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파자소암의 비유와 해탈로 가는 이분법 초월의 길

홍석현은 2017년 3월 29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한 강연[15]에서는 남북관계 접근법을 선불교파자소암 일화에 비유하며, “세상에는 하나의 원칙이나 계율로 재단해선 안 되는 복잡한 경우가 많이 있고 북한 문제도 이분법적으로만은 접근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문제”라고 설명

 

 

 

(암자를 지어 한 선승을 20년동안 뒷바라지 하던 공양주 노파가 하루는 선객의 시봉을 하는 딸 아이를 시켜 그의 무릎에 올라가 진한 교태를 부리도록 시켰다.)묻는다:스님, 이럴때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답하다: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대니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枯木琦寒岩 三冬無暖氣)묻는다:그러시다면 스님은 저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받으시겠네요.답한다: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정이라는 걸 느끼질 못하겠는데.(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난 노파는 "저런 속한이 놈한테 20년동안 밥을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면서 뛰쳐나가더니 다짜고짜로 암자에 불을 질러 버렸다.)禪林에 널리 알려진 "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의 내용이다. 이 공안의 포인트는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데 있다. 선은 이처럼 견성을 위해서는 부처도,조사도, 부모까지도 죽이는 俗塵과의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다.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노파는 "지혜" 또는 "明眼"을 상징한다. <조주록> <임제록>등 유명한 禪匠들의 어록에도 노파가 으례히 등장, 한판 지혜의대결을 벌인다. 웬만한 선객들은 노파한테 한 소식 배워 견성의 문을 연다.그러나 때로는 법력이 높은 도인을 만나면 묵사발을 당하기도 한다.노파가암자를 불태운 소식은 무엇일까.간단히 말한다면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안에 갇혀있는 선객의 死禪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참여의 動禪으로끌어 올린것이다.따라서 노파는 선승의 견성을 이끈 은인이다.그러나 암자의 선객은 이러한노파의 호의에 보답은 커녕 배신을 한다. 즉 노파를 대신한 딸 아이의 見性검증에 두차례 다 패착한다.첫번째 패착은 枯木琦寒岩이라는 대답이다. 여기서 그의 선수행은 생명 없는 고목이요 불씨 꺼진 나무재 같은 枯木死灰의 "사선"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소녀의 교태를 쇠창살에 갇힌 동물원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수행이라는 창살에 막힌채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따위 死禪은 한낱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두번째 대답 "여자의 정을 못 느낀다"는 얘기는 전적으로 노파의 은혜를저버리는 배은망덕이다. 물론 노파의 호의는 세속적인 통정을 하라고 연출한 肉布施는 결코 아니었다.다만 너그러운 자비심과 法悅로써 딸 아이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손이라도한번 꼭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파가 강구하는 이같은 보은의 법열을아직도 갖지 못한 선객은 이제까지 밥만 축내며 부처님을 기만한 사기꾼이다.노파는 20년쯤 됐으니 한 소식해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고 이제는 현실사회로 뛰어들어 중생을 돌보는 社會濟度를 해줄수 있으라 믿었다. 다시말해 노파는 오염된 사랑, 미움과 한, 아귀다툼의 쟁탈등 모순의 소용돌이속에휘말려 있는 세속 중생을 구제해주는 선객의 현실구원을 바랐다. 이같은 법력을 펼쳐 보일수 있는 사전연습을 해보라고 딸 아이를 들여보내 교태를 부리게 했던 것이다.노파의 호의는 일면 테스트의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선객은자기수행의 死禪에 머문채 밖을 향해 나갈 동선에는 캄캄했다.이래서 급기야는 암자에 불을 질러 선객을 산속 밖의 세속사회로 내몰았던 것이다.암주가 노파의 딸에게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는 "고목나무…" 운운이나 "여자의 정…" 얘기는 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생활을 이끄는 우리의 의식작용 그대로가 진리고 불법이라는 平常心是道의 조사선에서 보면 분명히 허위고 가식이다."나는 수행중이라서 여자의 살갗이 맞닿아도 미혹하지 않는다" 노파는 여기서 크게 실망한다.뭐라고!물론 여자의 살갗에 색정을 일으키고, 아가씨분 냄새에 "美色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된다.그러나 남.여를 구분하고 수행여부를 따져 겨우 겨우 관념적 경계심만으로인간의 정서를 억제하는 것도 실은 억지고 생떼다.現實濟度에 나서려면 세속현실의 여자교태는 물론 삼라만상을 포용해야 한다.다만 범부의 일을 나타내되 道法을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물들지않는 것이다.노파는 망상의 근원인 분별심을 버리고 여자의 교태를 수용하되 색정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수행이라는 관념을 빌어 색정을 가리우고 있는 선객의 인위적인 "허식"을 질타한다.아가씨는 선객의 대은인인 노파의 딸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뜻한 마음과감사하는 심정으로 대해 주어야 하거늘 "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댄것 같다"고 하다니….딱한 선객이다. 노파 모녀의 지극한 마음을 감사할줄도 모르는주제에 부처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침으로써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餘燈등을 환히 밝히고 말았다.깨달음의 필요, 충분 조건은 첫째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마음을 비웠기에 여자의 정도 못느낀다는 선객은 부처가 되겠다는 욕심을 잔뜩 끌어 안고있다. 