한강 다리 폭파에 대해서 증언할 때는 킹 중령이 일본에 건너가 하우스만의 아내 버트에게 이야기를 해줬다고 했는데, 한국 전쟁 발발에 대한 증언에서는 하우스만의 아내 버트가 전쟁이 발발했을 때 김포로 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참고로 김포는 한강 이남 지역이며 정말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아내가 김포에 있었다면 하우스만은 한강 이남으로의 인민군 도하를 막아야만 할 절박한 이유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즉, 북한군이 서울로 진입하자 김포에 있는 자신의 아내가 걱정되어서 공황에 빠져 충동적으로 한강 다리 폭파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24일 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가 있어 상당수 장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채총장도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행히 이 파티에 나가지 않아 24일 밤을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아내 버트는 오랫동안 결절형성증을 앓아 왔다. 폐렴을 앓은 후 폐의 기능이 약해져 가래가 점막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는 병이다. 병원에서 사람을 거꾸로 눕힌 후 일정한 치료를 해 가래를 뱉아 내게 한다. 이 폐결절형성증이 도져 아내는 6월 11일 동경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22일 퇴원해 한국에 돌아오던중 비행기가 고장나 24일 하오에야 김포에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집에 데리고 와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하고 나도 비교적 일찍 잠을 잤던 것이다.
육군본부 건물의 별채인 시멘트 건물 아래층에 작전상황실이 있었다.
참모들이 모여들고 옹진, 의정부, 문산, 춘천, 강릉 등에서 동시에 "敵軍이 탱크를 앞세우고 넘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있을 즈음 누구도 이것이 단순한 국경 충돌 아닌 전쟁이라는 것을 판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전쟁 소식이 퍼져 나가자 경무대, 국회 등에서 힐책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채총장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의정부로 나갔다. 그는 얼마 후 전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全전선에서는 "탱크가 넘어온다" "대부대가 공격해 온다"는 급박한 보고만 계속 들어왔다. 일종의 공황(panic) 상태였다.
적의 병력, 무기, 전술 등을 분석하고 여기에 대처할 아군의 병력, 무기, 전술 등을 계산할 아무런 여유가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98p
美고문단(KMAG)의 경우도 참으로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KMAG는 49년 6월 한국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美제5연대가 하와이를 향해 떠나 버리자 사실상 문관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소속도 대사관 소속이었으며 전쟁에 대비한다는 생각이나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문단은 위기시에는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25일 대사관이 주한 미국인의 철수 계획을 세울 때 KMAG 요원들과 그 가족들의 이름도 철수자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마침 KMAG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은 별 2개를 다는 데 실패한 후 퇴역차 한국을 떠나가고 없었고 부단장격인 참모장 스텔링 라이트 대령은 가족 전송차 일본에 가 있었다.
로버츠 장군은 22일 동경병원으로 나의 아내 버트를 방문해 한아름의 꽃을 선사한 후 바로 그날 미국행 배를 탔으며, 6 ⋅ 25 그날 아침에는 태평양상의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이다.
KMAG의 선임 장교는 통신장교인 찰스 스튜리스 중령이었다.
단장과 부단장이 없으니 선임 장교가 고문단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통신장교인 스튜리스 중령은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면서 나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 했다.
형식상으로 내가 KMAG 최고 책임자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은 사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KMAG는 한국군 자문을 위해 있는 것이었고 한국군총사령부의 자문은 지금까지 내가 맡고 있었으니까 이런 변화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중대한 시점에 미국이 한국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의문이었다.
나는 25일 고문단 가족들의 철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돼 가는 것을 보면서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열심히 보고했다. 25일 바로 그날 아내가 타고 왔던 C54기는 김포공항에서 북한의 야크기 공격을 받아 날개가 달아났고, 서빙고의 육군본부 KMAG 본부도 가끔 야크기의 공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99~200p
27일 일본에 갔던 라이트 KMAG 참모장이 돌아왔다. 나는 사태 진전 상황을 무초 대사에게 계속 보고하고 있었다. 무초 대사는 가끔 사령부를 찾아왔다. 라이트 대령이 돌아왔을 때 무초 대사도 KMAG 본부로 왔다.
KMAG는 한국군본부 건물에 같이 있었다.
대낮쯤이었다. 무초 대사가 와 있던 바로 그 때에 야크기 총사격이 잇달아 퍼부어졌다. KMAG 사령관의 비서실에 커다란 쇠금고가 하나 있었다. 나는 사격이 가해지는 반대 방향으로 무초 대사를 떼밀어 금고 뒤에 숨게 하곤 하다가 야크기가 사라지자 콘크리트로 된 이웃 작전과 건물로 모시고 가기도 했다.
...
나는 27일 비원을 돌다가 물밀듯이 닥치는 북한군의 탱크를 봤다.
26일에는 사령부 병사들이 적의 야크기가 계속 공습해오자 M1총, BAR 자동소총으로 마구 갈겨 야크기 한 대가 맞아 연기를 뿜으면서 산꼭대기 쪽으로 추락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27일이 되자 사태가 급박해졌다. 서울의 이곳저곳에 탱크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으며 전선의 어느 곳에서도 한국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보고는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201~202p

Comments

Popular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