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립스틱 (1999) - 인류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
몇 해 전에 아로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로 <립스틱>(1999)을 언급하자,
어떤 사람이 "최고의 드라마는 <브레이킹 배드>(2008)"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싸구려 할리우드 감성인 브레이킹 배드 따위를 립스틱과 비교하다니...
처참한 감성이라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 립스틱의 감성을 능가하는 드라마는 이제껏 등장한 적이 없었다.
아로가 괜히 90년대 노지마 신지의 극본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필적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 작품은 노지마 감성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드라마도 립스틱과 비교해서는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아로는 호기롭게 말할 수 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드라마의 장엄한 주제에,
<롱 베케이션>의 프로듀서를 역임하기도 한 스기오 아츠히로의 뛰어난 연출,
두말할 것도 없는 배우들의 열연,
초현실적인 노지마 신지의 명대사들 (특히 오프닝과 엔딩에 종종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유우 아키라의 시적인 나레이션들),
그리고
'무엇보다' 요시마타 료가 편곡 및 작곡한
마법같은 흡입력의, '영원을 묵상하게 강제하는', 음악들은
이 드라마를 시공을 초월한 울림을 주는 범보편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감수성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으므로, 대중적인 코드의 드라마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1화의 오프닝 장면 (여자 주인공 하야카와 아이의 절도 씬),
6화에서 레베카의 Maybe Tomorrow가 울려퍼지면서 두 남녀 주인공이 '상상 속의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
8화 바흐의 Prelude C Major가 울려퍼지는 장면,
9화 소녀들의 우정을 보여주는 해바라기 들판에서의 장면,
12화 초반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감별소 안의 풍경과 법무교관 카사이 다카오와 미이케 안나의 이별 씬 및 다카오의 안내방송은
훌륭했다.
저마다의 트라우마와 사연을 안고 소년감별소에 모인 소녀들의 진득한 우정과,
현실세계와 단절된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더 끈끈해진 두 남녀 주인공 사이의 사랑은,
지극히 감동적이다.
이 드라마와 관해서라면 아로는 뭐라도 알고 싶다.
그만큼 좋아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기타 감상들
#1.
하야카와 아이를 연기한 주연 배우인 히로스케 료코는 과연 자신이 출연한 이 드라마의 진가를 이해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머리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료코의 연기만큼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저 시절의 미소녀 료코만 연기할 수 있는, 1999년이어야만 가능한, 지극히 시의적절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
남자 주인공 유우 아키라와 그가 짝사랑하던 플롯 연주자 구와타 치히로의 나이는 32세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 유우를 연기한 당시 배우 (미카미 히로시)의 나이는 38세였다). 나와 그렇기 멀지 않은 나이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완숙해서인지 나는 나 자신이 벌써 저렇게 나이를 먹었나, 하는 감상을 지울 수 없었다.
#3.
"온 세상이 당신을 나쁘다고 해도, 당신이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도 나는 당신의 편이 되겠어."
이 드라마에서 노지마 신지의 사랑관을 잘 보여주는 대사고, 공감이 가는 대사다.
설령 세계 전체가 그(녀)의 적이 된다고 해도 품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에게 그 정도의 고상함이나 용기는 없다.
#4.
12회 분량의 드라마는 약 한달간의 시간 동안 소녀들이 감별소에서 보내는 풍경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불과 한달 동안 저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 끝에 '찰나생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드라마의 시간축인 1999년에서 벌써 23년의 세월이 지나갔구나, 저 파릇파릇한 10대 후반의 소녀들이 이제는 40대가 되었겠구나, 하는 다양한 찰나생멸적 감상들이 뒤따랐다. 실로 삶은 순간이고, 짧으며,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삶의 통렬함을 능가할만한 강렬한 발자취를 역사 속에 남기기 위해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 드라마의 주제만큼이나 강렬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5.
드라마의 상징적인 꽃이자 배경인 해바라기의 꽃말은 '일편단심', '영원한 사랑'이다. 드라마의 제목인 립스틱은 주인공 아이가 자신의 집 거울에 칠해놓은 흔적으로,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의지', '사랑받음을 갈구하고 또 사랑을 하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어떤 우와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소년감별소에서 여자애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립스틱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드라마에서 립스틱과 동일시되는 물체가 (똑같이 새빨간 색깔이자, 성경에서 유혹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사과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오브제로서의 사과와, '신세기의 이브는 이제 결코 사과를 먹지 않을 것이다'는 자막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서로에 대한 신의를 바탕으로,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6.
1999년 세기말에 등장한 작품이라 그런지, 묵시론적,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드라마에서도 흐른다. 이에 편승하듯, 두 남녀 주인공 역시 '21세기의 사랑'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또 다른 등장인물인 마키무라 코우키 역시 '21세기'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드라마의 방영시기와 드라마의 주제가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케이스.
#7.
노지마 신지는 2021년에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담당하면서 "드라마 업계에 컴플라이언스가 만연하면서 나 같은 작가는 날개가 뜯겨진 것 같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하게 되었다." 고 말을 하였다. 2000년대 이후의 마일드해진 그의 작풍은 (그럼으로써 뭔가 2% 부족한 듯한, 나사가 빠진 듯한 그의 후기 드라마들은) 본인의 의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노지마의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작품에는 '재능을 잃고 파멸한 천재적 아티스트' 캐릭터가 자주 등장했는데, 작가 본인의 미래를 암시했던 것 하다. 노지마 신지는 이 작품, 립스틱, 을 끝으로 더 이상 천재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아로에게 있어 20세기는 1999년의 립스틱과 함께 끝났고, 노지마 신지의 천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의 세계는 (스마트폰의 영향이 크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더 천박해지고, 가벼워진 것 같다. 아직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있던 1999년의 립스틱의 세계가 그리워진다.
#8.
만약 <립스틱>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미카미 히로시가 아니라 본래 내정되었던 것처럼 기무라 타쿠야가 했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형편없이 떨어졌을 것이다.
갑자기 미카미 히로시로 바뀐 것은 천우신조였다.
마찬가지로, 96년작 <롱 베케이션>의 남자 주인공을 기무라 타쿠아가 아닌 미카미 히로시가 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모든 배역에는 그에 더 걸맞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운명, 필연, 또는 숙명이라고 불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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