엄청난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노파의 딸이 살갗을 비벼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외견상 매우 정상적인 수행승의 자세일 수도 있다.그러나 진정한 도인은 외형적인 엄숙함속에 언제나 領悟의 희열과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충만해 있어야 한다.견성한 선장은 세속에 나가 중생제도라는 현실구원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법력을 더욱 심층화하고 깨달음의 깊이를 다져야 한다.노파는 선객에게 이처럼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밝은 등불이 돼달라고 딸 아이까지 시켜 고무격려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간곡한 願力을 끝내 실현하고자 암자를 불질러 선승을 도망치게 했고, 저 세속 사회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이 공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의 별 해설과 평석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어떤 사람은 선객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노파를 찬양하기도 한다. 또는둘 다 훌륭하다고 평하면서 우열이 없었다는 무승부 판정을 내린다.그러나 나는 이 공안을 전혀 새로운 現實濟度의 입장에서 감히 새롭게평석하고자 시도해 보았다.우리가 오늘날 흔히 거론하고 있는 선은 조사선이다. 물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요가에 까지 연결된다.그러나 조사선은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 개신교와 같은 원시선.초기선의 개정판이다. 중국이라는 땅에서 일련의 불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사선은 그 본질이 動禪이다. 다시말해 "현실제도"로 회향되지않는 선수행은 박물관 진열장속의 골동품에 불과하다."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을 현실참여와 결부시켜 평석해본 것도 보다 조사선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해서였다.덕산:점심 요기할 떡좀 한 접시 주시게나.노파:스님, 그 바랑에 든 게 뭡니까.덕산:내가 연구하고 있는 <금강경청룡소초>네.노파:<금강경>에 대해 내 한가지 묻겠소. 만약 옳게 대답하면 떡을 거져드리고, 틀리면 떡을 팔지 않겠소. <금강경>에는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했더군요. 그런데 스님께선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고자 합니까.덕산:<금강경>에는 박사인지라 "주(周:덕산선사의 속성)금강"이라는 별명하지 붙었으니 오늘 점심은 공짜로 먹는구나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덕산선사는 당황했다.끝내 대답을 못한채 고개를 떨구고 뒤통수를 긁으며 떡장수 노파 앞을 물러 났다.선어록은 덕산선감선사(782-865)가 떡장수 노파한테 한방 맞은 이 사연을화두로 "德山省悟" 또는 "三世心不可得"이라 한다. 덕산은 후일 "덕산의 몽둥이질, 임제의 고함소리(德山棒 臨濟喝)"라는 성구를 선림에 남기면서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장이다.点心이란 원래 유가에서 유래한 단어다. 군자의 낮 끼니는 마음에 점 하나를 찍어두는 것으로 족하다는 유림의 검약정신이 배인 말이다.원래 사천성성도출신으로 율종의 학승이었던 덕산은 남방의 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승들을 혼내주겠다고 선종 본거지인 호남성, 강서성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호남성 澧陽(현 예현)에 이르러 점심 요기를 하려다 노파한테 이같이한 소식 듣고 크게 깨쳤다.먼저 이 공안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有와 無를 변증법적으로 내던졌다 거둬들이는 선의 기교면에서 덕산은 확실히 노파 보다 한수 아래다.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과거.현재.미래는 3世의 시간속에 갇혀 있다. 마치 자기가놓은 덫에 자기가 걸려든 꼴이다.선은 이같은 3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이 "찰나"라는 시간만을 힘있게, 그리고 당당히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3세에 연연하는 마음을버렸을 때만이 절대 자유로울수 있다.선은 마음이 어떠한 시간에도 머물지 말것을 강조한다. <금강경>은 이를 "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켜라)"이라 하고, 선은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임제의 師家인 황벽희운선사(?~850)는 그의 저서 <전심법요>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수 없음이 3세를 버리는 것이며 이를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또 마조의 제자 대주혜해선사도 저서 <돈오입도요문>에서 "과거 일은 이미지났으니 생각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은 스스로 끊어진다. <중략> 3세를 거두어 모을수 없음이 3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고 갈파하고 있다.3세를 버린다 함을 허무주의적인 부정으로 오해 해선 안된다. 이는 3세심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주인으로 우뚝 서있는 出格大장夫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임제는 피동적으로 시간의 부림과 구속을 당하지 않고 시간을 능동적으로활용하는 3세의 주인이 되면 언제나 진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거듭 강조했다.임제의 "수치작주 입처개진"은 던졌던 유.무를 다시 거둬들이는 선학적 변증법의 白眉다.덕산은 노파의 안내대로 용담숭신선사를 찾아가 禪理를 완전히 깨치고는 바랑속의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마당에 쌓아 놓고 불지르며외쳐댔다."번쇄한 논의는 太虛空에 던진 한오라기 머리카락과 같을 뿐이구나!"진작 이쯤 되었으면 노파한테 떡을 공짜로 얻어 먹었을 텐데….3세에는 점을 찍을곳이 없다. 오직 배가 고프니 점심을 먹어야겠다.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240

