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언니' 작가 권정생, 윤락녀가 된 '여친'…"가엾은 운명에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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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가 서울로 떠난 것은 늦가을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명자는 어느 윤락가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로 전락해 버렸다고 했다...가엾은 운명에 목이 멘다’(아동문학가 권정생 수기 중에서)
‘갑순이는 제 키만큼 높이 부딪쳐 오는 파도 속으로 자꾸자꾸 걸어 들어갔습니다.’(명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 ‘갑돌이와 갑순이’ 중에서)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1937~2007). 그는 평생 늑막염과 폐결핵 그리고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방광과 신장 장애로 살아야 했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로 시골 교회 종지기였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낮게 엎드려 몽당연필로 동화를 쓰곤했다. 결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선생은 죽을 때까지 옷 서너 벌로 살았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지상의 방 한 칸'이 전부였다. 그마저 흙벽집이었다. 그런 선생은 10여 억원에 이르는 전 재산과 매년 1억5000만 여원의 인세를 남한의 가난한 어린이들과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신앙이 있건 없건 그를 '성자'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런 권정생에게 애틋한 여인이 있었다. 가난했고, 가난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풀빵 하나 사줄 형편이 못됐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사랑을 주시리라 그는 믿었다.
부산역에 북쪽으로 800m 쯤 올라가면 지하철 초량역과 정발(조선 중기 무신) 장군 동상이 나온다. 그 동상 북쪽으로 시옷자 형태의 소박한 예배당이 있다. 삼일교회라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해 5년 여 간 옥고를 치른 한상동(1901~1976) 목사가 세운 교회다. 한 목사는 평양형무소에서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6.25전쟁의 와중에 판자를 주워 모아 세운 민중교회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가난에 쫓겨 고향 안동에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부산 초량리(초량동)까지 흘러 들어온 권정생은 그곳에서 그나마 마음 의지할 수 있는 두 친구를 만난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서 만난 기훈과 명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아꼈고 서로가 서로를 챙겼다.
권정생은 6.25전쟁을 떠올리며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이라고 했었다. “전쟁 직후 부산은 모두가 거지 깡패 양아치 석탄장수 부두노동자 양공주 암달러장수 밀수꾼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며 살았다.” 그렇게 말했다.
권정생은 재봉틀 가게 점원이었다. 말이 점원이지 초라한 행색의 그가 밥 세끼 얻어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가 점원이 된 것은 안동에서 부산까지 걸어오면서 3일 간 굶은 탓이다. 차비마저 거지들에게 빼앗겨 걸어걸어 부산까지 왔다가 부산역 근처에서 쓰러졌다. 이를 발견한 재봉틀 가게 주인 내외가 거두어 살 수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난 것이다.
기훈과 명자.
기훈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피난길에 형과 헤어져 생사를 몰랐다. 고아나 다름없었다. 자동차 수리점 보조였다.
충청도 출신 명자는 전쟁 때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원을 전전하다 부산까지 흘러 들어와 식모살이를 했다. 명자는 폭격 후유증으로 좀체 밖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정생과 기훈을 만나거나 삼일교회 예배당을 갈 때 햇빛을 보았다.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느 날 명자는 정생에게 도둑년으로 오해 받은 얘기를 수다스럽게 했다. 슬픔 가득한 소녀가 그날은 달랐다.
“어느 학교 선생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공부가 하고 싶어 야학을 다니곤 했어. 그러다 메리야스 보따리 장수하는 아주머니를 만나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지 않았겠어. 대구와 부산을 기차로 오가며 말이다. 한데 어느 날 물건 떼서 그 아주머니와 기차를 타려다 아주머니 찾느라 기차를 놓치고 말았지 뭐니. 대구 집에 도착한 아주머니가 난리가 났어. 명자 이년이 내 짐을 가지고 도망갔다고...오갈 데 없는 고아년 거두었더니 도둑년이라고...내가 밤기차 타고 10시간이나 걸려 뒤늦게 도착했을 때 동네 분들과 나를 흉보고 계시더라고...”
이 착한 소녀 명자의 얘기를 권정생은 ‘밀알’(1990년)지에 남겼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며...
그렇다고 정생의 처지도 부모가 살아 계시다할 뿐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본 도쿄 빈민가에서 조선인 청소부 아들로 태어나 해방과 함께 귀국, 부모의 고향 안동 일직면에 정착했으나 극심한 생활고로 온 가족이 헤어져 살았다. 오두막집의 소작농이었다. 정생은 중학교 진학이 어려워지자 입이라도 덜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 왔던 것이다.
