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기고, 이안 브레진스키가 보는 아버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https://economist.co.kr/article/view/ecn201706260013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길고 강렬했던 삶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길고 강렬했던 삶
지난 5월 26일 아버지 즈비그뉴 카지미에르즈 브레진스키가 89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길고 강렬했던 삶이었다.
아버지는
독일에서 히틀러의 잔혹성을 직접 목격하고 그에 저항한 용기 있는 폴란드 외교관 가문 출신이었다. 나치의 학살과 뒤이은 소련
점령으로 아버지 가족은 소중한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훗날 미국에서 학자로서 권위주의 정권과 제국의 구조를
연구했다. 그 지식을 지렛대 삼아 전략가로서 철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 일조했다.
아버지는 공화당·민주당 소속
대통령들의 고문으로 일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옛 소련과 위험한 대결 국면에서 미국-유럽 관계의 진로를
설정하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고, 미-중 관계를 심화하는 데 기여했다. 존 F. 케네디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이 여러 국가안보 문제와 관련해 아버지의 조언과 통찰을 구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아버지는 집요했고 대세에 역행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중동·러시아·중국 문제에서
종종 인기 없는 입장을 옹호해 많은 사람의 거센 비판(나아가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말로 합당하고 논리적인 주장이
제시되지 않는 한(그런 일은 흔치 않았다) 비판에 냉정하게 대처하면서 항상 경청한 뒤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
폴란드를 모두 사랑한 아버지의 이중성은 항상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태운 배가 북미 해안에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래의 새 터전을 보려고 육지 쪽 갑판으로 몰린 동안 그는 대서양을 향한 바다 쪽 갑판에 남아 폴란드 쪽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집안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10대 청소년 시절 전쟁 관련 라디오 뉴스를 무수히 받아
적으며 연합군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을 때 얄타 협정의 현실에 충격 받고 비탄에 빠졌다.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며
춤출 동안 폴란드인을 비롯한 중부유럽 사람들은 곧바로 지정학적 분열의 냉엄한 현실을 깨달았다.
가족은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아버지는 맥길대학 졸업 후 보스턴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을 새 보금자리로 선택했다. 아버지는 이 나라의 활력·낙관주의·가치관에 감명 받아 충성을 다짐했다.
아버지는
미국이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한 일, 세계적으로 평화와 자유의 확대와 보호를 위해 과거에 했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마지막까지 제2의 고향에 충성하고 헌신했지만 모국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오히려 더욱 커져갔다.
아버지의 학문 연구·우정 그리고 무수한 방문이 모국에 대한 그의 애정이 오히려 더욱 커졌음을 입증한다.
아버지의
통찰력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아버지는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중 많은 저서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게임플랜,
핵전략시대의 미-소 대결이론(Gameplan: A Geostrategic Framework for the Conduct of
the US-Soviet Contest)’은 냉전 승리를 위한 전략의 윤곽을 그렸다. ‘21세기 전야, 세계는 혼란으로
향한다(Out of Control: Global Turmoil on the Eve of the 21st Century)’는 현
시대 경제의 윤리적 과제에 대한 1990년대의 통찰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예나 지금이나 ‘테크네트로닉
시대, 21세기의 국제정치(Between Two Ages: America’s Role in the Technetronic
Age)’다. 1970년대에 출판된 이 책은 기술과 전자공학이 탈공업화 시대의 가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세계
전반적으로 신기술이 어떻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고 동질화의 역학 관계를 형성하면서 긍정적·부정적인 결과를 모두 초래하는지
설파했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신기술을 토대로 우리 세계를 더 좁고 더 긴밀하게 연결하는 통신혁명의 좋은 점과 나쁜 점, 혜택과
위험을 모두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위트가 넘쳤다. 몇 년 전 리투아니아 정부가 멧돼지 사냥에 아버지를
초대했다는 사실을 최근 떠올렸다. 아버지는 두 마리를 잡은 뒤 곧바로 몰로토브(20세기 중반 소련 외무장관)와 리벤트로프(20세기
초중반 나치 독일 외무장관)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삶의 모든 측면, 심지어 사냥과 유머에도 지정학과 역사를 엮어 넣었다.
아버지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준 가장 중요한 충고는 누구나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대의를 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웠고 그것이 그의 일생을 규정 지은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대의를 품고 있었다. 하버드·컬럼비아·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학점평가에
엄격하고,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학생들과 깊고 오랜 우정을 나눴다. 항상 조언해주고 그들의 경력향상을 지원했다.
냉전의
전사로서 아버지는 지식의 칼을 이용해 유럽 포로국가들(Captive Nations of Europe)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체첸의 독립 열망이 러시아의 군화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힐 때 다른 사람들은 외면했지만 아버지는 그들 편에 섰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높은 대의가 개인적 동기부여·만족·성취감의 강력한 원천이 된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족은 물론 또 하나의 큰
기둥이었다. 어머니 에밀리 베네시를 향한 사랑이 지극했다. 약 60년 동안 부부의 정을 쌓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미술활동의 최대
후원자였다.
나를 포함한 자식에 대한 애정도 그에 못지 않았다. 가족끼리 치열한 축구 경기를 지휘하고 뉴저지 주
허드슨 강변, 버지니아 주 포토맥 강변, 메인 주 아카디아 국립공원에서 가족 산책을 정기화·의무화했다. 그 산책을 통해 가족간
유대가 강화됐으며 바로 몇 주 전까지 계속됐다.
가족 저녁식사 자리에서의 체계적인 토론도 그리워질 듯하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가톨릭교회의 역할, 미국을 휩쓰는 최근의 사회적 유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에 관해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과제를 던져줬다. 아버지에게서는 학교·직장생활 그리고 가족과 관련해 건전하고 합리적인 조언이 항상 끊임없이 샘솟았다.
우리 모두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무한한 에너지·열정, 날카로운 위트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유산·교훈·대의에서 항상 배움을 얻도록 노력해야겠다.
- 이언 브레진스키
[ 필자는 미국의 싱크탱크 아틀랜틱 카운슬 산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국제안보센터의 선임 연구원이다. 이 글은 아틀랜틱 카운슬 사이트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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