(암자를 지어 한 선승을 20년동안 뒷바라지 하던 공양주 노파가 하루는 선객의 시봉을 하는 딸 아이를 시켜 그의 무릎에 올라가 진한 교태를 부리도록 시켰다.)묻는다:스님, 이럴때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답하다: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대니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枯木琦寒岩 三冬無暖氣)묻는다:그러시다면 스님은 저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받으시겠네요.답한다: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정이라는 걸 느끼질 못하겠는데.(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난 노파는 "저런 속한이 놈한테 20년동안 밥을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면서 뛰쳐나가더니 다짜고짜로 암자에 불을 질러 버렸다.)禪林에 널리 알려진 "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의 내용이다. 이 공안의 포인트는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데 있다. 선은 이처럼 견성을 위해서는 부처도,조사도, 부모까지도 죽이는 俗塵과의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다.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노파는 "지혜" 또는 "明眼"을 상징한다. <조주록> <임제록>등 유명한 禪匠들의 어록에도 노파가 으례히 등장, 한판 지혜의대결을 벌인다. 웬만한 선객들은 노파한테 한 소식 배워 견성의 문을 연다.그러나 때로는 법력이 높은 도인을 만나면 묵사발을 당하기도 한다.노파가암자를 불태운 소식은 무엇일까.간단히 말한다면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안에 갇혀있는 선객의 死禪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참여의 動禪으로끌어 올린것이다.따라서 노파는 선승의 견성을 이끈 은인이다.그러나 암자의 선객은 이러한노파의 호의에 보답은 커녕 배신을 한다. 즉 노파를 대신한 딸 아이의 見性검증에 두차례 다 패착한다.첫번째 패착은 枯木琦寒岩이라는 대답이다. 여기서 그의 선수행은 생명 없는 고목이요 불씨 꺼진 나무재 같은 枯木死灰의 "사선"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소녀의 교태를 쇠창살에 갇힌 동물원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수행이라는 창살에 막힌채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따위 死禪은 한낱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두번째 대답 "여자의 정을 못 느낀다"는 얘기는 전적으로 노파의 은혜를저버리는 배은망덕이다. 물론 노파의 호의는 세속적인 통정을 하라고 연출한 肉布施는 결코 아니었다.다만 너그러운 자비심과 法悅로써 딸 아이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손이라도한번 꼭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파가 강구하는 이같은 보은의 법열을아직도 갖지 못한 선객은 이제까지 밥만 축내며 부처님을 기만한 사기꾼이다.노파는 20년쯤 됐으니 한 소식해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고 이제는 현실사회로 뛰어들어 중생을 돌보는 社會濟度를 해줄수 있으라 믿었다. 다시말해 노파는 오염된 사랑, 미움과 한, 아귀다툼의 쟁탈등 모순의 소용돌이속에휘말려 있는 세속 중생을 구제해주는 선객의 현실구원을 바랐다. 이같은 법력을 펼쳐 보일수 있는 사전연습을 해보라고 딸 아이를 들여보내 교태를 부리게 했던 것이다.노파의 호의는 일면 테스트의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선객은자기수행의 死禪에 머문채 밖을 향해 나갈 동선에는 캄캄했다.이래서 급기야는 암자에 불을 질러 선객을 산속 밖의 세속사회로 내몰았던 것이다.암주가 노파의 딸에게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는 "고목나무…" 운운이나 "여자의 정…" 얘기는 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생활을 이끄는 우리의 의식작용 그대로가 진리고 불법이라는 平常心是道의 조사선에서 보면 분명히 허위고 가식이다."나는 수행중이라서 여자의 살갗이 맞닿아도 미혹하지 않는다" 노파는 여기서 크게 실망한다.뭐라고!물론 여자의 살갗에 색정을 일으키고, 아가씨분 냄새에 "美色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된다.그러나 남.여를 구분하고 수행여부를 따져 겨우 겨우 관념적 경계심만으로인간의 정서를 억제하는 것도 실은 억지고 생떼다.現實濟度에 나서려면 세속현실의 여자교태는 물론 삼라만상을 포용해야 한다.다만 범부의 일을 나타내되 道法을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물들지않는 것이다.노파는 망상의 근원인 분별심을 버리고 여자의 교태를 수용하되 색정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수행이라는 관념을 빌어 색정을 가리우고 있는 선객의 인위적인 "허식"을 질타한다.아가씨는 선객의 대은인인 노파의 딸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뜻한 마음과감사하는 심정으로 대해 주어야 하거늘 "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댄것 같다"고 하다니….딱한 선객이다. 노파 모녀의 지극한 마음을 감사할줄도 모르는주제에 부처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침으로써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餘燈등을 환히 밝히고 말았다.깨달음의 필요, 충분 조건은 첫째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마음을 비웠기에 여자의 정도 못느낀다는 선객은 부처가 되겠다는 욕심을 잔뜩 끌어 안고있다. 엄청난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노파의 딸이 살갗을 비벼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외견상 매우 정상적인 수행승의 자세일 수도 있다.그러나 진정한 도인은 외형적인 엄숙함속에 언제나 領悟의 희열과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충만해 있어야 한다.견성한 선장은 세속에 나가 중생제도라는 현실구원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법력을 더욱 심층화하고 깨달음의 깊이를 다져야 한다.