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쟁이 인드라의 말과 다르게 '매카시 리스트'와 '베노나 리스트'는 일치하지 않는다; 국제투기자본 (CIA)이 냉전 확대용 도구로 조지프 매카시를 활용했으나 이후 선을 넘자 매장시켰다

 

한줄 요약:

국제투기자본 (CIA)이 출세에 눈이 먼 초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에게 관련 자료를 넘겨주면서 매카시즘 열풍을 활용하고, 냉전을 확대시키고자 했으나, 매카시가 멍청하게 국제투기자본 내부 인사인 조지 C. 마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미국 군부 내 엘리트들을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선을 넘어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이다.

한국 국회에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대장으로 활용했다 버리는 케이스가 많을 것이다. 다문화주의 이미지 마케팅에 활용되었던 필리핀 출신의 모 국회의원이라던가, 한미FTA 발의 후 국회에서 최루탄 뿌리고 제명된 모 국회의원이라던가, 조국 나팔수 노릇했던 모 경찰대 출신 프로파일러라던가... 이런 애들은 지도부에서 1회용으로 써먹는다.



그때까지 매카시는 정치적으로 햇병아리에 불과한 위스콘신 주를 대표하는 초선 상원의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 자신을 일약 정치적 거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편법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 선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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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소련과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이 2003년 앤 콜터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매카시에게 이 리스트를 넘겨 준 것이 CIA라고 한다. 그러나 알아둬야 할 것은 이 발언 당사자인 앤 콜터는 학자도 기자도 아닌 칼럼니스트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예를 든다면 '이슬람교도는 비행기 탑승이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방사능 노출은 암을 예방한다.' 같은 반지성주의를 공공연히 선동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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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매카시즘의 피해는 일부 좌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는 게 콜터의 주장이지만 이 견해는 사실 주류 학계와 언론에선 거의 부인주의[30] 취급당한다. 실제 매카시와 동시대에 FBI가 수행한 소련 간첩 색출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와 대조해 보면 "매카시 리스트"는 "베노나 리스트"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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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매카시즘은 결과적으로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당시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물리학자 및 공학 기술자 대다수는 단순히 중국계/아시아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파이로 내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일단 첸쉐썬 본인은 장인이 장제스의 고문이었고 미국에 유학 올 당시 중국국민당 정부에서 신분을 보증할 정도였는데도 이 꼴을 당했으니 그 정도 빽도 없었던 다른 아시아계 인물들은 얼마나 징그러운 억압을 당했을지 알 만 하다. 첸쉐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할아버지는 입학 시 엄청난 실력과 스펙이 요구되는 최상위권 대학인 Caltech의 졸업생이자 박사였으며 전미의 공학도들이 한번쯤은 들어가서 일하고 싶어서 난리인 NASA 산하 제트추진연구소를 설립한 메이커 중 하나이며 자신 역시 선통제도 집권하기 전에 태어난 청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저 제트추진연구소는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엄청난 양의 발사체들과 제트기들을 개발한 기관이다. 결국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과학자들은 미국인들과 미국에게 환멸을 느껴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드는 데 동조하고 21세기에도 중국을 이끌고 있는 기술 관료들을 육성해냈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중국은 핵과 미사일을 백지 상태에서부터 개발하느라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공산당의 중책을 차지한 기술관료 집단이 주도하는 과학 기술의 개발 역시 느려졌을 것이다. 21세기에 중국이 미국의 최대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매카시는 공산당을 잡는답시고 공산당을 득세하게 만든 최악의 트롤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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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국이 매카시를 지지하며 지지 기반이 확고해지는 듯 했지만 그의 아무 근거도 없는 소련 스파이(혹은 빨갱이) 사냥은 곧 밑천을 드러냈고 사람들도 점차 반공에 지쳐가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결정타로 미국 저널리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자신이 진행한 시사 프로그램인 '씨잇 나우(See it now)'에서 그를 매우 논리적으로 비판한 반면 매카시는 그저 인신공격과 어거지 논리만 주장하자 그 영향력을 잃었다.[18] 이 과정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에 상세히 나와 있다.[19] 또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인 1962년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도 매카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이렇게 반공 선동의 부작용으로 매카시는 궁지에 몰렸는데 이때 초조하여 머리가 안 돌아갔는지 멍청하게도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바로 군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20] 매카시는 군부 내의 고위 장교 및 장성들 사이에도 소련 간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현대적인 미군의 설계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비난하는 실책을 저질렀다.[21] 심지어 1954년 4월 21일 육군-매카시 상원 청문회에서 2000만 명의 미국인이 티비로 시청하는 와중에 육군의 변호사를 맡은 조지프 나이 웰치를 상대로 논리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군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군 내부의 분노를 불러왔을 뿐 아니라, 원수 출신이자 조지 마셜의 부하였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군부 고위급에 스파이가 있다는 주장은 몇 년 전까지 군의 최고위층이었던 아이젠하워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였고 더군다나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이 민주당 20년 정권 끝내 보자고 원래 민주당 성향이었던 인물을 정말 온갖 노력과 설득으로 영입해서 대통령까지 만든 인물이었다. 공화당으로선 자당 소속 대통령은 물론 공화당까지 팀킬[22]할 수 있는 매카시의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돌출행동을 용납할 수 없기에 매카시가 속했던 공화당조차 그에게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1954년 12월 자기가 속한 상원에서까지 비난결의가 채택되기에 이르렀고[23] 비록 상원의원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사실상 민주당과 소속당 공화당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지병인 편두통이 더욱 심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욱 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실의에 빠진 채 1957년 만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과음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성 간염. 반공주의 열풍을 이용해 권력을 쥐기 위해 무지성 반공운동에 앞장서 칼자루를 휘둘렀으나 결국 자신이 해 온 모든 악행을 돌려받은 채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인 셈.

용케도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의 신분은 유지해서[24] 장례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양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의례적으로 참석해 주긴 했다.

매카시 사후 그의 선동에 의해 사회적 매장을 당한 인물들 중 죽은 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공적이 복원되었고 살아남은 자와 친인척들도 사회에 돌아와 일상 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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