외롭고 힘들었던 세 친구 정생, 기훈, 명자는 나이와 처지가 비슷해 고된 노동 가운데서도 자주 어울리곤 했다. 그 무렵 정생은 어떻게든 중학교가 가고 싶어 재봉틀 점원에서 계몽서적으로 일자리를 옮겨 돈을 모았다. 그 마르고 작은 몸으로 자전거배달도 하던 점원이었다.
세 친구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현진건의 ‘무영탑’, 잡지 ‘학원’ 등을 돌려 읽기도 했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말도 안되는 사치라며 목청을 돋워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느날 정생과 기훈이 어깨동무를 하고 ‘굳세어라 금순아’ ‘슈샤인보이’를 부르며 삼일교회 앞 골목을 지날 때 명자가 어둠 속에서 자박자박 걸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기훈이 여동생 나무라듯 말꼬리를 높였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 밤에 위험하게.”
“너희들이구나...교회 다녀오는 길이야”
명자는 찬송가와 성경을 품고 있었다. 정생은 파리한 얼굴의 명자가 늘 마음에 걸렸다. 마음 한 군데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이 활달한 기훈이 명자에게 큰오빠처럼 대하는 것이 걸려 아무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열여섯 전후의 소년 소녀들이었다.
정생과 기훈은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일했다. 명자가 삼일교회에 나오라고 권했지만 두 사람은 노동에 지쳐 미루곤 했다.
사실 정생은 혼자서 초량리 삼일교회당 앞을 몇 번 가본 일이 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릴 생각을 못했다’라고 밝혔다. 명자를 예배당 안에서 만나게 된다면 더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명자는 이따금 나를 보면 한숨 섞인 말로 위로했다. “얼굴이 말이 아냐. 어디 아픈덴 없니?” “응 난 요즘 자건거타고 오르막에 오를 땐 숨이 무척 가빠”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명자가 창녀가 되었다. 어쩔 수 없었던 모순 투성이의 역사와 사회가 낳은 불행한 고아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회고 중에서)
생전 권정생 선생은 “나는 그때 명자가 준 군용 찬송가와 성경책을 평생 소중한 선물처럼 간직했다”라고 고백했다. 지난 20일 경북 안동시 일직면 '권정생동화나라'에서 만난 최윤환 관장은 "부산은 10대 후반 권정생 선생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폐결핵에 걸렸고 그것이 평생을 괴롭힌 고난의 장소"라면서 "선생께서 너무나 애틋해 했던 명자에게 받은 성경 책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1956년 기훈이 죽었다. 죽음의 원인은 교통사고로 인한 입원이었다. 3개월 간 입원을 해야 했는데 정작 병원비가 없었다. 정생은 고향에 돌아가 중학교 진학할 목적으로 모아놓은 돈을 아낌없이 친구를 위해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과 불행에 울었다. 어디에도 구원은 없었다. 그런데 퇴원 당일 새벽이었다. 기훈은 자살했다.
그해 가을 명자마저 부산을 떠나겠다고 했다. 서울로 간다고 했다. 정생은 절망과 슬픔과 가난으로 모든 게 황폐해져 명자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정생은 기침이 잦고 뼈와 살이 붙을 정도로 말랐다. 한 평생을 괴롭힌 폐결핵의 시작이었다. 늑막염을 동반했다.(하편 이어짐)
◆ 아동문학가 권정생
1937년 일본 도쿄 혼마치에서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남.
1944년 초등학교 때 미군의 도쿄 공습으로 시골 군마켄의 츠마코히로 이사.
1945년 해방이 됐으나 귀국 형편이 못돼 후지오카로 거처를 옮김.
1946년 귀국. 생활고로 가족이 경북 안동과 경북 청송으로 흩어져 생활.
1947년 안동 일직면 조탑리 오두막집에서 생활.
1950년 전쟁과 가난으로 떠돌이 생활.
1953~1957년 부산 생활.
1956년 폐결핵과 늑막염 발병.
1964년 어머니 사망.
1965년 가난으로 떠돌이 거지로 살던 중 아버지마저 사망.
1966년 방광과 한쪽 신장 드러내는 수술.
1967년 조탑리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며 종지기 생활을 하며 글쓰기를 시작함. '강아지똥'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에 당선. 본격 글쓰기 시작.
1982년 '몽실언니'를 잡지 '새가정'에 연재.
1983년 교회가 예배당 종탑 종소리 대신 차임벨로 바꾸면서 '실직'(?). 교회가 보이는 빌배산 아래 두 칸 흙집을 지 어 이사.
2005년 유언장 작성. 재산 가난한 어린이 위해 기부.
2007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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