노파는 선객에게 이처럼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밝은 등불이 돼달라고 딸 아이까지 시켜 고무격려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간곡한 願力을 끝내 실현하고자 암자를 불질러 선승을 도망치게 했고, 저 세속 사회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이 공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의 별 해설과 평석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어떤 사람은 선객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노파를 찬양하기도 한다. 또는둘 다 훌륭하다고 평하면서 우열이 없었다는 무승부 판정을 내린다.그러나 나는 이 공안을 전혀 새로운 現實濟度의 입장에서 감히 새롭게평석하고자 시도해 보았다.우리가 오늘날 흔히 거론하고 있는 선은 조사선이다. 물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요가에 까지 연결된다.그러나 조사선은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 개신교와 같은 원시선.초기선의 개정판이다. 중국이라는 땅에서 일련의 불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사선은 그 본질이 動禪이다. 다시말해 "현실제도"로 회향되지않는 선수행은 박물관 진열장속의 골동품에 불과하다."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을 현실참여와 결부시켜 평석해본 것도 보다 조사선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해서였다.덕산:점심 요기할 떡좀 한 접시 주시게나.노파:스님, 그 바랑에 든 게 뭡니까.덕산:내가 연구하고 있는 <금강경청룡소초>네.노파:<금강경>에 대해 내 한가지 묻겠소. 만약 옳게 대답하면 떡을 거져드리고, 틀리면 떡을 팔지 않겠소. <금강경>에는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했더군요. 그런데 스님께선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고자 합니까.덕산:<금강경>에는 박사인지라 "주(周:덕산선사의 속성)금강"이라는 별명하지 붙었으니 오늘 점심은 공짜로 먹는구나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덕산선사는 당황했다.끝내 대답을 못한채 고개를 떨구고 뒤통수를 긁으며 떡장수 노파 앞을 물러 났다.선어록은 덕산선감선사(782-865)가 떡장수 노파한테 한방 맞은 이 사연을화두로 "德山省悟" 또는 "三世心不可得"이라 한다. 덕산은 후일 "덕산의 몽둥이질, 임제의 고함소리(德山棒 臨濟喝)"라는 성구를 선림에 남기면서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장이다.点心이란 원래 유가에서 유래한 단어다. 군자의 낮 끼니는 마음에 점 하나를 찍어두는 것으로 족하다는 유림의 검약정신이 배인 말이다.원래 사천성성도출신으로 율종의 학승이었던 덕산은 남방의 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승들을 혼내주겠다고 선종 본거지인 호남성, 강서성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호남성 澧陽(현 예현)에 이르러 점심 요기를 하려다 노파한테 이같이한 소식 듣고 크게 깨쳤다.먼저 이 공안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有와 無를 변증법적으로 내던졌다 거둬들이는 선의 기교면에서 덕산은 확실히 노파 보다 한수 아래다.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과거.현재.미래는 3世의 시간속에 갇혀 있다. 마치 자기가놓은 덫에 자기가 걸려든 꼴이다.선은 이같은 3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이 "찰나"라는 시간만을 힘있게, 그리고 당당히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3세에 연연하는 마음을버렸을 때만이 절대 자유로울수 있다.선은 마음이 어떠한 시간에도 머물지 말것을 강조한다. <금강경>은 이를 "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켜라)"이라 하고, 선은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임제의 師家인 황벽희운선사(?~850)는 그의 저서 <전심법요>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수 없음이 3세를 버리는 것이며 이를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또 마조의 제자 대주혜해선사도 저서 <돈오입도요문>에서 "과거 일은 이미지났으니 생각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은 스스로 끊어진다. <중략> 3세를 거두어 모을수 없음이 3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고 갈파하고 있다.3세를 버린다 함을 허무주의적인 부정으로 오해 해선 안된다. 이는 3세심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주인으로 우뚝 서있는 出格大장夫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임제는 피동적으로 시간의 부림과 구속을 당하지 않고 시간을 능동적으로활용하는 3세의 주인이 되면 언제나 진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거듭 강조했다.임제의 "수치작주 입처개진"은 던졌던 유.무를 다시 거둬들이는 선학적 변증법의 白眉다.덕산은 노파의 안내대로 용담숭신선사를 찾아가 禪理를 완전히 깨치고는 바랑속의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마당에 쌓아 놓고 불지르며외쳐댔다."번쇄한 논의는 太虛空에 던진 한오라기 머리카락과 같을 뿐이구나!"진작 이쯤 되었으면 노파한테 떡을 공짜로 얻어 먹었을 텐데….3세에는 점을 찍을곳이 없다. 오직 배가 고프니 점심을 먹어야겠다.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암자를 지어 한 선승을 20년동안 뒷바라지 하던 공양주 노파가 하루는 선객의 시봉을 하는 딸 아이를 시켜 그의 무릎에 올라가 진한 교태를 부리도록 시켰다.)묻는다:스님, 이럴때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답하다: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대니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枯木琦寒岩 三冬無暖氣)묻는다:그러시다면 스님은 저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받으시겠네요.