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로스차일드 자본으로 출자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만주국의 경제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일본 3대 재벌과 비슷한 경제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싱크탱크였던 만철 조사부; 로스차일드-소련 공산당-일본 공산당-고토 신페이, 오자키 호츠미 (고노메 후미마로 내각 외무부)-리하르트 조르게 커넥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철 직원들을 통해 일본 관동군의 동향을 파악했던 로스차일드 자본

 

파리 로스차일드가 출자.
 
...
 
줄여서 만철(滿鐵/, まんてつ, 만테츠).[4] 철도를 경영하며 만주국을 지배했던 만주의 동인도회사였다. 처음에는 일본 제국 정부가 주식 50%를, 민간이 나머지를 가졌으나, 이후 정부가 지분 전체를 보유하며 공기업처럼 변한다.

1906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랴오둥반도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이 때 할양받은 철도[5]남만주철도부속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대만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식민지 정책을 총지휘했던 문관 출신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였다. 만철의 설립 자체가 러일전쟁 중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가 고토 신페이의 영향을 받아 헌책한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요지는 철도 경영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대륙에서의 국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만철은 철도를 기반으로 광산, 항만, 정유, 유통, 제조, 출판,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가 만주국의 경제를 장악하였다.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닌 관동군과 더불어 만주를 지배한 한 축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6] 
 
...
 
1920년대에는 일본 정부의 1년 세입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연간수익을 기록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실제로 만철은 1923년 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 사이에 일본제국 내의 모든 법인 중 자본금 규모 1위 법인이다. 민간기업과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당시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비시그룹,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못지않게 당시 일본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회사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에서 한반도 내 철도를 위탁경영하기도 하였고[7],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업으로 만주이민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언급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한 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가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 챈 일본이 바로 전쟁을 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강제병합을 공고화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
 

2.1. 만철 조사부[편집]

중국이나 러시아와 인접한 만주에서 사업을 벌이는 만큼 산업이나 경제, 시장, 자원탐사 등의 분야는 물론 국제정세와 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많은 신경을 썼고, 이를 위해 '조사부'를 설치해서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간 6천 건이 넘는 보고서를 생산해내었다. 이 만철 조사부는 1930년대 이후로는 사실상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처우와 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당대의 엘리트들이 만철 조사부에 모여들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정보 획득을 위해 뉴욕이나 파리 등에도 지부를 설립하는 등, 당시로서는 첨단지식을 얻기 위해서 각고로 많은 노력들을 기울였다. 또한 만철에는 일본의 신진 학자들이 많이 참가, 참여하였으며, 동아시아의 많은 젊은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만철은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젊고 다양한 시각을 모두 수용하는 유일한 기업이었다.[9] 그래서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창시한 동주 이용희(1917) 교수도 만철 조사부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들은 이제 산업개발이 이루어지려 하는 만주에서 첨단도시계획이나 정책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맡았다.

물론 이 계획들이 죄다 제대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들은 만주국이 패망하고 일본열도로 귀환한 후에 일본 경제 정책에 관여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고[10] 한국과 대만, 중국의 경제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11] 
 
...


소련의 스파이 조르게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인물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외무부에서 일하던 오자키 호츠미가 있다. 공산당원 휴우노 아라오의 영향을 받은 호츠미는 중국의 좌익 작가인 샤엔이나 루쉰과 교류를 했던 전력이 있다. 호츠미는 중국에서 조르게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가 중국 난징 정부의 동향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했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 소속으로 상하이에 있던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에 파견되어 만철 산하의 운송업체에 들어가 첩보활동을 벌였다. 주로 관동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

 


관동군은 일본 제국 육군 소속으로 대만군, 조선군, 지나주둔군, 본토 사단과 동등한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직속 부대였다.[3]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의 상급지휘부인 대본영이 설치된 후로는 참모본부를 통해 대본영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만주를 점령한 소련이 남만주철도를 모두 차지한 뒤 중국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이 축하 선물로 1952년 반환했다.

한편 1910년 경술국치가 기정사실화된 배경에는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둘러싼 미일러 간의 암투가 촉매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만주철도에 개입하려는걸 눈치 챈 일본이 바로 전쟁을 끝낸 러시아와 협상하고 미국에 앞서서 만주철도 관련 이권을 선수친 것. 그런 관계로 만주-중국으로 향하는 이권의 교두보를 위해서 한일강제병합을 공고화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보상 역시 좋은 편이었다. 만철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등 귀족과 같은 삶을 만주에서 누릴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만철이 생산한 화차(철도)객차를 사용하였다고 하니 의외로 그 흔적은 끈질겼다. 심지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오지에선 1980년에도 만철제 화차가 현역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 경악할 만한 사실은 북한에서는 만철에서 쓰던 푸러형 증기기관차[8]21세기까지 운용되고 있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면서 1917년 경성부에 있던 본사를 도쿄부 우치사이와이초(内幸町)로 이전하였다.[4] 침탈 구역을 확장하여 조선은 물론 중국, 대만, 내몽골-만주, 사할린-쿠릴 열도, 필리핀, 영국령 말레이 반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서까지 척식 사업을 통해 경제 침탈과 물자 수탈을 잇따라 강행하였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장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이민을 왔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총을 지급하고 투쟁을 진압한 바 있다. 이 때 1926년 북률 출신이었던 나석주 의사(義士)가 경성부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5]

공기업이라 주가가 저평가되었을 뿐, 시가총액은 미쓰비시 등 거대재벌보다도 위라고 평가되던 초거대 기업이다. 단순히 뺏은 땅에서 소작 부리는 수준이 아니라 광공업, 제철, 철도, 금융, 유흥 등 여러 분야에 손을 댔고, 브라질이나 프랑스령 동인도에 투자하고 은행을 내는 등등.

 

...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렸을 때, 일본의 동양 척식주식회사는 한반도 토지의 64%라는 실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전쟁 전에 미국에서 사채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 전과 전쟁중.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의 독점 지배 회사나 마찬가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 관리 회사는 어디였을끼? 놀랍게도 그것은 모건의 내셔널시티은행이었다. 전쟁중에 ‘추축국’ 일본의 기업을 ‘연합국’인 미국의 은행이 지배할 수 있었다는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바젤클럽말고는 달리 없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앞서 말한 수수께끼의 베스트리히 박사가 있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