답한다: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정이라는 걸 느끼질 못하겠는데.(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난 노파는 "저런 속한이 놈한테 20년동안 밥을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면서 뛰쳐나가더니 다짜고짜로 암자에 불을 질러 버렸다.)禪林에 널리 알려진 "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의 내용이다. 이 공안의 포인트는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데 있다. 선은 이처럼 견성을 위해서는 부처도,조사도, 부모까지도 죽이는 俗塵과의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다.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노파는 "지혜" 또는 "明眼"을 상징한다. <조주록> <임제록>등 유명한 禪匠들의 어록에도 노파가 으례히 등장, 한판 지혜의대결을 벌인다. 웬만한 선객들은 노파한테 한 소식 배워 견성의 문을 연다.그러나 때로는 법력이 높은 도인을 만나면 묵사발을 당하기도 한다.노파가암자를 불태운 소식은 무엇일까.간단히 말한다면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안에 갇혀있는 선객의 死禪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참여의 動禪으로끌어 올린것이다.따라서 노파는 선승의 견성을 이끈 은인이다.그러나 암자의 선객은 이러한노파의 호의에 보답은 커녕 배신을 한다. 즉 노파를 대신한 딸 아이의 見性검증에 두차례 다 패착한다.첫번째 패착은 枯木琦寒岩이라는 대답이다. 여기서 그의 선수행은 생명 없는 고목이요 불씨 꺼진 나무재 같은 枯木死灰의 "사선"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소녀의 교태를 쇠창살에 갇힌 동물원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수행이라는 창살에 막힌채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따위 死禪은 한낱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두번째 대답 "여자의 정을 못 느낀다"는 얘기는 전적으로 노파의 은혜를저버리는 배은망덕이다. 물론 노파의 호의는 세속적인 통정을 하라고 연출한 肉布施는 결코 아니었다.다만 너그러운 자비심과 法悅로써 딸 아이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손이라도한번 꼭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파가 강구하는 이같은 보은의 법열을아직도 갖지 못한 선객은 이제까지 밥만 축내며 부처님을 기만한 사기꾼이다.노파는 20년쯤 됐으니 한 소식해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고 이제는 현실사회로 뛰어들어 중생을 돌보는 社會濟度를 해줄수 있으라 믿었다. 다시말해 노파는 오염된 사랑, 미움과 한, 아귀다툼의 쟁탈등 모순의 소용돌이속에휘말려 있는 세속 중생을 구제해주는 선객의 현실구원을 바랐다. 이같은 법력을 펼쳐 보일수 있는 사전연습을 해보라고 딸 아이를 들여보내 교태를 부리게 했던 것이다.노파의 호의는 일면 테스트의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선객은자기수행의 死禪에 머문채 밖을 향해 나갈 동선에는 캄캄했다.이래서 급기야는 암자에 불을 질러 선객을 산속 밖의 세속사회로 내몰았던 것이다.암주가 노파의 딸에게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는 "고목나무…" 운운이나 "여자의 정…" 얘기는 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생활을 이끄는 우리의 의식작용 그대로가 진리고 불법이라는 平常心是道의 조사선에서 보면 분명히 허위고 가식이다."나는 수행중이라서 여자의 살갗이 맞닿아도 미혹하지 않는다" 노파는 여기서 크게 실망한다.뭐라고!물론 여자의 살갗에 색정을 일으키고, 아가씨분 냄새에 "美色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된다.그러나 남.여를 구분하고 수행여부를 따져 겨우 겨우 관념적 경계심만으로인간의 정서를 억제하는 것도 실은 억지고 생떼다.現實濟度에 나서려면 세속현실의 여자교태는 물론 삼라만상을 포용해야 한다.다만 범부의 일을 나타내되 道法을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물들지않는 것이다.노파는 망상의 근원인 분별심을 버리고 여자의 교태를 수용하되 색정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수행이라는 관념을 빌어 색정을 가리우고 있는 선객의 인위적인 "허식"을 질타한다.아가씨는 선객의 대은인인 노파의 딸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뜻한 마음과감사하는 심정으로 대해 주어야 하거늘 "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댄것 같다"고 하다니….딱한 선객이다. 노파 모녀의 지극한 마음을 감사할줄도 모르는주제에 부처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침으로써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餘燈등을 환히 밝히고 말았다.깨달음의 필요, 충분 조건은 첫째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마음을 비웠기에 여자의 정도 못느낀다는 선객은 부처가 되겠다는 욕심을 잔뜩 끌어 안고있다. 엄청난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노파의 딸이 살갗을 비벼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외견상 매우 정상적인 수행승의 자세일 수도 있다.그러나 진정한 도인은 외형적인 엄숙함속에 언제나 領悟의 희열과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충만해 있어야 한다.견성한 선장은 세속에 나가 중생제도라는 현실구원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법력을 더욱 심층화하고 깨달음의 깊이를 다져야 한다.노파는 선객에게 이처럼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밝은 등불이 돼달라고 딸 아이까지 시켜 고무격려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간곡한 願力을 끝내 실현하고자 암자를 불질러 선승을 도망치게 했고, 저 세속 사회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이 공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의 별 해설과 평석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어떤 사람은 선객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노파를 찬양하기도 한다. 또는둘 다 훌륭하다고 평하면서 우열이 없었다는 무승부 판정을 내린다.그러나 나는 이 공안을 전혀 새로운 現實濟度의 입장에서 감히 새롭게평석하고자 시도해 보았다.우리가 오늘날 흔히 거론하고 있는 선은 조사선이다. 물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요가에 까지 연결된다.그러나 조사선은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 개신교와 같은 원시선.초기선의 개정판이다. 중국이라는 땅에서 일련의 불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사선은 그 본질이 動禪이다. 다시말해 "현실제도"로 회향되지않는 선수행은 박물관 진열장속의 골동품에 불과하다."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을 현실참여와 결부시켜 평석해본 것도 보다 조사선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해서였다.덕산:점심 요기할 떡좀 한 접시 주시게나.노파:스님, 그 바랑에 든 게 뭡니까.덕산:내가 연구하고 있는 <금강경청룡소초>네.노파:<금강경>에 대해 내 한가지 묻겠소. 만약 옳게 대답하면 떡을 거져드리고, 틀리면 떡을 팔지 않겠소. <금강경>에는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했더군요. 그런데 스님께선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고자 합니까.덕산:<금강경>에는 박사인지라 "주(周:덕산선사의 속성)금강"이라는 별명하지 붙었으니 오늘 점심은 공짜로 먹는구나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덕산선사는 당황했다.끝내 대답을 못한채 고개를 떨구고 뒤통수를 긁으며 떡장수 노파 앞을 물러 났다.선어록은 덕산선감선사(782-865)가 떡장수 노파한테 한방 맞은 이 사연을화두로 "德山省悟" 또는 "三世心不可得"이라 한다. 덕산은 후일 "덕산의 몽둥이질, 임제의 고함소리(德山棒 臨濟喝)"라는 성구를 선림에 남기면서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장이다.点心이란 원래 유가에서 유래한 단어다. 군자의 낮 끼니는 마음에 점 하나를 찍어두는 것으로 족하다는 유림의 검약정신이 배인 말이다.원래 사천성성도출신으로 율종의 학승이었던 덕산은 남방의 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승들을 혼내주겠다고 선종 본거지인 호남성, 강서성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호남성 澧陽(현 예현)에 이르러 점심 요기를 하려다 노파한테 이같이한 소식 듣고 크게 깨쳤다.먼저 이 공안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有와 無를 변증법적으로 내던졌다 거둬들이는 선의 기교면에서 덕산은 확실히 노파 보다 한수 아래다.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과거.현재.미래는 3世의 시간속에 갇혀 있다. 마치 자기가놓은 덫에 자기가 걸려든 꼴이다.선은 이같은 3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이 "찰나"라는 시간만을 힘있게, 그리고 당당히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3세에 연연하는 마음을버렸을 때만이 절대 자유로울수 있다.선은 마음이 어떠한 시간에도 머물지 말것을 강조한다. <금강경>은 이를 "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켜라)"이라 하고, 선은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임제의 師家인 황벽희운선사(?~850)는 그의 저서 <전심법요>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수 없음이 3세를 버리는 것이며 이를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또 마조의 제자 대주혜해선사도 저서 <돈오입도요문>에서 "과거 일은 이미지났으니 생각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은 스스로 끊어진다. <중략> 3세를 거두어 모을수 없음이 3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고 갈파하고 있다.3세를 버린다 함을 허무주의적인 부정으로 오해 해선 안된다. 이는 3세심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주인으로 우뚝 서있는 出格大장夫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임제는 피동적으로 시간의 부림과 구속을 당하지 않고 시간을 능동적으로활용하는 3세의 주인이 되면 언제나 진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거듭 강조했다.임제의 "수치작주 입처개진"은 던졌던 유.무를 다시 거둬들이는 선학적 변증법의 白眉다.덕산은 노파의 안내대로 용담숭신선사를 찾아가 禪理를 완전히 깨치고는 바랑속의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마당에 쌓아 놓고 불지르며외쳐댔다."번쇄한 논의는 太虛空에 던진 한오라기 머리카락과 같을 뿐이구나!"진작 이쯤 되었으면 노파한테 떡을 공짜로 얻어 먹었을 텐데….3세에는 점을 찍을곳이 없다. 오직 배가 고프니 점심을 먹어야겠다.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암자를 지어 한 선승을 20년동안 뒷바라지 하던 공양주 노파가 하루는 선객의 시봉을 하는 딸 아이를 시켜 그의 무릎에 올라가 진한 교태를 부리도록 시켰다.)묻는다:스님, 이럴때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답하다: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대니 삼동설한에 따뜻한 기운이 없구나(枯木琦寒岩 三冬無暖氣)묻는다:그러시다면 스님은 저같은 소녀가 정을 주어도 안받으시겠네요.답한다: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정이라는 걸 느끼질 못하겠는데.(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난 노파는 "저런 속한이 놈한테 20년동안 밥을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면서 뛰쳐나가더니 다짜고짜로 암자에 불을 질러 버렸다.)禪林에 널리 알려진 "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의 내용이다. 이 공안의 포인트는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데 있다. 선은 이처럼 견성을 위해서는 부처도,조사도, 부모까지도 죽이는 俗塵과의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다.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노파는 "지혜" 또는 "明眼"을 상징한다. <조주록> <임제록>등 유명한 禪匠들의 어록에도 노파가 으례히 등장, 한판 지혜의대결을 벌인다. 웬만한 선객들은 노파한테 한 소식 배워 견성의 문을 연다.그러나 때로는 법력이 높은 도인을 만나면 묵사발을 당하기도 한다.노파가암자를 불태운 소식은 무엇일까.간단히 말한다면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안에 갇혀있는 선객의 死禪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참여의 動禪으로끌어 올린것이다.따라서 노파는 선승의 견성을 이끈 은인이다.그러나 암자의 선객은 이러한노파의 호의에 보답은 커녕 배신을 한다. 즉 노파를 대신한 딸 아이의 見性검증에 두차례 다 패착한다.첫번째 패착은 枯木琦寒岩이라는 대답이다. 여기서 그의 선수행은 생명 없는 고목이요 불씨 꺼진 나무재 같은 枯木死灰의 "사선"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소녀의 교태를 쇠창살에 갇힌 동물원 우리안의 원숭이처럼 수행이라는 창살에 막힌채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따위 死禪은 한낱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두번째 대답 "여자의 정을 못 느낀다"는 얘기는 전적으로 노파의 은혜를저버리는 배은망덕이다. 물론 노파의 호의는 세속적인 통정을 하라고 연출한 肉布施는 결코 아니었다.다만 너그러운 자비심과 法悅로써 딸 아이의 노고를 칭찬해주고 손이라도한번 꼭 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파가 강구하는 이같은 보은의 법열을아직도 갖지 못한 선객은 이제까지 밥만 축내며 부처님을 기만한 사기꾼이다.노파는 20년쯤 됐으니 한 소식해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고 이제는 현실사회로 뛰어들어 중생을 돌보는 社會濟度를 해줄수 있으라 믿었다. 다시말해 노파는 오염된 사랑, 미움과 한, 아귀다툼의 쟁탈등 모순의 소용돌이속에휘말려 있는 세속 중생을 구제해주는 선객의 현실구원을 바랐다. 이같은 법력을 펼쳐 보일수 있는 사전연습을 해보라고 딸 아이를 들여보내 교태를 부리게 했던 것이다.노파의 호의는 일면 테스트의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딱하게도 선객은자기수행의 死禪에 머문채 밖을 향해 나갈 동선에는 캄캄했다.이래서 급기야는 암자에 불을 질러 선객을 산속 밖의 세속사회로 내몰았던 것이다.암주가 노파의 딸에게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는 "고목나무…" 운운이나 "여자의 정…" 얘기는 行住坐臥.語默動靜이 모두 선이고,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는 일상생활을 이끄는 우리의 의식작용 그대로가 진리고 불법이라는 平常心是道의 조사선에서 보면 분명히 허위고 가식이다."나는 수행중이라서 여자의 살갗이 맞닿아도 미혹하지 않는다" 노파는 여기서 크게 실망한다.뭐라고!물론 여자의 살갗에 색정을 일으키고, 아가씨분 냄새에 "美色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된다.그러나 남.여를 구분하고 수행여부를 따져 겨우 겨우 관념적 경계심만으로인간의 정서를 억제하는 것도 실은 억지고 생떼다.現實濟度에 나서려면 세속현실의 여자교태는 물론 삼라만상을 포용해야 한다.다만 범부의 일을 나타내되 道法을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이것이 물들지않는 것이다.노파는 망상의 근원인 분별심을 버리고 여자의 교태를 수용하되 색정을 일으키지 말아야지 수행이라는 관념을 빌어 색정을 가리우고 있는 선객의 인위적인 "허식"을 질타한다.아가씨는 선객의 대은인인 노파의 딸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따뜻한 마음과감사하는 심정으로 대해 주어야 하거늘 "고목나무가 찬바위에 기댄것 같다"고 하다니….딱한 선객이다. 노파 모녀의 지극한 마음을 감사할줄도 모르는주제에 부처가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침으로써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餘燈등을 환히 밝히고 말았다.깨달음의 필요, 충분 조건은 첫째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마음을 비웠기에 여자의 정도 못느낀다는 선객은 부처가 되겠다는 욕심을 잔뜩 끌어 안고있다. 엄청난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노파의 딸이 살갗을 비벼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외견상 매우 정상적인 수행승의 자세일 수도 있다.그러나 진정한 도인은 외형적인 엄숙함속에 언제나 領悟의 희열과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충만해 있어야 한다.견성한 선장은 세속에 나가 중생제도라는 현실구원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법력을 더욱 심층화하고 깨달음의 깊이를 다져야 한다.노파는 선객에게 이처럼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밝은 등불이 돼달라고 딸 아이까지 시켜 고무격려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 간곡한 願力을 끝내 실현하고자 암자를 불질러 선승을 도망치게 했고, 저 세속 사회속으로 내몰았던 것이다.이 공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의 별 해설과 평석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어떤 사람은 선객을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노파를 찬양하기도 한다. 또는둘 다 훌륭하다고 평하면서 우열이 없었다는 무승부 판정을 내린다.그러나 나는 이 공안을 전혀 새로운 現實濟度의 입장에서 감히 새롭게평석하고자 시도해 보았다.우리가 오늘날 흔히 거론하고 있는 선은 조사선이다. 물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의 요가에 까지 연결된다.그러나 조사선은 기독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 개신교와 같은 원시선.초기선의 개정판이다. 중국이라는 땅에서 일련의 불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사선은 그 본질이 動禪이다. 다시말해 "현실제도"로 회향되지않는 선수행은 박물관 진열장속의 골동품에 불과하다."파자소암"이라는 공안을 현실참여와 결부시켜 평석해본 것도 보다 조사선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해서였다.덕산:점심 요기할 떡좀 한 접시 주시게나.노파:스님, 그 바랑에 든 게 뭡니까.덕산:내가 연구하고 있는 <금강경청룡소초>네.노파:<금강경>에 대해 내 한가지 묻겠소. 만약 옳게 대답하면 떡을 거져드리고, 틀리면 떡을 팔지 않겠소. <금강경>에는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했더군요. 그런데 스님께선 어느 마음에 점심을 들고자 합니까.덕산:<금강경>에는 박사인지라 "주(周:덕산선사의 속성)금강"이라는 별명하지 붙었으니 오늘 점심은 공짜로 먹는구나고 회심의 미소를 짓던 덕산선사는 당황했다.끝내 대답을 못한채 고개를 떨구고 뒤통수를 긁으며 떡장수 노파 앞을 물러 났다.선어록은 덕산선감선사(782-865)가 떡장수 노파한테 한방 맞은 이 사연을화두로 "德山省悟" 또는 "三世心不可得"이라 한다. 덕산은 후일 "덕산의 몽둥이질, 임제의 고함소리(德山棒 臨濟喝)"라는 성구를 선림에 남기면서선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선장이다.点心이란 원래 유가에서 유래한 단어다. 군자의 낮 끼니는 마음에 점 하나를 찍어두는 것으로 족하다는 유림의 검약정신이 배인 말이다.원래 사천성성도출신으로 율종의 학승이었던 덕산은 남방의 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승들을 혼내주겠다고 선종 본거지인 호남성, 강서성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호남성 澧陽(현 예현)에 이르러 점심 요기를 하려다 노파한테 이같이한 소식 듣고 크게 깨쳤다.먼저 이 공안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有와 無를 변증법적으로 내던졌다 거둬들이는 선의 기교면에서 덕산은 확실히 노파 보다 한수 아래다.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과거.현재.미래는 3世의 시간속에 갇혀 있다. 마치 자기가놓은 덫에 자기가 걸려든 꼴이다.선은 이같은 3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이 "찰나"라는 시간만을 힘있게, 그리고 당당히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3세에 연연하는 마음을버렸을 때만이 절대 자유로울수 있다.선은 마음이 어떠한 시간에도 머물지 말것을 강조한다. <금강경>은 이를 "應無所住 而生其心(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켜라)"이라 하고, 선은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임제의 師家인 황벽희운선사(?~850)는 그의 저서 <전심법요>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수 없음이 3세를 버리는 것이며 이를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또 마조의 제자 대주혜해선사도 저서 <돈오입도요문>에서 "과거 일은 이미지났으니 생각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은 스스로 끊어진다. <중략> 3세를 거두어 모을수 없음이 3세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고 갈파하고 있다.3세를 버린다 함을 허무주의적인 부정으로 오해 해선 안된다. 이는 3세심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주인으로 우뚝 서있는 出格大장夫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임제는 피동적으로 시간의 부림과 구속을 당하지 않고 시간을 능동적으로활용하는 3세의 주인이 되면 언제나 진리의 삶을 살수 있다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거듭 강조했다.임제의 "수치작주 입처개진"은 던졌던 유.무를 다시 거둬들이는 선학적 변증법의 白眉다.덕산은 노파의 안내대로 용담숭신선사를 찾아가 禪理를 완전히 깨치고는 바랑속의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마당에 쌓아 놓고 불지르며외쳐댔다."번쇄한 논의는 太虛空에 던진 한오라기 머리카락과 같을 뿐이구나!"진작 이쯤 되었으면 노파한테 떡을 공짜로 얻어 먹었을 텐데….3세에는 점을 찍을곳이 없다. 오직 배가 고프니 점심을 먹어야겠다.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92485

 

파자소암이란 화두가 있다. 중국 송나라 보제(普濟)스님이 펴낸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나오는 노파가 암자를 불태워버린다는 이야기다.

옛날 한 노파가 세상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는 사람을 얻고자 암자를 짓고, 수행자를 초청해 지극정성으로 공양하면서 수행을 도왔다. 20년이 되는 어느 날, 그 노파는 수행자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알아보고 싶어, 딸을 보내어 시험하게 하였다. 딸은 어두운 밤 암자를 찾아가 교태를 부리며 유혹했다. 하지만 수행자는 태연한 자세였다. 아리따운 여인은 수행자의 품으로 파고들어 껴안고 “기분이 어떻습니까?”라며 미소를 보내자 “고목이 바위에 기댄 듯 아무 느낌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딸은 돌아와 그대로 노파에게 일렀다. “20년 동안 나는 거짓 수행자를 공양하노라 헛고생을 했구나.” 노파는 이렇게 말하며 불같이 화를 내더니, 수행자를 내쫓고 암자를 불태워 버렸다.

왜 화를 내고 암자를 불태웠을까? 감정이 메말라 버린 나무토막이나 바위 같은 수행자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뜻한 인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수행자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욕망을 이긴다는 것과 욕망을 없앤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사람이란 아무리 수행을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다. 설사 수행을 통해 욕망을 없앨 수 있다 해도, 본성을 잃은 자가 세상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는 없다.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이란 감정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고, 사랑이란 감정이 없으면 남을 위해 등불이 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출처 :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문재인 청년 통계청장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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